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원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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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시대
편집공화정(共和政) 시대에, 원로원은 일단은 집정관의 자문 기관이었지만, 명망가나 현직 및 전직 요직자 대부분을 의원으로 불렀고, 명망가들은 다수의 크리엔테스를 소유함으로써 입법 기관인 시민집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실체는 로마의 외교 ・ 재정 등의 결정권을 장악한 실질적인 통치 기구였다. 로마를 가리키는 단어로 꼽히는 SPQR란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어로 알려져 있다.
원로원 의원은 과거 회계 검사관을 지냈던 인물을 대상으로 재무관의 검토를 거쳐 결정되었다. 예외로 평민이라도 호민관을 맡은 경력이 있다면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새로 원로원 의원이 되면 과거 의원을 배출한 가계 출신이라는 점은 유리하게 작용했다(때문에 원로원 의원을 몇 명이나 배출한 가계는 차츰 노비레스라 불리는 특권 계급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다만 노비레스가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노비레스라고 해서 자동으로 의원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세습으로 그 신분이 상속되지도 않았다.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였던 노비레스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체현자라는 측면이 많았다. 싸움터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전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대 이전부터 각 의원들의 수명 자체가 짧았을 뿐 아니라 노쇠해졌을 때는 스스로 물러나는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의 신분 자체는 종신이었지만 신진대사만큼은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에서 요직을 목표로 하는 자라면 성인(17세)부터 약 10년에 걸치는 로마군 복무 경험이 필수적이었고 원로원 의원이 된 자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뒤집어 말하면 로마의 원로원은 군사 및 국정에 관한 경험과 식견을 갖춘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신제이므로 한 번 의원이 되기만 하면 그 신분을 잃을 염려도 없다. 덕분에 각 의원에게는 장기적인 시점에서 로마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는 임무가 요구되었다(반면 관직은 거의 모두 선거로 선출되었다).
민주 공화국 사회의 로마에서는 집정관의 선출이나 법률 제정 같은 중요한 사항이 시민집회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원로원은 단순한 자문 기관일 뿐 권력은 갖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로원이 그들의 권위에 의한 정치를 주도하여 실질적으로 로마는 귀족 공화제이자 과두제 국가였다고 간주된다.
내란의 1세기
편집원로원 주도의 정치체제는 로마가 단순히 도시국가(都市国家), 내지는 도시국가 연합의 수장이라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그 기능이 원활히 유지되었다. 그 무렵의 원로원 의원, 즉 로마의 귀족은, 귀족이라고는 해도 단순히 그 지역의 유지(내지는 보호자) 정도에 불과했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른 의무를 다할 것이 요구되는 존재였다. 포에니 전쟁에서 그 기능은 충분히 발휘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지중해(地中海) 전역을 세력권으로 하는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라티푼디움(대농장)의 보급에 따른 빈부 격차가 늘어나고, 원로원 의원 즉 로마 귀족들은 차츰 특권에 안주하며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존재로 변해갔다. 의원의 질은 떨어지고 체제도 경직되어 갔다. 특히 속주의 총독(코메스)이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축재하는 행위는 공화정 전체를 통틀어 문제 요소로 작용했다. 다만 로마의 많은 귀족들은 파토르누스로서 대세인 크리엔테스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다. 과거 로마가 도시국가였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로마 귀족 즉 파토르누스의 보호를 받는 크리엔테스였던 것이 로마라는 국가가 비대해지면서 극히 일부 집안만의 보호자로 전락해버렸고, 그 결과 로마 귀족이 사리사욕을 우선시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가 가진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개혁하고자 했지만 호민관으로서 그들의 입장은 너무도 약했기에(호민관에게는 무력이 없었고 게다가 원로원 체제 바깥에 있었다)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원로원파(벌족파)와 민중파의 싸움이라는 한 세기에 걸친 내란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를 바탕으로 무력을 갖는 독재관의 입장에서 개혁에 임한 것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술라는 원로원 체제를 고쳐서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자문 기관이었던 원로원에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그 존속을 도모했다. 나아가 정원을 지금까지의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 기사 계급 등 신흥 유력자를 새로 원로원에 넣었지만 정원이 늘면서 의론이 구구한 나머지 제대로 된 결론이 안 나온다는 폐해도 악화됐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원로원 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로마 제정으로 귀결되었다.
