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아 (1946년)
고은아(한국 한자: 高銀兒[1], 본명: 이경희, 본명 한자: 李京姬[2], 1946년 2월 16일~ )는 대한민국의 배우, 사회기관단체인이다.
고은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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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경희 |
출생 | 1946년 2월 16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부 | (78세)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영화배우 사회기관단체인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 |
소속사 | 무소속 |
형제자매 | 이재철 (남동생) |
배우자 | 곽정환 (1967년 결혼, 2013년 사별) |
자녀 | 곽승남 (아들) 곽승경 (딸) 이승윤 (조카) |
웹사이트 | 고은아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
1965년 홍익대학교 공예과 2학년 재학당시, 정진우 감독에게 발탁되어, 영화 《란의 비가》를 통해 데뷔하였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67년, 합동영화사 사장 곽정환과 결혼하였다.
1967년에는 브라운관에 진출하여 KBS에서 탤런트 활동을 하다 TBC로 옮겨 《사모곡》(1972), 《달래》(1973), 《사미인곡》(1976) 등의 TV드라마에 출연하였다.[3] TV드라마 활동에 전념하면서 영화계와 거리를 두었던 그녀는 1971년 곽정환의 감독데뷔작 《애》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복귀하여,[4] 1972년 《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5] 1977년에는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배우로 꼽힐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6]
197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녀는 1979년 영화 《과부》와 TV드라마 《여자의 얼굴, TBC》을 끝으로, 1980년대 들어서는 연예계활동을 접고 기독교인으로 선교활동과 기독교 방송활동에만 전념했다.[7] 1987년에는 고향 부산에 '은아극장'을 차리고 영화사 '은아필름'을 세워 제작일선에 나섬으로써, 합동영화사와 서울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 곽정환과 함께 부부가 모두 영화사 사장이 되었다.[8] 여자 배우로서는 김지미 다음으로 두번째로 영화사를 차린 것이다. 2012년 제49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곽정환-고은아 부부가 한국영화계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나란히 수상했다.[9]
학력
편집- 부산여자고등학교 (졸업)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미술공예과 (졸업)
작품
편집영화
편집- 1965년 《난의 비가》
- 1965년 《갯마을》
- 1966년 《간첩 작전》
- 1966년 《딸이면 어때》
- 1966년 《물레방아》
- 1966년 《불사조》
- 1966년 《불타는 청춘》
- 1966년 《사랑보다 강한 것》
- 1966년 《산유화》
- 1966년 《소령 강재구》
- 1966년 《소문난 여자》
- 1966년 《순애》
- 1966년 《오늘은 왕》
- 1966년 《5인의 건달》
- 1966년 《종점》
- 1966년 《태양은 다시 뜬다》
- 1966년 《회전의자》
- 1966년 《흑발의 청춘》
- 1966년 《친정 어머니》
- 1967년 《까치 소리》
- 1967년 《가고파》
- 1967년 《고별》
- 1967년 《고향》
- 1967년 《공처가 삼대》
- 1967년 《길을 묻는 여대생》
- 1967년 《남남북녀》
- 1967년 《남매》
- 1967년 《내 몫까지 살아주》
- 1967년 《돌지 않는 풍차》
- 1967년 《비련》
- 1967년 《비서실》
- 1967년 《상처 뿐인 청춘》
- 1967년 《새벽길》
- 1967년 《소복》
- 1967년 《수라문의 혈투》
- 1967년 《악인가》
- 1967년 《안개 낀 초원》
- 1967년 《애인》
- 1967년 《애하》
- 1967년 《연합전선》
- 1967년 《열정》
- 1967년 《제3의 청춘》
- 1967년 《종야》
- 1967년 《청춘극장》
- 1967년 《형수》
- 1967년 《환영》
- 1968년 《귀부인》
- 1968년 《다시 만날 때까지》
- 1968년 《복수》
- 1968년 《비정의 항구》
- 1968년 《사랑했는데》
- 1968년 《어머니는 강하다》
- 1968년 《엄마의 일기》
