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대평리 전투
공주-대평리 전투 또는 금강 방어선 전투(Battle of the Kum River)는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미 제24보병사단과 국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와 북한군 제3사단, 제4사단, 제105전차사단이 금강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이다.
일부 미국 전사에서는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를 대전 전투에 포함시켜 광의의 대전 전투 (7월 13일~7월 20일)로 설명하기도 한다.
개요
편집공주-대평리 전투는 7월 12일에 금강을 건너 그 남안으로 철수하게 된 제24보병사단의 제34연대가 공주 일대 그리고 제19연대가 대평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3, 제4 양 사단의 도강 공격을 받았다.
14일에 공주 정면의 제34연대 진지가 먼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먼저 공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어 16일에 제19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대평리가 각각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34연대가 다시 한번 적을 방어하려고 했지만 북한군 제3, 제4사단의 협공을 받아 20일에 방어선이 무너졌다.
참가부대 및 주요 지휘관
편집미군
편집- 미 제24사단장 소장 Willam F. Dean (윌리엄 F. 딘)
- 제19연대장 대령 Guy S. Meloy Jr.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7월 16일 부상)
- 제1대대장 중령 Otho T. Winstead (7월 16일 전사)
- 제2대대장 중령 Thomas M. McGrajj
- 제34연대장 중령 Robert L. Wadlington
- 제1대대장 중령 Harold B. Ayres
- 제3대대장 소령 Newton W. Lantron
- 제13포병대대장 중령 Charles W.Stratton
- 제52포병대대장 중령 Miller O. Perry (밀러 O. 페리)
- 제63포병대대장소령 WIillam E. Dressler (7월 13일부터 직무 수행)
- 제11포병대대(155mm곡사포)
- 제26대공포대대 A포대 일부
- 제78전차대대 A중대 일부
- 제3전투공병대대
- 사단수색중대
- 제19연대장 대령 Guy S. Meloy Jr.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7월 16일 부상)
국군
편집- 육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 (미 제24사단 34연대 배속)
북한군
편집- 제1군단장 중장 김 웅
- 제3사단장 소장 이 영 호
- 제7연대장 대좌 김 창 봉
- 제8연대장 대좌 김 병 종
- 제9연대장 대좌 김 만 익
- 포병연대장 대좌 안 백 성
- 제4사단장 소장 이 권 무
- 제5 연대장 대좌 최 인 덕
- 제16연대장 대좌 박 승 희
- 제18연대장 대좌 김 희 준
- 포병연대
- 제105전차사단 장 소장 유 경 수
- 제3사단장 소장 이 영 호
공주 전투
편집국군 기병중대의 활약
편집공주 부근 삼교리 일대에 진지를 구축한 미 제63포병대대 소속의 B포대가 14일 오후 약 400여명의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때 장철부 소령이 지휘하는(직접 현장 지휘는 아님) 육군 독립기갑연대 예하 국군 기병중대가 돌격하여 적의 배후를 타격, B로대 미군 병사들의 탈출을 도왔으며 이 전공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1 Archived 2023년 4월 17일 - 웨이백 머신)에서 기병중대의 소대장이었던 조철돈 소위의 증언 형식으로 그리고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가 1961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 128)와 T. R. 페렌바크가 저술한 미국의 유명한 한국전쟁 역사책인 'This kind of War'에도 기술되어 있다.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1) - 조철돈 소위 증언 원문 발췌
"우리 중대가 유구전투(평택―조치원부근의 전투 참조)를 치르고 공주로 복귀하다 보니 12일 밤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공주의 금강교가 끊어진 다음이었다. 그래서 금강 서안을 따라 밤중으로 말을 달려 그 이튿날 13일 아침에 부여대안에 도착, 그곳에서 배를 구하여 부여로 도하하였다. 부여에서 공주로 가다가 지석리(부여 동북쪽 7.5km) 부근에서 하안정찰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미군 6명을 만나 함께 삼교리로 갔다. 그곳에 포진지가 있었고, 서쪽 강변에는 미군수색중대와 공주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중대는 우금치(삼교리 동북쪽 1.8km) 남쪽에 중대본부를 두고, 우금치 서쪽 고지에 경계병력을 배치하였다."
