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리비아국(아랍어: دولة ليبيا 다울라트 리비야[*], 영어: State of Libya)[5][6][7][8][9], 약칭 리비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트리폴리(아랍어: طرابلس, 타라불루스)이며,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북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알제리, 동남쪽으로는 수단, 남쪽으로는 차드, 남서쪽으로는 니제르, 북동쪽으로는 튀니지와 접경한다. 면적은 약 1,759,541 제곱킬로미터로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인 것과 동시에 세계에서는 16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이다.[10]
리비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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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아랍어: حرية عدالة ديمقراطية | ||
표어 설명 | 자유, 민주주의 | ||
국가 |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 ||
수도 | 트리폴리 북위 32° 54′ 08″ 동경 13° 11′ 09″ / 북위 32.902222° 동경 13.185833° | ||
리비아(리비아) | |||
정치 | |||
정치체제 | 단일국가 임시정부 | ||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군최고사령관 | 모하메드 알멘피 칼리파 하프타르 | ||
역사 | |||
•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 1934년 12월 1일 | ||
• 영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 1951년 12월 24일 | ||
• 현행 정부 수립 | 2012년 8월 8일[1] | ||
지리 | |||
면적 | 1,759,541 km2 (16 위) | ||
내수면 비율 | 거의 없음 | ||
시간대 | EET (UTC+2) | ||
DST | EEST (UTC+2) | ||
인문 | |||
공용어 | 아랍어 | ||
인구 | |||
2021년 어림 | 6,959,000명 | ||
2006년 조사 | 5,670,688명 (108위) | ||
인구 밀도 | 3.74명/km2 (218위) | ||
경제 | |||
GDP(PPP) | 2024년 어림값 | ||
• 전체 | $1833.9억[2] (79위) | ||
• 일인당 | $26,928[2] (68위) | ||
GDP(명목) | 2024년 어림값 | ||
• 전체 | $482.2억[2] (93위) | ||
• 일인당 | $6,987[2] (93위) | ||
HDI | 0.746[3] (92위, 2022년 조사) | ||
통화 | 디나르 (LBD) | ||
종교 | |||
국교 | 이슬람교 | ||
종교 | 이슬람교 96.6% 기독교 2.7% 기타 0.4%[4] | ||
기타 | |||
ISO 3166-1 | 434, LY, LBY | ||
도메인 | .ly | ||
국제 전화 | +218 |
2014년 선거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인하여 투브루크로 피난한 정부와 트리폴리에 남아있는 정부가 서로 대립 중에 있다. 2015년 12월 이후 통합 서명에 합의했으나 아직까지 완전한 통합이 되지 않았다.
역사
편집고대
편집원래의 리비아에는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에 카르타고, 그 이후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7세기,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아랍 세력이 서진(西進), 북아프리카에 침입해 옴에 따라 리비아는 아랍화했다.
중세 및 근대
편집15세기부터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리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가,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伊土戰爭)으로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차지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리비아의 식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1938년이 되면 9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이주자들이 리비아에 들어와, 타라불루스와 벵가지 주변에서 농장을 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격전지가 되었으며, 결국 추축국 세력이 패배하여 리비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리비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12년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가 합쳐져 리비아가 되었지만,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고 1951년 국제연합(UN)에 의해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이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하였다.[11]
1951년 12월 24일에 리비아 연합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국왕 이드리스 1세 영도 하의 리비아에서는 1959년에 석유가 발견되었고, 1963년에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0개 주(州)로 분할하였다.
카다피 집권 이후의 리비아
편집1969년 9월 1일, 이드리스 1세 국왕의 외유 도중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위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화 정책을 추진, 1972년에 이집트,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 공화국 연방을 세웠지만, 1977년 이집트의 친 이스라엘 정책에 반발하여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카다피는 리비아를 그 자신의 독특한 이슬람 사회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으며, 그의 사상은 녹색서(The Green Book)에 잘 나타나 있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서방권을 상대로 로커비 사건 등 수차례의 테러를 감행했다. 그 결과 1986년에는 미국의 공습을 받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도 핵무기 개발과 인권 탄압 등으로 인해 리비아에 대한 서방 국가의 제재가 가해졌다. 리비아에 대한 서방 국가의 제재는 가다피가 서방에 대한 개방을 선언한 2003년까지 계속되었다.