- 1968년 《순정》
- 1968년 《재혼》
- 1968년 《청등홍등》
- 1968년 《청춘 고백》
- 1968년 《춘풍》
- 1969년 《나도 인간이 되련다》
- 1969년 《남의 속도 모르고》
- 1969년 《남편》
- 1969년 《당신의 뜻이라면》
- 1969년 《독신녀》
- 1969년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 1969년 《밤나비》
- 1969년 《사나이 세계》
- 1969년 《성녀와 마녀》
- 1969년 《식모 삼형제》
- 1969년 《애수의 언덕》
- 1969년 《잠바 Q》
- 1969년 《젊은 여인들》
- 1969년 《정과 애》
- 1969년 《하늘을 보고 별을 따고》
- 1969년 《한번 준 마음인데》
- 1970년 《울고 간 여인》
- 1970년 《팔도 검객》
- 1971년 《고백》
- 1971년 《애》
- 1971년 《어느 부부》
- 1971년 《세 남매》
- 1972년 《아름다운 팔도강산》
- 1972년 《며느리》
- 1972년 《쥐띠 부인》
- 1972년 《쥐띠 부인 2》
- 1972년 《장안 명기 오백화》
- 1972년 《인생은 나그네길》
- 1973년 《천사의 메아리》
- 1973년 《야간비행》
- 1973년 《홍의 장군》
- 1974년 《수선화》
- 1974년 《황비》
- 1974년 《황비홍 소림권》
- 1974년 《유관순》
- 1974년 《실록 김두한》
- 1975년 《동거인》
- 1975년 《연화》
- 1975년 《새벽에 온 방문객》
- 1975년 《내일은 진실》
- 1975년 《흑야》
- 1975년 《불꽃》
- 1976년 《캘리포니아 90006》
-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1978년 《어딘가에 엄마가》
- 1978년 《비둘기의 합창》
- 1979년 《맨발의 청춘 77》
- 1979년 《과부》
- 1979년 《영녀》
- 1979년 《율곡과 신사임당》
드라마
편집제작
편집- 1994년 《무거운 새》
수상
편집- 1966년 제9회 부일영화상 우수신인상[10] 《갯마을》
- 1966년 제1회 대일영화상 신인여우상[11]
- 1966년 제4회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 1972년 제8회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
- 1972년 제1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 1972년 제9회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 1972년 제7회 중도영화상 영화부문 여우주연상[12]
- 1972년 TBC 연기대상 특별상[13] 《사모곡》
- 1973년 제9회 백상예술대상 인기상
- 1973년 TBC 탤런트 주연상
- 1973년 제10회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 1974년 제20회 아시아영화제 주연상[14] 《수선화》
- 1974년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인기상
- 1978년 제17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 2012년 제49회 대종상 영화발전공로상
- 2013년 제14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공로상
각주
편집- ↑ “金和鎭옹과 高銀兒양放談 "개띠福받읍시다"”. 동아일보. 1970년 1월 1일. 2022년 12월 14일에 확인함.
- ↑ “銀幕의『뉴·훼이스』美女들이 보내는 歲拜…좀 더 잘사는 해가 됐으면…”. 동아일보. 1966년 1월 1일. 2022년 12월 14일에 확인함.
- ↑ 高銀兒(고은아) 신앙생활로 보람의 나날 《동아일보》, 1990년 11월 2일
- ↑ 郭貞煥(곽정환)씨「愛(애)」로 감독데뷔 高銀兒(고은아)의 再起(재기)노린 멜로物 《경향신문》, 1971년 11월 15일
- ↑ 最優秀(최우수) 作品賞(작품상)에「義士(의사) 安重根(안중근)」 《동아일보》, 1972년 10월 28일
- ↑ 歌手(가수)수입이 俳優(배우)의 갑절 76년도—演藝人(연예인)수입… 《동아일보》, 1977년 8월 15일
- ↑ 高銀兒(고은아) 劇場(극장)사장님 됐다 《경향신문》, 1987년 1월 15일
- ↑ 高銀兒(고은아) 영화사차리고 社長(사장)에 《경향신문》, 1987년 4월 10일
- ↑ 대종상영화제 곽정환-고은아 부부, 공로상 수상 "놀란 업적들..기립박수" 《데일리안》, 2012년 10월 30일
- ↑ 作品賞(작품상)엔『갯마을』 제9회釜日映畵賞(부일영화상) 《경향신문》, 1966년 3월 5일
- ↑ 제1회大日映畵賞(대일영화상) 作品賞(작품상)에『南(남)과北(북)』 《경향신문》, 1966년 3월 12일
- ↑ 「中都(중도)」映畵(영화)·歌謠祭(가요제)서 選定(선정) 《경향신문》, 1972년 10월 23일
- ↑ …72년도 TBC 《경향신문》, 1972년 12월 28일
- ↑ 아시아 映畵祭(영화제) 韓國(한국),모두 10개賞(상) 차지 《경향신문》, 1974년 6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