"14일, 중대본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고개 서쪽 고지에서 사격이 가해져서, 급히 달려가보니 적이었다. 그 고지의 적을 무찔렀는데 그 동안에 삼교리의 포병진지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포대를 구출하려고 달려갔으나, 이미 포대가 수라장이 된 뒤여서 적의 등을 찔러 포대와 합세를 하였을 뿐 적을 격퇴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포대와 함께 그곳에서 철수하게 되고말았는데, 105mm곡사포 5문인가 모두 공이를 뽑아 파괴하였다. 중대의 말(馬)에 미군 부상병을 싣고, 우리 병사들은 걸어서 동쪽의 논산도로로 빠졌는데, 도로에 나오니 미군차량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을 후송해 갔다. 중대는 논산으로 집결하여 그날 밤을 보낸 뒤, 그곳에서부터 미 제34연대의 지휘를 벗어나, 15일 여산―전주로 내려가,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의 장악하에 들게 되었다."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ul' (p. 128) 원문 발췌
"A group of South Korean carvalry rode past the battery and attacked west toward the enemy, but the confusion was so great that no one in the artillery position seemed to know what happened as a result of this intervention"
- T. R. 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 원문 발췌
"Next, it was B Battery's turn. Four hundred enemy infantry surrounded the battery area, and for several minutes something akin to Custer's last stand was repeated. Then, while a group of ROK horse cavalry, who had ridden out of nowhere to attack the enemy, slashed into the North Koreans on the west, the artillerymen went march order."
대평리 전투
편집북한군의 금강 도하
편집7월 15일 저녁부터 19연대 방면으로 북한군의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새벽 03:00부터 적의 제2차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북한군이 도하에 성공하여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9) Archived 2023년 4월 17일 - 웨이백 머신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7월 16일: 방어 제4일째인 이날, 드디어 금강선의 붕괴를 보게 되었다." "1) 제1대대의 전선상황" "적의 제2차 도하공격 : 이날 03:00, 고요에 잠긴 금강 상공에 적의 YAK기 1대가 나타나 조명탄 1발을 투하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공격개시 신호인 듯 적의 포병이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하였다." "이때 연대지휘소와 제1선진지일대에 쏟아진 적화의 치성함이란 연대장 Meloy 대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Europe전선에서도 경험한 바 없는 것이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이어, 이렇듯 강력한 포화의 엄호아래, 작은 배와 뗏목을 저어 도하를 시작한 적은 예의 도섭과 수영의 모습도 보였다."
"이에 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그들의 도하를 막았는데,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남북으로 엇갈리는 포탄과 비산하는 신호탄의 화편이 야공을 수놓은 장관을이루었다. 연대는 조명탄을 쏘아 올려 수면을 대낮같이 밝히는 가운데 제13, 제52, 제11의 3개 포병 대대 30여문의 곡사포와 중박격포 중대의 8문의 4.2”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중화기와 소화기로써 빈틈없는 화강을 구성하여 도강하는 적을 닥치는대로 격멸함으로써 강 남쪽으로의 적의 접안을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여 적이 쉽사리 강을 건너지 못하던 중, 결정적인 사태를 야기케 하는 뜻하지 않은 춘사가 돌발하였으니, 적의 움직임을 낱낱이 밝혀주던 조명탄이 꺼지고만 것이다."