리비아 내전
편집2011년 2월부터 동부의 주요 도시인 벵가지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친 카다피 세력과 반 카다피 세력 사이의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라는 정부 기구를 출범시켰으며, 나토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군도 카다피 정권에 대한 공습에 참여하였다.
8월 초순경까지는 수도 트리폴리가 있는 서부를 거점으로 하는 카다피 정권과 동부의 벵가지를 거점으로 하는 시민군측의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가 대립 할거라는 양상이었지만, 2011년 8월 21일 시민군은 성공적으로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하였다. 카다피 정권은 시르테, 사브하, 바니 왈리드로 퇴각한 상태였고,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최종 은신처인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다피의 42년 장기집권이 마무리 되고, 리비아 과도정부는 10월 23일, 해방을 공식 선포하였다.
카다피 이후에 리비아는 총선이 치러졌고, 총선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했다.[12] 그리고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정당이 승리했다.[13] 43년만에 리비아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제헌 의회 의장에 메가리프가 선출되었다.[14][15] 다른 중동 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리비아에서도 2012년에 미국에서 제작된 반이슬람 동영상인 이노센스 오브 무슬림에 대한 항의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벵가지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 미국 영사가 사망한 벵가지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미국 영사관을 공격한 1명이 체포되었다.[16] 리비아의 새 총리도 영사관 공격은 비겁한 범죄라고 밝혔다.[17] 결국 2012년 10월 7일에 리비아 의회는 새로운 총리를 해임했다.[18]
2014년 내전
편집리비아는 2014년 6월에 새 의회를 선출했다. 2014년 리비아 하원 선거 과정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패배하자 이슬람주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새 의회의 정부를 투브루크로 피난가게 만들었다. 이슬람주의 계통의 민병대가 새 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기존 총국민회의 의회 의원들을 바탕으로 의회를 구성하면서 서로 합법 정부를 자처하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트리폴리를 이슬람주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트리폴리에 소재한 리비아 대법원은 2014년 11월 6일자로 6월 총선이 무효라고 선고했다.[19] 대부분의 국제사회는 투브루크로 피난간 새 정부를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보고 있다.[20] 이 가운데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집단인 이슬람 국가(IS)가 리비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현재 유엔의 중재로 단일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행 여부는 불확실하다.
내전으로 인해 리비아를 떠나 유럽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작은 배에 수백명이 올라타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침몰해 탑승자가 수장당하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배 안에서 난민들간의 종교, 지역 갈등으로 살해와 폭행, 감금도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21]
지리
편집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수단, 차드, 니제르와 국경을 접한다. 리비아의 전체 면적은 1,759,540km2로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나라이다. 리비아는 인도네시아보다 조금 작으며 어림 잡아 미국 알래스카주와 같은 크기이다. 북쪽으로 지중해와 마주하며 남서쪽으로는 니제르, 서쪽으로는 튀니지, 알제리와 접한다.
리비아는 지중해에 인접한 아프리카 국가중 해안선이 가장 길다.(전체 해안선 길이만 1,770 km에 이른다.) 사막의 열풍이 불어서 피해가 나기도 하는데 리비아에서는 이를 기블리(gibli)라고 부른다. 기블리는 봄과 가을에 하루~4일에 걸쳐 가끔 불어오는데, 이는 사하라 사막 일대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아시스도 전역에 흩어져 있으며 가장 중요한 식수 공급처이다.
사막
편집리비아 사막은 북아프리카에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영국군(British Army)과 이탈리아 왕국 육군, 나치독일군의 격전지였다.
기후
편집대부분의 지역은 사막과 흡사한 기후가 나타나며 아주 건조하다. 하지만 바다에 면한 북쪽 지방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누릴 수 있다.
자연
편집지중해에 면한 북아프리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다. 트리폴리 부근에서 연간 300mm 정도의 비가 올 뿐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불모의 산지나 대지가 나타난다. 겨울철에는 강우가 있어 스텝성 기후가 나타나고 남쪽의 쿠후라함몰지와 리비아 사막에는 우량이 극히 적어 주민은 오아시스에 거주한다.
행정 구역
편집수도는 트리폴리(아랍어로는 타라불루스)이다. 다음은 2007년에 새로 바뀐 리비아의 주(州)이다.