제정 시대
편집공화정 시대 실질적인 지배기관으로 부상했던 원로원은 제정 시대에는 점차 황제의 통치에 편입되었고 그 지위도 저하되었으며, 로마 군단에 복무해야 하는 의무도 느슨해져 갔다. 그래도 5현제(賢帝) 시대라 불리는 시대까지는 「원수(元首)」인 황제의 정통성, 후계자 승인(호민관으로서의 직권 수여) 등의 기관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황제의 칙령을 항구적인 법령으로 법제화하기 위해서는 원로원의 의결이 필요했다. 군단에 복무하여 출세한 자의 정무 관여도 황제가 원로원에 천거하고 원로원이 그에 승인하여 의석을 얻는 형식이었다. 트라야누스 등의 현제들은 이러한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는 가운데 제국을 통치했다. 또한 제국의 속주 총독도 절반은 원로원에 임명권이 있었다. 원로원이 총독을 임명하는 속주는 황제가 총독을 임명하는 속주보다 통치하기도 쉽고 경제력도 있는 지역이었으며, 원로원은 이른바 '실리'를 잡고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된 군인 황제 시대에서 제국 각지의 군단이 마음대로 황제를 옹립하는 상황 속에, 제위를 승인하는 기관으로서의 지위도 실추되어 로마 시 의회 정도의 역할 밖에는 다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가리에누스 황제의 시대에 원로원을 군무에서 축출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군무와 정무 모두에 균형이 잡힌 인재를 배출할 수단마저 끊어졌다.
다만 황제가 로마 시를 떠나면서 이탈리아 본토와 북아프리카에서 원로원의 영향력은 오히려 커졌다. 또한 일리리아 출신으로 가문이 분명하지 않았던 군인 출신 황제들은 원로원에서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았고 원로원에 관한 문제에서는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원로원 의원과 원로원으로부터의 사절단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쉬워졌다고 여겨진다. 원로원이 군무에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정치적인 입장만큼은 종래와는 달리 향상하여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나 타키투스, 프로부스 황제가 원로원에 보인 경의는 이러한 역사적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황제의 지위가 단순한 군사 사령관으로 떨어지고 정치는 다시 원로원이 주도하는 체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인 황제 시대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시 전제군주제(도미나 토우스)로 이행하면서 다시 황제의 지위와 권위는 향상되었고 원로원의 지위도 저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속주를 다시 분할하여 속주 총독의 권력을 줄이고 견고한 관료지배체제를 확립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절반의 총독 임명권이나마 가지고 있었던 원로원의 권력을 절감시켰다.
자신도 다른 군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일리리아 속주 출신이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로원 의원의 재등용을 추진했다. 막센티우스를 쳐부수고 이탈리아 본토의 지배자가 된 312년부터 326년까지 원로원 의원은 당초의 6백 명에서 2천 명까지 늘어났는데, 원로원 의원으로 편입된 것은 주로 기사 신분의 고관과 도시 참사회(参事会) 회원층이었다. 또한 이 원로원 확충 과정에서 기사 신분은 그 고유의 관직과 칭호를 잃고 신분으로서의 특징도 잃어갔다.
로마 원로원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고,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나 그를 다시 멸한 동고트 왕국조차 이들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원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라고 하면 단순히 서로마 황제가 그 지위를 잃었을 뿐 원로원과 로마 시민, 즉 SPQR이 존재하는 한 로마는 건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재통일 사업은 오히려 로마를 폐허로 만들었고, 6세기 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지금 원로원은 어디에 있는가, 시민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고 탄식하기에 이르렀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랑고바르드족이 침입한 7세기경에 이르러, 원로원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편집330년의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로마의 새로운 수도(노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의 개창에 수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원로원이 설치되었다. 로마에서처럼 주로 도시 참사회의 회원들이 원로원 의원으로서 처음부터 황제의 자문 기관으로 설치되었으며, 지지 기반이 필요했던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동부를 원활하게 통치하고자 전통적 세력이었던 도시 참사회 회원층의 지지를 끌어들여 혜택을 줄 곳이 필요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동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황제의 부재시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한 경우 후계 황제를 지명하는 역할을 했다. "황제는 원로원과 군대와 시민의 추대에 따라 비로소 제위의 정당성을 가진다"는 불문율은 앞서의 로마 원로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7세기 후반 이후에는 일정 이상의 작위를 가진 고급 관료에서 원로원 의원이 선출되게 되었고, 원로원 의원 신분을 세습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 역할도 단지 의식적인 것만 남은 채,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형태로나마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원로원이라는 기관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