"이는 당시 제11포병대대의 155mm곡사포 1문이 제1대대장의 지휘하에 조명지원만을 전담하였는데, 대대가 이 포의 조명지역에 약간의 수정을 요구한 바, 보통 1~2분이면 족할 이 요구를 과대하게 잘못 이해한 결과 포의 가신을 이동하면서 방위각을 수정하게 된 탓으로 20여분동안이나 조명지원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명지원이 끊겨 강산에 칠흑의 어둠이 덮히게 됨으로써 그 호기를 틈탄 적병이 속속 강 남안에 올라붙게 되었다. 이 정방이야말로 극히 불충분한 장비로써 강행도하에 성공한 일례가 될 것이고 초현대식포병이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실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의 측방침투: 04:00에 대대 우제1선인 C중대(장,Henry T.McGill 중위) 진지에서 먼저 쟁탈전이 벌어졌다." "괴화산 정상에 중대본부를 두고 북쪽 강변을 향하여 3개소대를 배치한 중대는 강북의 미호천이 합류하는 동면 합강리(괴화산 동북쪽 3.5km)부근에서 강을 건너 동쪽의 F중대와의 지극을 타고 우회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대의 우측 제1소대(장,Thomas A.Maher 중위)가 동쪽으로부터 달려든 적의 습파를 네 차례나 물리쳤으나, 소대장 Maher중위가 두부에 경기관총탄을 맞아 전사하는 등 사상자가 속출하여 진지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소대선임하사관이 12명의 소대원을 수습하여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는데, 중대장은 이들을 수용하여 고지정상의 진지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적은 더 이상 중대를 공격치 않고, 고지의 동남쪽으로 돌아 장재리의 중박격포진지로 그 설봉을 돌리는 것이었다."
퇴로 차단 및 연대의 철수
편집배후에 침투한 북한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고 제19연대는 각 제대별로 철수를 시작하는데 19연대장인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대령 (훗날 주한 미군 사령관 역임)이 부상을 당하였고 연대장 이하 탈출 과정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p. 489–491) Archived 2023년 4월 17일 - 웨이백 머신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연대장의 탈출: 한편, 13:30에 하달된 연대장 대리 Winstead 중령의 철수명령에 따라 연대는 두만리 남쪽의 도로 차단지점부근으로 집결하게 되었지만 끝내 도로가 열리지 않아 그곳에 못밖힌 채 시간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후로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날이 저물게 되자, 동서로 가로막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그 남쪽에서 도로의 돌파가 시도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연대병력은 삼삼오오로 남쪽으로 길을 찾아 흩어지게 되었다."
"이에 18:00, 그 남쪽에서 McGrail 중령의 기갑종대의 돌파기도가 무산되었을 무렵, 그때까지 부상을 입은 연대장과 함께 도로가 뚫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연대참모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의견을 모아 다음과 같이 방침을 정하였다." "『①연대장은 경전차에 탑승토록 하여, 그 전차로써 차단선을 강행돌파케 한다." "②전차가 길을 열면, 빈 차량만이 그 뒤를 따른다." "③나머지 병력은 S―3보좌관 Edgar R. Fenstermacher 대위가 통합 지휘하여 도보로 철수한다.』" "즉, 당시에 그곳에 M―24경전차 1대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의 장갑과 돌파력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연대장을 구출키로 한 것이다."
" 그리하여 연대장을 태운 전차가 동전차소대장 J. N. Roush 중위의 지휘아래 선두에 나서서 길을 막고 있는 차량들을 밀어내고 길을 열자, 그 뒤로 제52포병대대의 105mm곡사포 1문을 끄는 견인차 1대를 비롯한 20여대의 차량이 뒤따르게 되었는데, 이 차량종대가 적의 기관총과 대전차포 등 직사화기가 화강을 형성한 화력차단선을 뚫고 강행돌파를 시도한 바 마침내 구사중에서 일생을 얻게 되었다."
"전차가 철화를 뒤집어 쓰면서도 적에 응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맥진만을 거듭한 결과 그 차단선은 넘어설 수 있었지만 얼마를 더 남하하지 못하여 기관고장으로 말미암아 노상에 각좌되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그곳이 △227의 동록이라, 적의 화망을 가까스로 벗어난 지점이었다. 뒤따르던 차량들도 그 차단선을 넘는 동안에 적화에 더러 파괴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동전차와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이에 연대장은 전차에서 내려, 소대장 Roush 중위로 하여금 소이수류탄으로써 동전차를 파괴토록 하였는데, 이때 △227에서 유성을 목표로 철수중이던 G중대를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연대장은 동중대장 Barszcz 대위에게 유성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수용진지를 급편토록 명령한 다음,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유성으로 후송되었다."
