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택
감택(闞澤, ? ~ 243년 11월[1])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덕윤(德潤)이며,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사람이다.
생애
편집팔삭둥이였으며,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매우 컸다.[2]
집안은 대대로 농부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돈이 없어 남을 위해 책을 베끼는 일을 하면서 종이와 붓을 공급받았고, 책 한 권을 다 베낄 때마다 그 책을 외웠다.[3] 스승을 따라 강론하고, 여러 전적을 보고 궁구하였으며, 또 역법에 통달하여 이름을 드러냈다.[3] 효렴으로 추거되어 전당장(전당현의 현장), 침령(침현의 현령)를 지냈다.[3]
217년, 손권(孫權)이 표기장군이 되자, 감택을 불러 서조연으로 삼았고, 황룡 원년(228년)에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서로 삼았다.[3] 가화 연간에는 중서령이 되었고 시중을 겸했다.[3]
적오 5년(242년), 태자태부가 되었고 예전의 중서령은 계속 겸했다.[3] 경전의 문장이 많아 모두 다 쓰기에는 어렵다고 여기고, 여러 사람들의 말을 참작하여 《예기》의 문장과 그 주석, 설을 요약한 것을 만들어 문제와 노왕 두 궁의 황자를 가르쳤으며 또 출입할 때와 빈객과 만날 때의 의식을 정했고, 또 《건상력주》를 지어 역법을 바로잡았다.[3]
조정에서는 경전에 의문점이 있으면 자주 감택에게 찾아가 자문했다.[3] 유학에 힘써 도향후에 봉해졌다.[3] 손권의 질문을 받고 가의의 《과진론》을 권하여 읽게 했다.[3] 예전에 여일이 교사 직분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다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 감택은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것은 당대에 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리되었다.[3]
《삼국지연의》의 묘사
편집208년, 말솜씨가 뛰어나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황개(黃蓋)의 고육지계(苦肉之計) 밀서를 조조(曹操)에게 전달하여 계략을 성공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