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 (1926-2019)

노재현(盧載鉉, 1926년 8월 8일 ~ 2019년 9월 25일)은 대한민국군인, 정치가이며 제21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호는 석봉(碩峯)이다. 사위는 GS건설 대표이사사장인 허명수(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아우)이다. 경상남도 마산 출신이다.

노재현
盧載鉉
별명 호(號)는 석봉(碩峯)
출생일 1926년 8월 8일(1926-08-08)
출생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사망일 2019년 9월 25일(2019-09-25)(93세)
본관 교하(交河)
종교 천주교(세례명: 이냐시오)
복무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7년 ~ 1977년
최종계급 대장(大將)
주요 참전 한국 전쟁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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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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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마산 창신고등보통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 국방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52년 육군 사단 포병감, 1954년 제 25사단 포병단장을 지냈다. 1956년 육군포병학교 교장, 1957년 제30사단장, 1960년 제7사단장, 1962년 육군본부 감찰감, 1964년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1966년 군단장, 1969년 육군참모차장을 지낸 후 제20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지내다가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제21대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에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일부 군 지휘관들이 군의 지휘계통을 무너뜨리고 하극상을 단행한 12.12 군사반란은 군 내부의 갈등구조에서 비롯되었으며, 당시 군의 총 책임자로서 아군끼리의 유혈충돌은 막고 수습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대통령이 재가하도록 하였다. 그 직후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통감하고 직에서 물러났다.

12.12 사건-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20분경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고 예광탄의 불줄기가 하늘을 치솟는 가운데 총관 공관은 암흑상태가 되어버렸다. 총장 공관은 장관 공관에서 직선거리 100m쯤 떨어진 곳이라 국방부 장관 부관은 재빨리 정세를 살피려고 나갔다. 총장 공관에 모여들었던 차량의 불빛이 장관 공관으로 향하는 듯 보이는 순간 무장 괴한들이 장관 공관도 습격할 것처럼 보였든지 부관은 「장관님,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빨리 피하십시오.」라고 다급하게 알려왔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계엄 사령관이나 국방부 장관을 인질로 삼아 군법회의를 방해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바가 있기에 무장 괴한이 아니면 김재규의 잔존지지 세력이 생명을 걸고 총장과 장관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곧장 국방부로 달려갔다. 다만 퇴근 시간대와 겹쳐 교통정체로 시간이 지체되어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 가족들도 놀라 뒤따라 나섰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뒤따라 나선 것도 아니고 가족을 데리고 나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 장관은 합수부 소행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두환 합수부장이 유능한 수사관을 시켜 세 번이나 정승화 총장의 10. 26 관련성을 조사한 후 무혐의 결과를 국민에게 발표까지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로 가던 중 국방부와 통신이 연결되었는데 국방부에서도 사태 파악을 그때까지 못 하고 있어 육본으로 갔다. 장관은 육본에서 상황 보고를 받고 누구의 소행인지 알게 되었다.

여기서 장관은 우리 군과 반란군이 충돌하면 병사들과 서울 시민이 엄청나게 희생될 것으로 판단하고 우리 군과 반란군 양측을 설득하기로 한다. 당시 판단으로는 진압하려면 장태완의 지휘권을 떠나 이미 반란군에 붙은 수경사 주력 병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싸워야 했고, 박준병(훗날 국방부와 육군 본부 장악을 위한 병력동원 요청을 거부하였기에 12.12 재판에서 박준병은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함)의 20사단의 일부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퇴계원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져야 했다. 그리고 국방부를 점령한 박희도가 이끄는 공수 부대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삼각지에서 전투를 치루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노태우과 황영시의 일부 부대 이동에 따른 전방의 공백으로 북한군에 대한 경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류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의 권유로 한미 연합사로 갔다. 모든 정보를 신군부의 보안사가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정보수집 및 원할한 통신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관은 연합사에 가서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미국 국방성과 미 태평양 사령부에 이 사태를 주한 미군 쪽에서 보고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때 연합사에는 글라이스틴 대사도 와있었기에 장관은 모든 것을 협의할 수 있었다. 연합사에서는 통신이 원활했다. 국방부 장관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연합사에서 했다. 8군 내 한미연합사와 수경사령부와는 통신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노 장관은 장관의 역할을 못 했다고 하는 얘기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했다.

