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 (축구인)
고훈(1958년 10월 30일 ~ )은 조선족 전 축구 선수이자, 현 축구 감독으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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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출생일 | 1958년 10월 30일 | (65세)|||||
출생지 | 옌볜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 | |||||
포지션 | 은퇴 (과거 공격수 ) | |||||
청소년 구단 기록 | ||||||
1974 | 옌볜체육운동학교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 (득점) | |||
???–1975 | 옌볜군부구 축구단 | |||||
1976–1980 | 선양부대 축구단 | |||||
1981–??? | 옌볜군부구 축구단 | |||||
??? | 지린성 축구단 | |||||
지도자 기록 | ||||||
1981–??? | 옌볜군부구 축구단 (선수 겸 코치) | |||||
???–1998 | 옌볜 현대 (코치) | |||||
1998–2000 | 지린 오동 | |||||
2002 | 상하이 천나이 | |||||
2004 | 옌볜 스지 | |||||
2005–2007 | 옌볜 축구단 |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
생애
편집훈춘시에서 옌볜가무단의 창설 멤버인 음악인 고자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몰래 옌볜체육운동학교에 입학해 축구의 길을 걷게 되었다.[1]
옌볜군부구 축구단에서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중국 내 강팀인 선양시 축구단에 입단하게 된다. 그곳에서 팀의 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거물 사냥꾼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던 그는 옌볜군부구 축구단으로 돌아와 선수 겸 코치로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 정지승과의 인연으로 지린성 축구단에서 활약하게 된다.[1]
1985년, 10년간의 군생활 끝낸 그는 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고 옌볜 현대의 코치로 지내다 1998년, 최은택 감독을 이어 옌볜 오동의 새 감독이 되었다.[1]
첫 감독으로서의 커리어인데도 좋은 모습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어 여러 언론사에의 극찬을 받게 된다.[2] 2000년에는 잠시 브라질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1][3]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옌볜 푸더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옌볜 푸더 구단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1]
논란
편집당시 팀이 재정난으로 임금 체불이 밀리게 되자 2012년 승부조작에 관여하게 되었다. 고훈은 이에 대해 당시 선수들이 임금 체불 문제로 구단에게 시위까지 하는 등의 상황이였으며, 직업도덕에 어급나는 방식이였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선수들과 구단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하기 위해서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쓰며 횡령죄로 무려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1]
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김룡 (2015년 10월 22일). “연변팀 전국 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을 찾아서 》”. 길림신문. 2022년 1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7월 17일에 확인함.
- ↑ 리영수, 리병천, 김창혁 (2022년 7월 19일). “[자치주 창립 70주년 특별기획] 파란의 세월…리호은 시대, 최은택 시대, 고훈 시대 (축구의 고향 연변에 다가가다 3)”. 연변일보. 2023년 7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7월 18일에 확인함.
- ↑ 배극인 (2009년 9월 25일). “[스펙트럼]中옌볜팀 고훈감독『한국축구 투지는 좋은데…』”.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