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촉성국민회

(독립촉성국민회에서 넘어옴)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1946년 2월 8일 훗날의 대한민국 지역에서 결성된 우파 계열의 정치 단체이다. 1948년 12월 26일 국민회로 개칭하였다.[2]

대한독립촉성국민회
大韓獨立促成國民會
약칭 독립촉성국민회
(국민회)
상징색 청색
이념 공화주의
반공주의
보수주의
스펙트럼 우파~극우[1]
역사
창당 1946년 2월 8일
통합된 정당 자유당
내부 조직
중앙당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역사

편집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통합 결성한 것이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가장 많은 수의 후보자를 입후보시켜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함으로써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내었다.

제헌 총선에서 정파 연합 성격의 독촉국민회는 정식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지 않았고 후보들이 개인 자격으로 출마했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반탁 운동으로 쌓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후광을 얻기 위해 소속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초 독촉국민회에 참가했던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제헌국회 총선에 불참하였다. 이후 독촉국민회는 제헌국회에서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당시 총재였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후 제헌국회에서 당선된 대부분의 의원이 탈당하게 되고 의원직을 유지한 국민회 소속 의원은 1대국회에서 4명만 남게 된다. 국민회 출신 의원 중 약 21%인 12명은 민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곧이어 12명이 일민구락부로 당적을 옮겼다. 일민구락부는 당초 국민회에서 이적한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으나 그들 중 상당수가 대한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국민회 출신 의원들이 12명만 남게된다. 국민회 의원들이 가장 많이 당적을 옮긴 곳은 대한국민당으로 총 45%인 25명의 의원들이 이동하였다.

역대 정치 계파 구성원 및 관련 사안

편집

주요 선거 결과

편집

대통령 선거

편집
연도 선거 후보자 득표 득표율 결과 당락
1948년 1대 이승만 180표
91.8%
1위  

국회의원 선거

편집
연도 선거 지역구 비례대표 정원
당선 당선비율 당선 득표율 당선 당선비율
1948년 1대 47/200
23.5%
47/200
23.5%
1950년 2대 14/210
6.67%
14/210
6.67%
1954년 3대 3/203
1.48%
3/203
1.48%

지방선거

편집
실시년도 선거 시장 읍장 면장 도의원 시의원 읍의원 면의원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1952년 - 32/306
10.5%
29/378
7.7%
29/1115
2.6%
2437/16051
15.2%
1956년 - 1/30
3.3%
6/544
1.1%
6/437
1.37%
17/416
4.1%
28/990
2.8%
161/16051
1%

같이 보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각주

편집
  1. 길승흠 (1996년 1월 1일). 〈한국정치연구 (Journal of Korean Politics) Vol. 5〉. 《제 1공화국의 정당과 의회정치》.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18~142쪽. 인용: 이어서 이승만 박사는 국민회와 한민당 세력의 지원으로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8월 15일 정부수립을 공포함으로써 제1공화국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제1공화국은 우파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출범하였던 것이다.(p. 121)
  2. “독촉 개칭코 신 국민 운동, 남북 통일에 전력”. 《동아일보》. 1948년 12월 26일. 2019년 5월 2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