장관은 연합사에서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보안사령관, 각 군사령관 등과 통화를 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일단 수습해 놓고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1군, 3군사령관에게는 장관 지시 없이는 절대로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했다. 또 윤성민 참모차장, 30단 사람들과도 서로 병력 출동을 자제하기로 구두로 합의했다.

반란군 측과 우리 군부대 양측을 모두 자제시키며 모든 사태를 원상회복시키려는 장관의 설득과 노력은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장관의 많은 통화는 상대방들에 대한 설득, 회유 그리고 고성의 연속이었으며 이 모든 것을 위컴 사령관을 비롯한 연합사 관련자들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노 장관은 우리 군과 반란군의 유혈 충돌로 인한 희생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전두환 소장은 결재받을 것이 있으니 보안사로 와 달라고 했지만 노 장관은 결재받을 것이 있으면 직접 연합사로 오라고 호통을 쳤는데 전두환 소장은 자신의 회유가 먹히지 않자, 유학성 장군에게 전화를 넘겼다. 유학성은 국방부라면 가겠다고 해서 노 장관은 국방부로 향한다. 이때 연합사 사령관과 주한 미 대사는 위험하다면서 노 장관의 국방부행을 만류한다. 그러나 노 장관은 위험을 무릅쓰고 국방부로 갔다.

국방부에 몇몇 장성들이 있었고 거기서 장관은 전두환 소장에게 연락해 국방부로 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기가 어렵다고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 장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화와 설득을 통해 수습해 보려고 하였던 장관의 당초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믿었던 부하로부터 배신당한 것과 같은 허탈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사태 보고 하러 국방부를 나선다. 국방부를 나서던 중 전두환은 오지 않고 박희도가 이끄는 공수 부대가 와서 총을 난사하였다. 장관실도 총탄의 세례를 받았다.

그동안 노 장관과 관련하여 온갖 풍문이 나돌았다. 노 장관이 반란군에게 투항하도록 진압군에게 지시했다는 둥, 미 대사관으로 도망갔다는 둥, 전두환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둥,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는 둥, 보안사에 끌려가서 쩔쩔매면서 비굴하게 굴었다는 둥, 연합사 미국 측으로부터 핀잔만 들었다는 둥, 피신을 위해 가족들을 택시에 태웠다는 둥, 진압하려는 순간 장태완을 수경사령관 직에서 직위 해제했다는 둥(장태완 장군이 행주대교를 막은 사실이 없음), 별의별 거짓 정보가 난무하고 있었다. 어불성설이며 인격 살인이다.

장관은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양측간에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빠른 수습을 위해 결재했다고 한다. 모 월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노 장관의 말을 잠깐 인용하고자 한다. ‘이렇게 위험한 상태에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장관이 병력을 내주지 않아 진압을 못하고 또 아까 뭐라고 그랬지요. 장관이 비겁하게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진압도 못 하고 그게 무슨 장관이냐 이런 얘기에요.’ ‘그럼 내가 병력을 꺼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고 아군끼리 싸움 붙여 수천 명, 수만 명 죽게 해야 장관입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군대에서 뼈가 굵고 전쟁을 치른 사람인데, 3년 동안 전방에서 하루도 후방에 나온 적이 없는데 …. 내가 철원 백마고지 전투의 마지막 포병 사령관이었어요. 그런 사람인데(탁탁 책상을 치며) 어떻게 비겁하게 그런 행동을 취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전술적으로 그런 걸 말이죠.’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이었던 김충립씨는 만약 무력 진압했다면 틀림없이 내전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1981년 초반부터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맡았으며, 정계 은퇴 이후에는 1981년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에 1982년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88년 화학연구소 이사장직과 비료공업협회 회장직을 모두 사퇴했다. 1991년 제2대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선출되었고 1995년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을 잠시 역임하였다.

노재현을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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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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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서종철
제20대 육군참모총장
1972년 6월 2일 ~ 1975년 2월 28일
후임
이세호
전임
한신
제14대 합동참모의장
1975년 2월 28일 ~ 1977년 12월 29일
후임
김종환
전임
서종철
제21대 국방부 장관
1977년 12월 20일 ~ 1979년 12월 14일
후임
주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