행정 구역 이름 | 아랍어 표기 | 라틴 문자 표기 | 인구(2006년 기준)[22] | 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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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트난주 | البطنان | Al Butnan | 159,536 | 1 |
데르나주 | درنة | Darnah | 163,351 | 2 |
자발알아크다르주 | الجبل الاخضر | Al Jabal al Akhdar | 203,156 | 3 |
마르지주 | المرج | Al Marj | 185,848 | 4 |
벵가지 | بنغازي | Benghazi | 670,797 | 5 |
알와하트주 | الواحات | Al Wahat | 177,047 | 6 |
쿠프라주 | الكفرة | Al Kufrah | 50,104 | 7 |
시르테주 | سرت | Surt | 141,378 | 8 |
미스라타주 | مصراتة | Misratah | 550,938 | 9 |
무르쿠브주 | المرقب | Al Murgub | 432,202 | 10 |
타라불루스주 | طرابلس | Tarabulus | 1,065,405 | 11 |
지파라주 | الجفارة | Al Jfara | 453,198 | 12 |
자위야주 | الزاوية | Az Zawiyah | 290,993 | 13 |
누카트알함스주 | النقاط الخمس | An Nuqat al Khams | 287,662 | 14 |
자발알가르비주 | الجبل الغربي | Al Jabal al Gharbi | 304,159 | 15 |
날루트주 | نالوت | Nalut | 93,224 | 16 |
주프라주 | الجفرة | Al Jufrah | 52,342 | 17 |
와디알샤티주 | وادي الشاطئ | Wadi Al Shatii | 78,532 | 18 |
세바주 | سبها | Sabha | 134,162 | 19 |
와디알하야주 | وادي الحياة | Wadi Al Hayaa | 76,858 | 20 |
가트주 | غات | Ghat | 23,518 | 21 |
무르주크주 | مرزق | Murzuq | 78,621 | 22 |
정치
편집카다피 정권
편집리비아는 1951년,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통치하는 리비아 왕국으로 독립하였으나, 1969년 9월 카다피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 아랍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7년에 카다피는 국호를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로 바꾸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인민주권확립선언을 채택하여 인민직접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총인민위원회를 창설했다. 의회인 총인민회의는 1천 명 내외의 지방인민회의 대표들로 구성되고, 전인민회의총서기국은 혁명지휘위원회를 대신한 것으로 전인민위원회와 함께 1년에 2차례 개최되는 전인민회의에서 선출된다. 1979년에 카다피는 전인민회의 서기장직을 사임하였으나, 9월 혁명의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국가원수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2011년에 민주화 운동이 벵가지에서 일어났다가 카다피 정권의 정부군이 벵가지에 공격을 감행하여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시민군이 생겨나 리비아 도시를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시민군이 그후로부터 나토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민군이 해방시키는 도시 수가 늘어남에 따라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수립되어서 카다피 정권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여 트리폴리까지 공격을 하여 트리폴리를 해방시키고 녹색기가 서서히 내려지고, 리비아 왕국 국기였던것이 다시 올려졌다. 키다피 정권과 친카다피 정부군이 장악을 하고 있는 시르테, 사브하, 바니왈리드으로 축소됨에 따라 시민군과 북대서양 조약기구군의 총공세가 이어졌고, 결국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시르테에서 시민들에 의해 피살당했다.
인구와 주민
편집아랍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남부에 소수의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다. 리비아는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아랍어가 사용된다. 이탈리아인은 카다피가 집권하기 시작한 1969년 이후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했다. 아랍인, 베르베르인 뿐만 아니라 흑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도 소수 거주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외국어로는 주로 영어가 쓰이나,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은 까닭으로 이탈리아어도 사용된다. 주민의 80%가 농경, 목축, 유목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나 석유가 채굴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도시로 유출하는 경향이 생겨 도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문해율은 84.2%이다.
종교
편집이슬람
편집이슬람교가 국교이며, 리비아의 무슬림은 전체 종교인의 97%를 차지한다. 이 나라는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리비아의 과거 국기-자마히리야 시절의 녹색 오직 한 색으로 이루어진 국기 역시 이슬람교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에서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겠다라고 밝혔다.
기독교
편집기독교 교회의 대부분은 오리엔탈 정교회인 콥트교회(Coptic Orthodox)이며, 6만 명이 콥트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신앙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은 4만 명이며, 두 명의 주교가 지도한다. 소수의 성공회 교회가 있으며, 이집트 교구에 속해 있다.
