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익(姜炳益, 1913년 12월 22일(1913-12-22)~1981년 1월 13일(1981-01-13))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 말기의 대한 광복군 활동 관련 독립운동가로, 1981년 1월 13일(1981-01-13), 대한민국의 경상남도진주시귀곡동에서 숙환(지병)으로 인해 향년 69세로 하세한지 9년 후,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강병익
신상정보
출생1913년 12월 22일(1913-12-22)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율곡동리 76번지
사망1981년 1월 13일(1981-01-13)(67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 귀곡동
사인숙환(지병)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묘번 2-381)
거주지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양군 금곡면 송곡리
국적대한민국
본관진주
직업항일 독립 운동가
학력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장쑤상하이 후장 대학교 법률학과 4학년 2학기 중퇴(1940년 10월)
부모강철벽(부), 평양 김씨 부인(모)
형제2남 2녀(4남매) 중 차남(셋째)
활동 정보
관련 활동독립운동
활동 기간1941년~1946년
주요 활동광복군
경력대한 광복군 상사 전역(1945. 08. 22.)
상훈건국훈장 애족장 추서(1990. 08. 15.)
웹사이트강병익 : 독립유공자 공훈록 - 국가보훈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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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2월 22일, 일제 시대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율곡동리 76번지라는 농가(農家)에서 출생하였고, 1926년 3월, 평북창성보통학교 졸업을 거쳐, 1932년 3월, 평남 평양고등보통학교졸업하고 나서, 1933년 8월,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철학과 1학년 1학기를 자퇴(중퇴)하였으며, 1936년 8월,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3학년 1학기를 자퇴(중퇴)하였고, 1940년 10월,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장쑤상하이 후장 대학법률학과 4학년 2학기를 자퇴(중퇴)하였으며, 1941년 3월부터 입대한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광복군 제3지대는 징모 제6분처가 발전하여 성립되었다. 징모 제6분처는 일본군 점령 지역과 근접한 안후이 성(安徽省)의 푸양(阜陽)에 정착한 후 초모 공작을 전개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는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내의 지하 조직망을 화베이, 화중, 화난 지역으로 모두 각각 나누고 이를 기반으로써, 강병익 그는, 1944년 11월 광복군 중사 계급으로 진급하였고, 이어 동년 동월에 광복군 제3지대원의 직함으로 하여금, 화중 지역의 광복군 전방 공작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45년 5월에는 광복군 상사 계급으로 진급하였고, 이어 동년 동월에 국내정진훈련반 구성원으로 편입되었으며, 광복군의 전시 관련 전세 작전으로 광복군 군내에 복무하던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유 해방)을 목도하였고 1945년 8월 22일, 광복군 상사로 전역한 이후, 1946년 4월 중순에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본토 대륙과 만저우와 평안북도 창성 고향 향리를 모두 떠나, 자신의 간소한 직계 일가족들과 모두 함께 한반도의 삼팔선을 넘어 서울(당시 미군정 조선 시대의 수도)로 귀국 및 귀환하였다. 이후 1947년 3월부터 경남 진주에 정착하였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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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0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경상남도 울산 소재 모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 또한, 1995년 5월 10일을 기하여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묘번 2-381)으로 이장되었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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