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양
등양(鄧颺, ? ~ 249년)은 중국 조위의 관료로, 자는 현무(玄茂)이며 형주 남양군 완현(宛縣) 사람이다.[1] 후한의 개국공신 등우의 후손으로, 조상의 일파로 고평릉의 변 후 숙청당했다.
사적
편집젊어서 서울에서 명성을 얻고, 명제 조예 치세에 중서랑으로 처음 임용되었다. 면직되었다 다시 중서랑이 되었는데, 하안 · 이승 · 필궤 등과 함께 부화한 무리로 알려졌고 부화 사건을 일으켜 쫓겨났다. 명제는 부화한 무리를 싫어했으므로, 명제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임용되지 못했다.[2][3]
명제가 죽고 조상이 대장군이 되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애제 조방을 보정하면서 다시 임용되어 조상의 심복이 되었다. 정시 초에 영천태수를 지내고 대장군장사로 옮겼다가 또 시중상서로 옮겼다. 등양 등은 조상의 위명을 높이기 위해 촉한을 칠 것을 권했고, 조상은 이에 따라 6 ~ 7만의 군대를 일으켜 촉한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진격할 수 없자 퇴각을 주장하는 조상의 참군 양위와 말싸움을 했고, 조상은 어쩔 수 없이 돌아왔으나 퇴로가 끊겨 참패했다(흥세 전투).[2][4]
하안 등은 조상에게 명제에게서 같이 고명을 받아 황제를 보정하는 사마의를 따돌리고 홀로 권세를 독점하도록 부추겼고, 이에 조상은 사마의가 전면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면서 등양을 하안 · 정밀과 함께 상서로 삼았다.[2] 등양이 내직에 있을 시절, 장애(臧艾)를 현직(顯職)에 임명하니 장애는 부친의 첩을 등양에게 주었다. 등양이 뇌물을 좋아하여 관리 임용을 굽히는 것이 매번 이런 식이라, 당시 하안이 관리 임용을 맡았으나 인재를 얻을 수 없었다.[3]
정시 10년(249년) 정월,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실권하고 사마의가 득세하면서, 조상의 일당으로서 잡혀 3족이 모두 주살되었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