유대교
편집리비아 유대인 공동체는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경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황제의 예루살렘 신전 파괴 이후 유다 왕국을 떠나 마그레브 지역으로 건너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리비아 일대는 카르타고의 영역이었는데, 카르타고에 유대인이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간의 언어적 동질성에 따른 것이다. 제르바의 유대인 공동체와 더불어, 10만 명의 유대인이 이집트로 강제 이송되었다가 이후 이집트 서쪽 지역에서 키레나이카로, 이후에는 마그레브로 옮겨 갔다. 당시까지 이집트의 변방이었던 키레나이카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왕조의 영향력에 속해 있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핍박으로 유대인들이 키레나이카에 거주하게 되었다.
군대
편집경제
편집이 나라는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2023년 세계은행 통계에 의하면 리비아의 1인당 GDP는 7,329 달러이다.
산업
편집1959년에 유전이 발견된 이래 세계유수의 석유산출국이 되어 경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농경지가 지중해안의 협소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에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나, 현재에는 세계 제4위의 산유국으로 부국이 되었다. 석유무기화를 제창하여 생산제한·금수·가격인하 등 제반문제에 선봉을 서고 있다. 리비아는 본래 농업국으로 밀·보리·감자·대추야자 등 식량작물과 올리브·감귤류 등이 재배되고, 양·염소·낙타 등이 사육되어 피혁·양털 등을 수출하나 그 양은 극히 적고 식량의 85%를 수입한다.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는 석유수출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공업화를 비롯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데 있다. 주요수입품목은 기계류·자동차·금속제품·전기기기 등이다.
대외 관계
편집리비아의 외교 정책은 1951년 12월 24일 국가 수립을 선언한 이래 많은 변동과 변화가 있었다. 왕국으로서, 리비아는 매우 친서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다만, 리비아는 1953년에 가입한 아랍 연맹의 회원국으로서 보수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나라로 여겨진다. 리비아 정부는 영국 및 미국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양국은 리비아에 군사기지를 설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리비아는 또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와도 친밀한 유대관계를 구축하였고 1955년 소련과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다피 정권 수립 후에는 석유생산시설의 국유화, 대(對) 서방 도전행위 등으로 미국, 영국 등의 서방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다가, 1986년 이후부터 서방으로부터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당하였다. 그러나 개방이 시작된 2003년 이후부터는 서방과의 관계도 차츰 회복되었다. 한편 1986년~1987년 사이, 리비아는 "토요타 전쟁"이라고 불리는 차드와의 전쟁을 치렀다. Aouzou strip이라 불리는 영토를 사이에 둔 전쟁이었는데, 압도적인 무기체계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카다피는 2003년 12월 핵무기 의혹시설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모두 자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기구의 사찰을 요구했다. 미국은 카다피의 아랍식 사회주의체제를 인정하고 경제봉쇄를 해제하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삭제했다. 미국은 2006년 5월 15일 미-리비아 공식수교를 발표하면서 카다피의 "역사적 결단"을 높이 평가하였다.[23]
대한관계
편집리비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78년 영사관계, 1980년에 대사관계로 수교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앞선 1974년에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리비아와 의료협정, 문화협정, 경제기술협정을 맺었으며 현재 리비아 사막을 개발하고 있다.
2010년, 리비아에서 선교하던 한국인 선교사가 체포된 일이 있었다.[24] 또한, 대한민국의 리비아 첩보 활동으로 관계가 냉각되고 있다.[25] 그래서 리비아에 있는 대한민국의 건설업체의 지위도 흔들리고 있었다.[26].[27][28]
2011년 8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과도위원회(NTC)를 리비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2014년 7월 30일, 외교부는 리비아의 치안 악화 등을 이유로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였다.[29]
2018년 7월 리비아에서 무장단체 및 괴한들에게 납치된 외국인 중 한국인도 납치당했다.
건설 사업
편집리비아의 대수로 공사가 1984년에 착공하여 지금도 건설하고 있다.
문화
편집리비아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이다. 이는 리비아의 사회주의에도 영향을 주어,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이념을 형성하였다. 현재 리비아는 술을 팔지 않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요리
편집기본적으로 아랍식 요리이나,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파스타류도 많이 소비되고 있다.
