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주 (광주 학생 운동)
김기주(金基柱, 1908년 12월 10일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1929년 11월 3일의 전남 지역의 광주 학생 운동 관련 항일 독립운동가로, 사후 1982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과, 1990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1940년 12월 24일 )는김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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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본명 | 김홍걸(金鴻杰) → 김기주(金基柱) |
출생 | 1908년 12월 10일 대한제국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441번지 |
사망 | 1940년 12월 24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대덕리 | (32세)
거주지 |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주부 |
국적 | 대한제국 |
본관 | 광양 |
직업 | 항일 독립 운동가 |
학력 | 전남 광주사범학교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 중퇴(1925년 10월) |
부모 | 김긍남(부), 나주 나씨 부인(모) |
형제 | 2남 1녀 중 막내(차남) |
친척 | 김치식(할아버지) |
활동 정보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활동 기간 | 1925년~1936년 |
주요 활동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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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추서(1982. 08. 15.)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1990. 08. 15.) |
웹사이트 | 김기주 : 독립유공자 공훈록 - 국가보훈처 |
생애
편집대한제국 전남 장성(長城)의 서삼면 장산리에서 김홍걸(金鴻杰)이라는 아명(兒名)으로 출생한 그는, 1913년 6세 때에 김기주(金基柱)로 개명(改名)하였고, 1915년 3월에 전남장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같은해(1915년)의 10월에 전남함평보통학교로 전학한 이후 1921년 3월에, 전남함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이후 1925년 3월 당시에, 전남 광주사범학교 2학년 재학중, 동교 3학년생 선배 하의철(河誼喆) 등과 함께 동년(1925년)의 4월, 민족 차별 교육을 일삼던 일본인 교유(敎諭)였던 에다 히로니치(江田 廣日)를 타교로 몰아내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동년(1925년)의 10월에 광주사범학교를 2학년 자퇴하였다.
1927년 3월에는 강달모(姜達模), 임종근(林鍾根) 등과 함께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교사로 선임되면서 교내 대한제국 항일 학생 독립 운동 조직의 확대에 더더욱더 노력하였다. 2년 이후 1929년 3월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제자들 졸업을 기해 광주고등농림학교 교사인 김기주 그를 비롯하여, 송동식(宋東植)·홍귀주(洪貴周) 등을 비롯한, 김기주 그 자신의 전남 장성 동향 동료 및 함평 소재 동교 동창생 모두 14명은 당시 전남 광주 광산 읍내 청요리집인 《보성 영빈루》에 모여, 1929년 3월 이후의 대한제국 항일 독립 운동에 관한 방도를 협의하였다.
일단, 이미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교사를 그만둔 직후 김기주 그는, 보통학교 교직으로 달리 나아가 전남장성보통학교 훈도로 재직하면서 광주사범학교 교사들과 함께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전남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결국 그렇게 붙잡힌 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 사건에 연루 조처까지 되어 1930년 10월, 전남 광주지법(광주지방법원)에서는 소위 소요 선동죄·치안유지법 위반죄 등으로 인하여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결국 항소하여 1931년 6월 경북 대구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후 1932년 11월 6일, 만기 출감하였다.
사후
편집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82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1990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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