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빈(金應彬, 1914년[1] ~ ?)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로 남조선로동당의 간부였다.

김응빈
金應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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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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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북제주군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나니와 상업학교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1930년대김삼룡 계열의 운동가로 경성부 지역의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삼룡이 주축이 된 일제강점기 말기의 비밀 조직 경성콤그룹에서는 섬유노동조합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될 때 공산 계열 노동자 대표를 맡는 등 이 무렵 정국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2]

한국 전쟁 중에 조선로동당 서울시당 위원장[3]조선인민유격대 제1지대장을 맡는 등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리승엽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유격전에도 참여했다. 1951년 초에 조직된 제1지대는 서울경기도 지역 출신의 유격대원들로 구성되었으나, 지역적 한계로 큰 전과는 올리지 못했다. 또한 유격대원을 훈련시키는 기관으로 남로당 파벌의 군사적 배경이었던 금강정치학원 원장에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3년부터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으로 인해 남로당계가 제거될 때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인된 내용은 1953년 8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박헌영을 출당시킬 때 종파분자로 판정받아 주영하, 장시우, 권오직 등과 함께 출당 처분을 받은 것이다.[4]

간첩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으로 파견되어 김일성 정권 전복을 위한 정치적 모략과 암해 활동을 감행하면서 자파의 리승엽과 조일명, 리강국 등을 등용할 때 김응빈을 금강정치학원 원장에 임명한 것도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또한 박헌영과 리승엽이 1951년 9월에 무장 폭동을 준비했을 때 김응빈은 폭동 지휘 책임자에 임명되었으며, 이 쿠데타가 성공하여 박헌영을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가 조직되면 무역상이 되기로 했다고 적혀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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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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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년 11월 30일). 〈제1부 김정강 - 불꽃회의 결성과 활동〉.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서울: 선인. ISBN 89-7696-801-8. 
  2. 안성일 (2004년 6월 20일).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분단시대의 기아 이현상 - 남로당 붕괴되다〉.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 서울: 선인. ISBN 89-89205-72-7. 
  3. 김남식 (1991년 8월). “6·25당시 남한의 빨치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청년》 (제1호). 
  4. 임경석 (2004년 4월 15일). 《이정 박헌영 일대기》. 서울: 역사비평사. 467쪽. ISBN 89-7696-8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