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인
개요
편집임진왜란 때 김충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했다. 1620년(광해군 12년)에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로 제수받았고,[1] 이듬해인 1621년(광해군 13년)에는 변방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가의대부로 승진하는 동시에 광해군으로부터 성과 이름, 자, 본관을 하사받았다.[2][3] 또 다음해인 1622년(광해군 1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2][4]
후손들은 그가 처음 들어온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자손으로는 김귀성(金貴成)[5], 김흥발(金興發)[6], 김득추(金得秋)[7], 김수태(金守泰)[8]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만력 48년(1620년) 사여모(沙汝某) 가선대부 임명 교지〉
- ↑ 가 나 《모하당문집》(중간본) 권2, 부록, 金誠仁行錄
- ↑ 〈천계 원년(1621년) 김성인(金誠仁) 가의대부 임명 교지〉
- ↑ 〈천계 2년(1622년) 김성인 자헌대부 임명 교지〉
- ↑ 〈천계 원년 김귀성 교지〉가 남아있다.
- ↑ 1676년(숙종 2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강희 15년 김흥발 무과 홍패〉.
- ↑ 김성인의 증손자다. 출처: [1]
- ↑ 〈가경 5년(1800년) 김수태 통정대부 임명 교지〉와 〈가경 15년(1810년) 김수태 가선대부 임명 교지〉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