교통
편집철도와 도로가 해안지역에서만 정비되어 있어, 사막 오지로의 교통은 곤란하다. 벵가지와 트리폴리에 국제공항이 있어 카이로, 로마, 튀니스 등지와 연결된다.[30]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43년만에… 리비아, 평화적 권력교체
- ↑ 가 나 다 라 “IMF DataMapper, 2024 Edition. (Libya)”. 국제 통화 기금.
- ↑ “Human Development Report 2023/24” (PDF) (영어). 유엔 개발 계획. 2024년 3월 13일. 2024년 3월 13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3월 13일에 확인함.
- ↑ 2022
- ↑ “Member States”. 《United Nations》. 2021년 2월 13일에 확인함.
On 22 December 2017, the Permanent Mission of Libya to the United Nations formally notified the United Nations that the government is changing the official name of Libya to ‘State of Libya.’
- ↑ “Publications Office – Interinstitutional style guide – Annex A5 – List of countries, territories and currencies”. Europa (web portal). 2013년 8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4월 1일에 확인함.
- ↑ “The World Factbook”. 《Cia.gov》. 2016년 4월 1일에 확인함.
- ↑ “LY – Libya – ISO”. 《iso.org》. 2018년 6월 9일에 확인함.
- ↑ “The World Factbook –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gov》. 2018년 6월 9일에 확인함.
- ↑ “Demographic Yearbook (3) Pop., Rate of Pop. Increase, Surface Area & Density” (PDF). United Nations Statistics Division. 2012년 11월 1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2월 5일에 확인함.
- ↑ 양원민 (2023년 8월 17일). “리비아 수도서 군벌 세력 간 무력 충돌...최소 55명 사망 [글로벌이야기]”. 《시선뉴스》.
- ↑ 리비아 총선거 예상 깨고 자유주의파 승리
- ↑ 리비아 의회 선거, `자유주의' 정당 승리(종합)
- ↑ 43년만에… 리비아, 평화적 권력교체
- ↑ 리비아 제헌의회 의장에 메가리프 선출
- ↑ 리비아 "美 영사관 피습 용의자 체포"
- ↑ 리비아 새 총리 “영사관 공격은 비겁한 범죄”
- ↑ 리비아 의회, 한달도 안된 총리 해임
- ↑ [리비아 대법원, 6월 총선 위헌 판결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7233267]
- ↑ ["이슬람 성전 합류 위해 리비아 입국 외국인 5천 명 넘어" http://www.ytn.co.kr/_ln/0104_201503051727039524]
- ↑ 리비아 침몰 선박 생존자 적었던 이유… 300명 지하실에 갇혀있었다 재경일보 2015년 4월 19일 보도내용
- ↑ Libyan General Information Authority Archived 2011년 2월 24일 - 웨이백 머신, 2009년 7월 22일 발표
- ↑ 주섭일 (2007).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 두리미디어. 269쪽. ISBN 978-89-7715-166-6.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2006년 5월 15일 미-리비아 공식수교를 발표하면서 카다피의 ‘역사적 결단’을 높이 평가하고 이란과 북한에 대해 리비아와 같이 핵무기 프로그램 등 대량살상무기의 자진 폐기를 촉구했다. 카다피는 2003년 12월 핵무기 의혹시설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모두 자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기구의 사찰을 요구했다. 미국은 카다피의 아랍식 사회주의체제를 인정하고 경제봉쇄를 해제하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삭제했다.
- ↑ 노효동 기자 (2010년 7월 25일). “"리비아, 한국인 선교사 영사접근 불허"(종합)”. 연합뉴스. 2011년 5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7월 26일에 확인함.
- ↑ 김주명 기자 (2010년 7월 27일). “형님까지 나섰지만 소용없었다…한-리비아 관계 '위기'”. 노컷뉴스. 2010년 8월 2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이은정 기자 (2010년 7월 27일). “한-리비아 외교급랭..건설업계 불똥 '우려'”. 아시아경제. 2010년 8월 3일에 확인함.
- ↑ 카다피 “한국, 아무것도 없이 기적 일궈 … 리비아 모델”
- ↑ 이상득 " 한-리비아 관계, 원만하게 마무리"
- ↑ 리비아, 여권사용제한국 지정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리비아의 교통·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