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흥습격사건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 또는 동흥사건(東興事件)은 1935년 2월 13일 새벽에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장(師長) 이홍광(李紅光, 1910∼1935)[2][3]이 이끄는 부대가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퇴각한 사건을 말한다.[4][5][6]

동흥 습격 사건
날짜1935년 2월 13일
장소
결과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줌.
교전국
동북인민혁명군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지휘관
이홍광(李紅光)
병력
200여명 경찰 47명
피해 규모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명을 냄.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됨.[1]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함. 친일 주구배 집 한채를 불사름.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한 16호(戶)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음. 일인(日人)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韓人) 10명을 납치함. 무고한 주민 2명 사망, 5명 부상.[1]

사건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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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읍은 약 500여호에 주민 2500 여명이 살던 경찰서와 학교, 우체국 등이 있는 평북 최북단의 국경도시이다.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의 전신) 1군 1사 약 200여명을 이끌고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측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퇴각하였다. 동흥 경찰서는 47명의 경관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홍광 부대의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받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장세윤(張世胤)은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에서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1]

 
동북인민혁명군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침입을 보도한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平北(평북)에 反滿軍侵入(반만군침입) /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射擊(사격) / 警察隊(경찰대)와 交戰(교전), 守備隊出動(수비대출동) / 今曉(금효), 東興地方 大混亂(동흥지방 대혼란)[7]

이홍광은 2월 13일 새벽 1시경 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넜다. 동·서·남 세방면으로 분산된 1사(師)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동흥 시가로 진입했다. 이 때 대원들은 장총과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되었다. 이홍광은 47명의 경찰이 방어하고 있는 경찰서를 향해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부대로 하여금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두 방면의 대원들에게는 미리 지목한 대상에 따라 동흥 제일의 재산가이며 재목상(材木商)인 장영록(張永綠)의 집을 습격케 하고 기타 친일 주구배로 알려진 한인, 일본인 등을 습격케 했다.

약 세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 때 1사(師)는 만주국측의 전신전화 기관은 파괴했지만, 동흥읍에 있는 일제측 전신전화 기관을 파괴하지 못한 까닭에 적의 응원대가 올 것을 우려해서 조기에 철수했던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이홍광 부대는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으며, 친일 주구배 집 한채를 불살라 버렸고,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한 16호(戶)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일인(日人)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韓人) 10명을 납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때 이홍광 부대도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명을 냈고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 교전 와중에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도 있었다. 이홍광 부대의 동흥 습격전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며칠간 대서특필되었고, 중국동북에서 발간되는『대동보(大同報)』 등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일제 당국은 물론 대중에게도 이 전투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8] (호외도 간행함[7]), 조선일보[9], 매일신보[10], 경성일보[11] 및 조선중앙일보[12] 등이 며칠간 연속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당시 이홍광은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13] 이런 소문은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것이라 한다. 이 사건 보다 2년여 후인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하였을 정도로 동흥 사건의 여파가 컸다[14]. 이홍광은 사건 3개월여 후인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15].

