녜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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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룽전(중국어 간체자: 聂荣臻, 정체자: 聶榮臻, 병음: Niè Róngzhēn, 한자음: 섭영진[1], 1899년 12월 29일 ~ 1992년 5월 14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녜룽전
聶榮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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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 |
임기 | 1959년 9월 10일 ~ 1987년 1월 8일 |
주석 | 류사오치 중공 국가원수 둥비우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쑹칭링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둥비우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주더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쑹칭링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화궈펑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예젠잉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덩샤오핑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후야오방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리셴녠 중공 국가주석 우란푸 중공 국가주석 권한대행 리셴녠 중공 국가주석 |
총리 | 저우언라이 중공 총리 린뱌오 중공 총리 권한대행 저우언라이 중공 총리 덩샤오핑 중공 총리 권한대행 저우언라이 중공 총리 장춘차오 중공 총리 권한대행 화궈펑 중공 총리 자오쯔양 중공 총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9년 12월 29일 |
출생지 | 청나라 쓰촨성 장진 |
거주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중화인민공화국 톈진 |
사망일 | 1992년 5월 14일 | (92세)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경력 | 중국공산당 당무위원 중국공산당 명예고문위원 |
정당 | 중국공산당 |
배우자 | 룽성셴(龍升賢, 재결합) 장루이화(張瑞華, 이혼) |
자녀 | 딸 녜리(聂力) |
군사 경력 | |
복무 | 중국 인민해방군 육군 원수 전역 |
지휘 |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
주요 참전 | 2차 대전, 국공 내전, 한국전 |
생애
편집쓰촨성 충칭 근처의 장진 현(현재는 충칭 시에 편입되어 장진 구가 되었다)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0년 일하면서 공부하는 "근공검학" 프로젝트에 의해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같이 유학을 왔던 저우언라이와 알게 되었다. 1921년 벨기에로 가서 공학을 공부했고, 1923년 공산당에 입당(가입)했다. 1924년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1925년 귀국하여 황푸군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장교로 일하다가,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국민당군을 탈주하여 난창 봉기에 가담했다. 이후 각지의 봉기에 참여하다 마오쩌둥과 주더의 홍군 제1방면군에 가담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팔로군 제115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아 사단장 린뱌오와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의 항복 이후 국공내전이 재발했는데 이때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정치위원이 되어 1949년 베이징과 톈진의 국민당군을 분쇄하는 데 공을 세웠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베이징 시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편집이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직책을 맡아 한국전쟁에서 공산군측의 작전을 입안했다.
정치
편집1955년 인민해방군에 장성 계급 제도가 도입되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의 계급을 받았다. 이후 국무원 부총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맡아 인민해방군의 무기현대화에 공헌했고, 중국의 핵무기개발을 주도했다.
최후
편집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국방위원장 자리를 잃었으나, 마오 사후 사인방의 체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1959년 9월 10일부터 1987년 1월 8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 ↑ “원로 세대교체 신호탄/이선념 사망이후의 중국”. 1992년 6월 24일. 2023년 1월 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