가회동 백인제 가옥
가회동 백인제 가옥(嘉會洞 白麟濟 家屋)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7길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가옥이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1977년 민속자료로 등재될 때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가 소유하고 있어 백인제 가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1]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 |
종목 | 민속문화재 (구)제22호 (1977년 3월 17일 지정) |
---|---|
수량 | 일곽(737평) |
시대 | 조선시대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7길 16 (가회동) |
좌표 | 북위 37° 34′ 49.6″ 동경 126° 59′ 2.7″ / 북위 37.580444° 동경 126.984083°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배경
편집1913년[2] 한상룡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다고 전한다.[3]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4] 1906년 가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몇 년에 걸쳐 주변의 작은 가옥 12채를 사들여 집터를 마련하고 1913년 6월 경성부 가회정(町) 93번지(현 종로구 가회동 93-1번지)에 새 가옥을 준공했다. 1976년 문화재 지정 당시 1876년에 건축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착오에 의한 것이다.[5] 한상룡은 준공 4개월 후 일본 천황의 간나메사이(神嘗祭, 신상제 -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맞추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배풀었다.[5] 이때문에 문화재 전문가 황평우는 이 집의 이름을 한상룡 가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6]
한상룡은 이 집에 1928년까지 거주하였고 1935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조선중앙일보 부사장을 역임한 최선익이 사들였다.[7] 개성 출신의 부호였던 최선익은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고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2] 1944년 외과 의사이자 흥사단 활동가였던 백인제가 이 집을 인수하였다. 백인제는 1950년 9월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고[8], 이후 백인제의 부인 최경진과 자식들이 계속하여 거주하였다.[7] 1988년 집의 소유권은 아들 백낙조에게 이전되었으며 2009년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였다. 2015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7]
건축
편집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가옥은 안국동 윤보선가와 함께 북촌의 대규모 한옥을 대표한다. 일제강점기의 한옥으로 근대 한옥 양식의 특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위치에 세워졌다.[9] 건축 자재로 압록강의 흑송을 들였다고 한다. 한옥의 재료로서 흑송이 쓰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07년 경성박람회 때 흑송 목재가 소개된 바 있다.[10] 실재 흑송을 사들여 썼는 지, 아니면 당시 헐리고 있던 경복궁의 목재를 썼는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6]
백인제 가옥은 한국 중부 지방 한옥 배치를 기본으로 하면서 서양과 일본의 건축 요소를 받아들인 집이다.[11] 크게 행랑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서울지방 상류층 주택과 달리 사랑채과 안채를 이어 붙여 지었다. 높은 솟을 대문이 입구에 놓이고 대문 좌우로 광과 부엌이 있으며[3]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안뜰과 사랑 마당을 구분하고 있다.[12] 사랑채에는 4칸의 방과 대청을 놓았으며 긴 툇마루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앞뒤로 퇴칸을 두었고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을 일자로 배치하였다. 별당은 뒤뜰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3]
한옥으로는 특이하게 사랑채에 2층을 두었는데 한상룡은 2층을 다다미방으로 꾸몄다. 방앞으로는 한옥의 일반적인 양식인 쪽마루 대신 유리창을 단 문을 달고 그 안쪽으로 일본식 복도를 두었다. 이러한 요소는 한상룡의 중요한 손님인 일본 관료나 기업인들에게 일본화된 본인을 보여주는 도구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12] 서양 건축 요소인 붉은 벽돌도 함께 썼으며 안채의 부엌 위에도 작은 다락방이 있다.[13]
갤러리
편집-
사랑채
-
사랑채의 유리창이 달린 문
-
가옥 내부의 복도
-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별당
-
대문
-
안뜰과 위쪽으로 보이는 사랑채 2층
-
뒤뜰
문화
편집관람
편집백인제 가옥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이며 오후 5시 30분 입장을 마감한다. 자유 관람은 외부만이 가능하며 해설을 들으며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선 예약하여야 한다.[14] 관람객의 수는 평일 3백여명 주말 7백여명 정도로 80% 이상이 내국인이라고 한다.[13]
각주
편집- ↑ “서울 북촌 백인제 가옥 이르면 5월 일반 공개”. 연합뉴스. 2014년 1월 23일. 2015년 11월 25일에 확인함.
- ↑ 가 나 백인제 가옥의 역사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서울역사박물관
- ↑ 가 나 다 가희동 백인제 가옥, 문화재청 - 건립연도를 고종 11년(1874)로 설명한 것은 1976년 조사 당시의 착오.
- ↑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1991년 ISBN 89-7199-036-8, 96쪽
- ↑ 가 나 서울시장 공관 백인제家 논란…이완용 외조카가 건축, 노컷뉴스, 2012년 11월 6일
- ↑ 가 나 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 백인제 가옥이 아니라 한상룡 가옥이다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서울문화투데이, 2012년 11월 16일
- ↑ 가 나 다 100년의 역사 ‘백인제 가옥’ 개방, 한겨레, 2015년 11월 18일 - 기사중 백인제가 1968년까지 거주하였다는 것은 등기부 상 소유권과 거주를 혼동한 착오임.
- ↑ 백인제 백병원 설립자 '전시 납북자' 공식인정, 국제신문, 2013년 5월 8일
- ↑ 백인제 가옥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서울역사박물관
- ↑ 백인제 가옥 소개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서울역사박물관
- ↑ 백인제 가옥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Visit Seoul Net
- ↑ 가 나 100년 古家 '백인제 가옥' - 백남우 칼럼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미디어파인, 2017년 1월 19일
- ↑ 가 나 다 영화 ‘암살’의 무대, 백인제 가옥 가 보셨나요?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서울&, 2016년 6월 30일
- ↑ 백인제 가옥 관람 안내 Archived 2018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서울역사박물관
참고 자료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가회동 백인제 가옥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가회동백인제가옥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