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균(盧鍾均, 1894년 7월 18일~1939년 6월 13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사후 1995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종균
신상정보
본명노종균(盧種均 → 盧鍾均)
출생1894년 7월 18일(1894-07-18)
조선 황해도 안악군 안막면 판팔리 472번지
사망1939년 6월 13일(1939-06-13)(44세)
일제 강점기 조선 황해도 해주 소재 평남평양형무소 황해 해주형무분소
사인병사(옥사)
거주지대한제국 황해도 안악군 안막면 판팔리 472번지
국적대한제국
본관교하
별칭1921년 당시 경기 인천·개성·평남 진남포·평양·평북 용천·신의주 잠입 시절 백운서(白雲瑞·白運西)·안봉선(安峯仙)·김동우(金東宇·金東愚)·양동오(楊東五)라는 가명(假名)을 잠시나마 사용.
직업항일 독립 운동가
학력경성보성전문학교 문과 1학년 중퇴(1913년 6월)
활동 정보
관련 활동독립운동
활동 기간1916년~1939년
주요 활동임정 관련 활약
경력전직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 판매부 부장 출신
상훈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1995. 08. 15.)
웹사이트노종균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생애

편집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출생한 그는, 1921년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 판매부장 직으로 활동하던 중,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 기자 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부장 비서실 군자금 모집 특파원 홍완기(洪完基)가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국내에서 활동하다 붙잡힌 것을 알고, 냅다 홍완기(洪完基)를 구출하려다가 실패하자, 차라리 동아일보를 퇴사까지 하면서, 당시 경기 인천·개성·평남 진남포·평양·평북 용천 및 신의주 등의 지역을 거쳐, 중화민국 국민정부 지역의 만저우 지역의 펑톈 성 안둥·펑톈 등을 거쳐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시대 본토의 허베이 성 톈진 등을 경유하여 동년(1921년)의 11월 20일,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장쑤 성 지역의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지역으로 망명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金九)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1922년 1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 국장 김구의 명령에 따라, 오면직 등과 함께 소련모스크바 지원 군자금 횡령 혐의로 지목받고 있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신규식(申圭植) 임시 국무총리 권한대행국무원 비서실 서무국 비서장 직에 있었던 김입(金立, 김립)을 권총으로 사살·처단하였다.

1922년 10월, 상하이(上海)에서 김구·신규식 등이 대한독립군 등 무력 관련 기반 확충을 위해 대한노병회(大韓勞兵會)를 조직하고 발기 총회를 개최하자, 대한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 직으로 선정된 그는 동년(1922년)의 12월, 대한노병회의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본토의 각급 군사 학교로의 파견 수학 관련 계획에 따라 베이징 학병단(北京 學兵團)으로 파견되어 1년 간 군사 훈련 교육 등을 이수한 뒤, 192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오다가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본토 장쑤 성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관내의 경찰관들에 의해 붙잡혔으며, 재판에서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만기로 출옥 후 상하이로 돌아오고 나서도, 여전히 1926년 한국노병회 특별구국책진위원 직으로 활동한 그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의경대장(義警隊長) 겸 동단 병인의용대장(丙寅義勇隊長)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좌파 세력들의 도전 또한 차라리 견제를 서슴지 아니하면서 김구의 절대적인 후원 세력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

그 후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동단 특무공작국 국장 직에 임직되어,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거사 등 특무 공작 관련 활동에 관여하는 한편, 1932년 임정 외무부장 등을 지냈던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의기상투(意氣相投)로써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이라는, 별개의 특무 관련 기구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이는 결국 김구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1931년 후반기부터 일제의 중화민국 본토 국민정부 대륙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김구는 차라리 더 강화된 한인 독립 운동과 아울러 중화민국 본토 대륙의 국민당 정부(國民黨 政府) 간에 국제적 연대를 형성할 목적으로써, 당시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행정원 원장이 이끄는, 중화민국 본토 국민당 정부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써 차라리 독자적인 투쟁 관련 역량 등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33년 봄 김구(金九)는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본토의 장쑤 성의 난징(南京)의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華民國 中央陸軍軍官學校)에서, 당시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대륙 본토 시대장제스(蔣介石) 난징 국민정부 행정원장·린썬(林森) 난징 국민정부 주석 등과도 함께 회합하여, 대한인특별반을 개설하기로 결론을 합의 결정하였다. 결국 이에 따라 1933년 장쑤 성의 상하이(上海)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김구의 명령에 따라 동년(1933년)의 11월 군관학교 입교 희망생인 유형석(柳瀅錫) 등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2월 중화민국 허난 성(河南省)의 뤄양(洛陽)에 소재한,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장쑤 성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洛陽 分校)의 교내에 한인특별반이 조직되자, 동년 2월 한인특별반의 교육간부로 보호계를 맡아 학생들을 관장하는 한편 한인 입교 희망생을 계속 모집하였다. 또한 동년 12월 하순에는, 뤄양 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특무대 독립군(大韓民國 特務隊 獨立軍)을 조직하여 민간감찰중대장 및 조사부장에 선임되어 오면직·안공근(安恭根) 등을 비롯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간부들과 함께 국제 관련 정세 및 대한제국 독립 운동 등에 관한 정식 교육을 실시하는 등 항일 특무 관련 활동 공작원 등을 양성하는 데에 실질적 담당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35년 2월 김구의 주도로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가 설치되자, 수용된 대원들의 감독 책임을 맡아 군관학교 입교에 필요한 예비 관련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35년 12월 초순 당시, 한인애국단 단원인 김창근(金昌根)한테는,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참사관 도이 게이오(藤井 景夫)를 암살 처단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동년 말경(1935년 12월 말순), 오면직 등과 함께 난징에서 수수 차례 회합을 갖고 1936년 1월, 김창근 등을 자신의 정치 관련 진영 측에 가입시켜, 동년(1936년) 7월, 비밀결사단체로써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고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를 근거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였다. 또한 동년(1936년) 8월 남경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38년 1월, 상하이에서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의 회장 이갑령(李甲寧, 이갑녕)을 저격·처단하는 등 특무 관련 활동을 전개하다가, 동년(1938년)의 12월, 또다시 국민정부 대륙 중화민국 본토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황해도 해주 소재 평남평양형무소 황해 해주형무분소 옥중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39년 6월 13일, 병으로 인해 옥사 순국하였다.

사후

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5년 8월 15일을 기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