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
편집연대장 일행이 적의 차단선을 강행돌파로 탈출에 성공한 이후 잔여병력들이 제각기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종신부 Herman G. Felhoelter과 부상병 30명이 두만리 이근 야산에서 북한군에게 학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p. 491) Archived 2023년 4월 17일 - 웨이백 머신에는 이 학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원문에는 군목으로 오기하여 군종신부로 임의 수정하였음)
"잔여병력의 야간철수: 한편, 연대장 일행의 차량종대가 적의 차단선을 돌파한 뒤, 그 북쪽의 혼성병력에 대한 지휘를 맡게된 Fenstermacher 대위는 어두워진 다음인 20:30을 전후하여 철수준비를 시작하였다. "그곳에는 500여명의 병력과 100여대의 차량이 집결중이었는데, 차량은 모두 파기키로 하고, 병력은 경부본도의 동쪽을 연한 고지의 능선을 따라 유성을 목표로 철수키로 하되, 보행이 어려운 중상자들은 들것으로 나르기로 하였다. "
"그런데, 차량에 휘발유를 뿌려 소각조치하고 그 화광이 충천하는 가운데 철수제대를 편성하던 중인 동대위가 적탄을 목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 한번 지휘자를 잃는 가운데 21:00에 남은 병력은 각기 제대별로 철수로를 찾아나서게 되었는데, 야간에 지형조차 생소한 산길을 택하여야만 되었던 그들의 참담한 정황에 대하여, 동년 7월 19일자 New York Herald Tribune 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그한 단면이 다음과 같았다. "
"『……100여명으로 추산되는 보병, 포병, 공병 및 의무대의 혼성병력이 도로 동쪽의 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들중의 30여명은 부상자였으며, 들것에 누운 중상자도 여러명 있었다. 그 중상자는 부상을 입지않은 병사 40여명이 들것으로 운반하였는데, 산을 오르는 동안에 들것을 운반할 병사들이 대오를 이탈하고 말았다. 산정에 이르러 남은 병사들은 더 이상 중상자들을 운반해 갈 수 없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상자들을 그곳에 두고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Herman G. Felhoelter 군종신부가 자신도 그들과 함께 그곳에 남겠다고 하여 군종신부와 중상자만이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적병이 고지위로 뒤쫓아 왔다. 그러자 군종신부가 중상을 입은 군의관 Linton J. Buttrey 대위에게 그곳을 빠져나가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Buttrey 대위가 간신히 몸을 움직여 그곳을 빠져 나오자, 뒤이어 들이닥친 적병이 부상병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고 있는 군종신부를 살해하였다. 본부중대의 James W. R. Haskins 상사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 보았으나, 그를 구할 수는 없었다.……』 이런 가운데 이들 철수병력은 밤을 도와 남하하여 유성과 대전에 집결하게 되었는데, 그 이튿날인 17일에 대전에서 집결재편된 병력은 당초 대평리 정면에 투입된 제19연대원 900여명중 434명뿐이었다."
재집결
편집이들 철수병력은 유성과 대전에 집결하게 되었는데, 그 이튿날인 17일에 대전에서 집결재편된 병력은 당초 대평리정면에 투입된 제19연대원 900여명중 434명뿐이었다. 따라서 제19연대는 제2대대의 E중대와 G중대만이 온전하였을 뿐, 이날 하루의 전투에서 제52포병대대와 더불어 큰 손실을 보아, 연대로서의 부대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말았다
결과 및 영향
편집북한군 금강을 도하함에 있어서 정면의 아군을 화력으로써 억류하면서 측방으로 우회하여 후방을 차단하는 수법을 써서 제19, 제34 양연대의 전선을 돌파함으로써 금강 남안에 올라서게 되자, 전차등 중장비가 공주정면으로 도하하는 동안, 그들 제4사단은 16일에 논산을 수중에 넣고 그 일부로써 서안쪽의 강경을 석권하여 후고를 제거한 다음 대전을 목표로 차기 공격을 준비하는 듯 하였으며, 그 제3사단은 대평리부근에서 밤을 세워 유성으로 직충할 태세를 갖추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결국 미군은 금강 방어선을 상실하고, 대전 방어에 치중하게 되면서 대전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각주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