동흥 사건은 경찰관 5명이 상주하는 주재소 밖에 없는 국경의 면단위 마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규모도 더 컸고, 2년 먼저 일어났는데도 일반에는 보천보 사건만 알려져 있을 뿐 거의 잊혀져 있다. 심지어는 보천보 사건이 최초의 국내진공 사건이라며 근거없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보천보 사건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이 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한 탓이다. 북한에서는 이홍광이 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선전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보천보 사건을 가릴 우려 때문에 동흥(東興)이란 지명까지 없애버렸다. 당시의 지명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은 오늘날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고읍노동자구(古邑勞動者區)가 되어 있다.[16][17]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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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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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62~363.
  2. 李紅光열사 약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구망일보(救亡日報)』 1937-09-1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 구망일보는 1937년8월 24일 중국 상해에서 창간된 신문임.
  3. 李紅光열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중국 『구국시보(救國時報)』1937년 7월 10일자 기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4.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5.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26) 이홍광과 동흥사건」 중앙일보 1974.06.05 종합 3면
  6. 軍歴史関係事項調査の件報告 朝平憲秘庶第140号/昭和10年度 1939/11/09 일자로 평양헌병대장(平壌憲兵隊長) 祖父江義一이 작성한 보고서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0872700、歴史資料 昭和9~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7. 平北(평북)에 反滿軍侵入(반만군침입)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8.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인민혁명군) 侵入(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1935.02.14 동아일보 석간 2면 (13일 석간)
    死者七名(사자칠명) 負傷者八名(부상자팔명) 拉去者(납거자)는 十一名(십일명) 1935.02.14 동아일보 조간 2면
    喇叭(나팔)불며 越境(월경) 長白縣(장백현)으로 向(향)해 1935.02.14 동아일보 조간 2면
    警察門前(경찰문전)서市街戰(시가전) 機關銃(기관총)으로 頑强抵抗(완강저항) 1935.02.14 동아일보 석간 2면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
    點點(점점)의 血痕(혈흔)따라 討伐隊(토벌대) 越境追擊(월경추격) 人民革命軍事件(인민혁명군사건) 續報(속보) 1935.02.15 동아일보 2면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1935.02.16 동아일보 2면
    五百紅軍(오백홍군) 二隊(이대)로 갈려 東興厚昌(동흥후창) 再襲擊 劃策(재습격 획책) 1935.02.16 동아일보 2면
    紅軍再襲計劃(홍군재습계획)에 軍警聯合(군경연합) 大討伐(대토벌) 1935.02.17 동아일보 2면
    拉去(납거)된 東興住民(동흥주민) 生還者 十名(생환자 십명) 1935.02.19 동아일보 2면
    東興襲擊紅軍(동흥습격홍군) 死者判明十名(사자판명십명) 集結總數(집결총수)는 約六百名(약육백명) 討伐開始(토벌개시)로 退却開始(퇴각개시) 1935.02.20 동아일보 2면
    追擊中(추격중)의 討伐隊(토벌대) 紅軍(홍군)과 三次交戰(삼차교전) 東興事件人質 三名(동흥사건인질 삼명)은 奪還(탈환) 1935.02.27 동아일보 2면
    東興事件人質(동흥사건인질) 一名(일명)은 歸還(귀환) 1935.03.07 동아일보 2면
    수수겨끼의 인민군사령(人民軍司令) 이홍광(李紅光)은 26세(廿六歲) 청년(靑年) ? 1935.07.18 동아일보 2면
    東興被襲時(동흥피습시)의 最後人質脫出(최후인질탈출) 1935.07.22 동아일보 2면
    東興襲擊犯(동흥습격범) 檢事(검사)가 控訴(공소) 1935.10.06 동아일보 2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9. "후창군에 2백 共軍(공군). 민가에 방화 약탈. 동흥에, 기관총도 휴대. 오늘 새벽 4시까지 대접전", 조선일보 1935.02.14 / 석간2 : 2 면
    "동흥 습격한 共軍(공군) 추격. 대부대 토벌군 출동. 대안, 신방자 방면을 거쳐서. 共軍(공군)은 벽지로 도피", 조선일보 1935.02.15 / 석간2 : 2 면
    "동흥 습격 공산군. 6백여명 재결진. 경시치 못할 武備(무비)를 하고는 再擧(재거) 습격을 준비중", 조선일보 1935.02.16 조간 2 면
    "拉去者(납거자) 10명. 동흥읍의 피해 詳報(상보)", 조선일보 1935.02.16 / 석간2 : 2 면
    "동흥 습격한 공산군. 대부대가 越江(월강) 토벌. 수비대와 경관이 합작하여. 만주국군과도 호응", 조선일보 1935.02.18 석간2 2 면
    "拉去者(납거자) 10명 석방. 共軍(공군) 벽지로 퇴각. 동흥을 습격하였던 공산군. 토벌군 대대적 진격", 조선일보 1935.02.19 / 조간 2 면
    "동흥사건 두목 李紅光 부상", 조선일보 1935.02.20 조간 2 면
    "동흥사건 공산군. 근거지를 벽지로 이동. 李紅光의 부하 현재 6백여명. 토벌대는 아직까지 무소득", 조선일보 1935.02.20 / 석간2 2 면
  10. 今曉頭厚昌에 賊禍 東興邑襲來市街戰 放火, 掠奪警官隊應戰擊退 住民側死傷者不少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4 02면 01단
    東興邑襲來賊團은 人民革命軍一派 극히 조직적으로 사면포위 總司令은 李江光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4 05면 02단
    國境警備有史以來 初有의 戰慄할 賊禍 喇叭吹奏하며 對岸에 退却 三千住民罔知所措 / 賊團을 越境追擊하야 徹底的 殲滅企圖 出發後消息姑未着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5 02면 01단
    重輕傷者治療 爲해 醫療班員도 急行 상상 이상으로 피해가 심한 東興襲擊事件續報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5 05면 01단
    輕視치 못할 對岸賊勢 積極的防備에 注力 수효도 만코 활동도 광범위 험준한 산곡을 근거로함이 이은 곤난 長白, 臨江, 寬甸 各縣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7 02면 09단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虎視耽耽의 對岸紅軍 東興襲擊再次企圖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26 02면 01단
    東興襲擊한 賊徒는 食糧 처 窮莫甚 무송현 대성창 방면으로 도주 茂山署員이 嚴戒中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27 05면 05단
    東興襲擊賊은 精銳한 分子 질서가 정연하야 실력 상당 平北 警務課長歸來談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3-03 02면 01단
  11. 約二百名の匪賊團平北東興を襲擊す/ 直ちに警官隊奮戰し遂に擊退被害相當に上る見込み 경성일보 1935년 2월 14일
  12. 동흥시 습격부대는 인민혁명군으로 판명, 70여 경관대 목하 맹추격, 총사령은 이강광 조선중앙일보 1935년 2월 14일
    즉사 중경상 납거 등, 피해자 23명, 사자 8, 중경상 5, 납거 10명, 동흥 습격사건 後報/ 주민측 피해/ 공산군을 계속 추적 중 조선중앙일보 1935-02-16 석간 2면
  13.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Archived 2017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동흥사건 餘聞(여문). 共軍(공군) 두목 李紅光은 18세 남장 미인. 조선 소녀로 부하가 6백여명. 습격 당시도 진두에서 직접 지휘" 조선일보 1935.02.23 / 석간2 : 2 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14. 함남국경(咸南國境)에 제2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 Archived 2018년 1월 24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6월 6일 02면 01단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동아일보 1937-06-08 조간 2면 3단
    東興事件同樣に殘虐ならん /思ひ出の一 昨年の襲擊 경성일보 1937년 6월 6일
  15.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65~366.
  16. 김형직군(金亨稷郡) 고읍노동자구(古邑勞動者區) : 북한지역정보넷
  17.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흥면 고읍동이 동흥읍이다.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 북한지역정보넷
    양강도 김형직군 옛이름 동흥면 조선향토대백과 행정구역정보관 : 양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