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면
문송면(文松勉, 1971년 2월 14일[1][2] ~ 1988년 7월 2일[2][5][6])은 온도계 제조업체에 근무 중 수은 중독으로 17세의 나이로 사망한 대한민국의 노동자이다.[3]
문송면 (文松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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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1년 2월 14일실제로는 71년생.호적으로는 73년생이랍니다. 그래서 언론에는 15세로 표시된 것입니다.)[1][2]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산군 원북면 양산리 163[2][3][4] |
(
사망 | 1988년 7월 2일[5][6]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성모병원[2][5][6][7] | (17세)
사인 | 수은 중독[1][2][3] |
매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3][8][9]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동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태안중학교 졸업 |
직업 | 노동자 |
활동 기간 | 1987년 ~ 1988년[3] |
소속 | 협성계공[3] |
생애
편집문송면은 1971년 2월 14일에 충청남도 서산군 원북면(현 태안군 원북면) 양산리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3][4][10]
중학교 졸업을 앞둔 1987년 12월 5일부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동에 위치한 온도계 공장인 협성계공(현 협성히스코)에 입사하여[3][4] 1988년 2월 7일까지 근무하다가, 병가를 이유로 휴직계를 제출하고 집으로 내려와 요양을 하였으며,[3][11] 그 이후인 같은 해 3월 22일에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은 중독 및 유기용제 중독 추정 진단을 받았다.[1][3] 그리고 7월 2일 새벽 2시 35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이물질이 기도에 막혀, 질식사하였다.[2][5][6][7]
장례식은 같은 해 7월 17일에 ‘산업재해 노동자장’으로,[12][13] 양평동 4가의 협성계공 앞에서 약 5백여 명이 참석하여 노제를 지낸 뒤에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을 가졌다.[8][9]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원진레이온을 비롯한 전반적인 직업병 문제가 쟁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14][15]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진단서》, 병력번호 7060054-8, 연번호 3767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사망진단서》, 가톨릭대학의학부제일부속성모병원, 1988년 7월 4일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이승원 (2009년 7월 7일). “올림픽에 은폐될 뻔한 14살 소년의 수은중독, 문송면 열사”. 울산노동신문.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가 나 다 임채청 (1988년 7월 4일). “소년의 죽음과 관료주의”. 동아일보.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김봉선 (1988년 7월 4일). “"兄 살고싶어"”. 경향신문.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水銀中毒 15세少年 1百15일만에 숨져”. 경향신문. 1988년 7월 2일.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가 나 “수은 중독 15살 공원 숨져 온도계 공장 취업한 뒤 병얻어”. 한겨레신문. 1988년 7월 3일.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가 나 “문송면군 장례 엄수”. 한겨레신문. 1988년 7월 19일.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가 나 “水銀중독사 文군路祭 경찰저지 10여명負傷”. 동아일보. 1988년 7월 18일.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전주희 (2002년 7월 31일). “[노동자의얼굴]15세에 죽어간 노동자 문송면”. 참세상.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요양신청서》, 처리기간 41018, 서식 제9호
- ↑ “17일 문송면군 장례식”. 한겨레신문. 1988년 7월 15일.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水銀중독死 文松勉군「産災노동자葬」으로”. 동아일보. 1988년 7월 15일.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이윤근 (2012년 6월 27일). “15세 소년 문송면의 죽음을 기억하십니까?”. 프레시안.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 ↑ 안종주 (1988년 7월 7일). “목숨까지 뺏는 직업병…'모두의 책임'”. 한겨레신문.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