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신(柳淸臣: 미상 ~ 1329년 7월 21일(음력 6월 24일)[1])은 고려의 외교가·통역관·무신이다. 본관은 고흥, 시호(諡號)는 영밀(英密)이다. 공민왕 때 시중을 지낸 류탁(柳濯: 1311년~1371년 8월 28일(음력 7월 18일)[2])의 할아버지다.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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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름은 류비(柳庇)다. 국가 제도상 부곡 사람은 비록 공적이 있어도 5품 이상 승진할 수 없었는데, 류청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3] 몽골어를 배워 여러 차례 사신을 따라 원나라에서 응대를 잘했으며 이후 계속되는 활약으로 충렬왕의 신임을 받아 낭장(정6품)에 임명되었고, 이후 승진을 거듭해 여러 요직을 거쳐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왕의 특명으로 고향인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올려주었다.[4]

'간신' 평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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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편찬자들은 그를 '간신'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현대 연구자들은 관련 기록을 분석하면서 이런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5] 이범직은 〈열전〉의 기록이 그가 〈간신전〉에 들어간 사실을 입증하려는 느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6]

전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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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권125, 〈열전〉38, 류청신

비슷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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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점이 있는 데도(또는 비난받았는 데도) 시호를 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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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린(趙之遴): 본관은 배천, 시호는 공화(恭華).[7]
  • 김존중(金存中): 본관은 용궁, 시호는 경숙(敬肅).[8]
  • 오잠(吳潛): 본관은 동복, 시호는 문제(文齊).[9]
  • 권한공(權漢功): 본관은 안동, 시호는 문탄(文坦).[10]
  • 정오(鄭䫨): 본관은 청주, 시호는 문극(文克).[11]

통역관으로 활동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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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인규(趙仁規): 본관은 평양, 최종 관직은 평양군(平壤君).[12]
  • 정자전(鄭子琠): 본관은 압해, 최종 관직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13]

관련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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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남복, 〈柳淸臣과 그 史料에 對하여; 高麗史 世家 記事와 그 列傳의 一檢討〉, 《역사와 경계(구 부산사학)》 9, 부산경남사학회, 1985년
  • 이범직, 〈원 간섭기 立省論과 柳淸臣〉, 《역사교육》 81, 역사교육연구회, 2002년
  • 박종기, 〈유청신: 신분 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탄 역관〉, 《고려 열전》, 휴머니스트, 2019년, 104~17면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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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사》 권35, 〈세가〉35, 충숙왕 16년(1329년) 6월 24일(경술)
  2. 권근, 《양촌집》 권39, 故高麗國門下侍中柳公神道碑銘
  3.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幼開悟, 有膽氣)는 《고려사》의 류청신 열전(《고려사》 권125, 〈열전〉38, 유청신)의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은 뒤에 나오는 "(유청신은)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은 없었으나, 임기응변에 능해 권세를 믿고 국권을 휘둘러 나라에 해를 끼쳤다."(不學無知, 有機變, 恃勢弄權, 爲國害)라는 문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즉 모순이다.
  4. 《고려사》 권125, 〈열전〉38, 유청신; 《고려사》 권57, 〈지리지〉2, 전라도 보성군
  5. 이남복, 〈柳淸臣과 그 史料에 對하여; 高麗史 世家 記事와 그 列傳의 一檢討〉, 《역사와 경계(구 부산사학)》 9, 부산경남사학회, 1985년; 이범직, 〈원 간섭기 立省論과 柳淸臣〉, 《역사교육》 81, 역사교육연구회, 2002년
  6. 이범직, 앞의 글, 130면.
  7. 《고려사》 권94, 〈열전〉7, 조지린
  8. 《고려사》 권123, 〈열전〉 36, [폐행], 김존중 및 〈김존중 묘지명〉
  9. 《고려사》 권125, 〈열전〉38, 오잠
  10. 《고려사》 권125, 〈열전〉38, 권한공
  11. 《고려사》 권106, 〈열전〉19, 정해 부 정오
  12. 《고려사》 권105, 〈열전〉18, 조인규
  13. 《고려사》 권123, 〈열전〉36, [폐행], 강윤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