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카 왕국
마요르카 왕국(카탈루냐어: Regne de Mallorca, IPA: [ˈreŋnə ðə məˈʎɔɾkə]; 스페인어: Reino de Mallorca; 라틴어: Regnum Maioricae; 프랑스어: Royaume de Majorque)은 특정 지중해섬을 포함하는 스페인 동부 해안의 왕국이었다. 정복왕 차이메라고도 알려진 아라곤의 차이메 1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1262년 맏아들 알폰소가 임종한 후 유언장에서 그는 왕국을 아들 차이메에게 양도했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언장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동안 1276년 차이메 1세가 임종했을 때 아라곤 연합왕국은 아라곤의 페로 3세 또는 페로 대왕으로 알려진 그의 장남 페로에게 넘어갔다. 마요르카 왕국은 마요르카의 차이메 2세라는 이름으로 통치한 차이메에게 넘어갔다. 1279년 이후, 아라곤의 페로 3세는 마요르카 국왕이 아라곤 국왕의 가신임을 확립했다. 이 칭호는 1715년 누에바 플란타 칙령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아라곤과 스페인 군주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다.
마요르카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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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어: Regne de Mallorca 스페인어: Reino de Mallorca 라틴어: Regnum Maioricae 프랑스어: Royaume de Majorqu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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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 14세기 마요르카 왕국 | ||||
수도 | 팔마 그리고 페르피냥 | |||
정치 | ||||
정치체제 | 아라곤 주도 왕립 입헌 군주제 | |||
역사 | ||||
• 설립 | 1229년 | |||
• 누에바 플란타 칙령 | 1715년 | |||
인문 | ||||
공용어 | 카탈루냐어 | |||
종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공식)[1] 이슬람교 유대교 |
마요르카 캡 베르밀 호텔(구칭: 파크 하얏트 그랜드 호텔) 로카 레스토랑 서버 인종차별 함
지리
편집왕국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했다: 마요르카, 메노르카[2], 이비자, 포르멘테라. 국왕은 또한 루시용과 세르다냐의 본토 백작령과 야고보 1세가 유지한 오시타니아의 영토인 몽펠리에의 영주, 오베르뉴의 칼라트 자작령, 몽펠리에와 인접한 오멜라스의 남작령의 영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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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아라곤 겸 마요르카왕 차이메 1세(하우메 1세)의 업적은 두 강국인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 아라곤 왕국 사이에 있었던 당시에 잦은 분쟁 지역인곳을 포함한 지중해의 전략적 고립 영토를 만들어냈던 것이 포함됐었다. 마요르카 왕국의 허약함을 인지한 하이메 1세는 새로운 왕국을 통합시켜내기 위해 세르다냐 정복에 착수했다. 그는 또한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의 딸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아들 하이메를 혼인시키려 협상에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계획 어느것도 성공하지는 못 했다.
차이메 1세가 사망하고 나서, 새로운 마요르카의 왕인 하우메 2세는 아라곤왕 페로 3세에게 공물을 받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1279년까지 왕국내 여러 문제에 사로잡할때까지 마요르카의 군주는 그의 나라가 아라곤의 군주의 신하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로 마요르카 왕국은 의회를 열 수 가 없었고, 마요르카의 국왕은 아라곤의 군주를 향한 공물을 카탈루냐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1279년 페르피냥 조약으로, 아라곤 왕국과 마요르카 왕국 사이의 분균형이 생겨났다. 아라곤의 왕은 차이메 1세의 유언을 어기고 아라곤 왕국의 하나된 관할권을 재확립하여 마요르카 왕국에 대한 아라곤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을 유지했다. 이 조약은 마요르카 왕국과 아라공 왕관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의회의 부재는 이미 붕괴 직전의 왕국의 불안전성을 심화시켰고, 게다가 공공 기관 역시도 부재였다.
아라곤 성전 기간, 마요르카왕 하우메 2세는 아라곤왕 페로 3세에 맞서 교황,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른 결과로 페로의 후임자 아라곤왕 알리폰소 3세는 1286년에 아라곤 왕국을 정복하여 마요르카의 알폰스 1세를 겸하였다. 그러나 1295년 아나니 조약으로 아라곤왕 차이메 2세은 하우메 데 마요르카에게 발레아스 제도를 되돌려줘야만 했다.
1324년에 마요르카왕 하우메 2세의 아들 마요르카왕 산스 1세(페란 데 마요르카 왕자의 아들)가 사망하자, 산스의 조카 하우메 3세가 9세의 나이에 마요르카의 왕위에 올랐고, 왕국을 관리하기 위해 그의 숙부 펠립 데 마요르카(Felip de Mallorca)을 수장으로 한 섭정 의회가 들어섰다. 상황은 아라곤왕 차이메 2세가 마요르카 왕위에 대한 그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며 더욱 어려워졌다. 1325년 펠립은 사르데냐를 침공하면서 산스가 만든 엄청난 빚을 상환한 후 아라곤 왕에 의한 마요르카 왕위 계승권 주장에서 지켜냈다. 계승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마요르카 왕국은 급격한 경제 위기에 쳐한다.
하우메 3세는 아라곤 왕국과 유사하도록 정책 진행을 강요받았다. 그로 인해서 그는 제노바와의 전쟁 (1329년-1336년)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고, 마요르카 왕국을 위한 여러 경제적 시장을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쩔수 없이 다시 유대인 지역 사회에 대한 새로운 세금과 벌금을 부과했으나 이는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는데는 불충분했다. 마요르카 왕국의 문제는 1341년부터 아라곤왕 페로 4세이 침략 준비를 위해 모든 관계를 끊으면서 끝이 없는거처럼 보였다. 1343년 5월, 페로 4세는 발레아레스 제도를 공격했고 그 다음에는 1344년에 루시용과 세르다냐 백작령들을 공격했다. 하우메 3세는 프랑스 지역의 영토만을 보존할 수 있었다. 1349년에 이 영토들을 프랑스의 국왕에게 매각하고, 하우메 3세는 마요르카로 떠났다. 그는 1349년 10월 25일 류크마조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리하여 마요르카 왕국은 아라곤 연합왕국에 합병되어 페로 4세는 마요르카의 페란 1세로도 불리게 된다.
마요르카의 함락
편집마요르카 왕국의 멸망은 영향을 받은 분쟁들, 즉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백년 전쟁,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왕국을 위성 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제노바인들의 시도들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다. 프랑스 연합왕국(몽펠리에를 통해)과 아라곤과 종속 관계를 맺고 있던 마요르카 왕국은 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중립 기간 동안 왕국의 경제에 자금을 대기 위해 늘어난 세금은 왕국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Hughes, Robert (2011). 《Barcelona》.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3쪽. ISBN 9780307764614.
- ↑ which was still under the rule of Muslims until 1231 when its sovereignty was surrendered to James I
- A Mediterranean emporium - The Catalan kingdom of Majorca, by David Abulafia, ISBN 0-521-89405-0
- Abulafia, David. The Western Mediterranean Kingdoms, 1200-1500. 1997. ISBN 0-582-078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