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후
민진후(閔鎭厚, 1659년 ~ 1720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민진원과 민진영(閔鎭永)의 형이다. 스승은 송시열이며,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본관은 여흥.
생애
편집민유중과 송준길의 딸인 은진 송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현왕후와 민진원은 그의 동생들이다. 소년 시절 아버지 민유중과 백부 민정중의 스승이기도 한 송시열의 문하에서 문인으로 수학하였다. 1681년(숙종 7) 생원이 된 뒤 16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正字)가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삭탈관직되어 귀양 갔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복직되었다. 이후 다시 중용되어 사간원정언, 부응교, 헌납, 시독관, 수찬, 검토관, 북평사를 거쳐, 승지가 되었고 그 뒤에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낸 뒤에 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대사간, 강화부유수, 장례원판결사, 형조참의, 병조참판, 호조참판을 했고 한성부판윤으로 승진,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예조판서, 좌참찬, 한성부판윤, 지경연사를 계속 했다. 곧 예조판서, 지의금부사, 수어사를 했다. 곧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우참찬, 지의금부사를 했다.
1705년 조선 초기 좌정승 김종서의 죄를 회복하고, 관작의 복구를 청했으나 무산되었다. 1706년 의금부 지사(知事)로서, 유생 임부(林溥)가 세자모해설(世子謀害說)을 발설하여 일어난 옥사 때 왕 앞에서 함부로 논죄하다가 탄핵,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후 복직되어 판의금부사, 좌참찬, 수어사, 판중추부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판돈녕부사 등을 했다. 형조판서, 수어사, 판돈녕부사, 제조,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 수어사, 좌참찬, 한성부판윤이 되고 예조판서, 지경연사,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좌참찬 등을 했다. 그러나 한때 소론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다가 1717년 다시 기용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돈령부판사,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17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내국제조(內局提調)로서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19년 의정부 우참찬,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서 1720년에 개성부 유수로 있다가 죽었다.
인품이 뛰어나고 문집으로 《지재집》(趾齋集)이 전한다. 시호는 충문(忠文),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와도 친분이 깊었다.
가족 관계
편집참고 자료
편집- 한영우 (2001년 10월 20일).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 1쇄판. 서울: 효형출판. ISBN 89-86361-57-4.
민진후가 등장한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이숙의 아들로, 김수흥(金壽興)의 사위인 이만성(李晩成)의 형이다. 그런데 이만성과 이만창의 어머니는 대사성 오백령의 딸이었는데, 대사성 오백령의 증손이 남인 청남의 핵심인물인 수촌 오시수였다. 누이 이씨는 오두인(吳斗寅)의 아들 오이주(吳履周)의 처이다. 이만창의 사촌누이는 민진후 남매의 외사촌형인 송병문(宋炳文, 송준길 손자)에게 출가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장성하여 김창집(金昌集, 노론4대신 중 한 명)의 장남인 김제겸(金濟謙)과 혼인하였다.
-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에 수록된 "제망실송부인문(祭亡室宋夫人文)"에서 발췌. "제망실송부인문"은 민유중이 1673년 2월 14일에 치를 계실 은진송씨의 장례에 앞서 지은 제문으로, 이 제문에 민유중은 은진송씨가 사망 직전에 출산한 쌍둥이 자매를 정성과 정제로 작명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제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 제문이 쓰여진 당시에 은진 송씨가 남긴 자녀는 총 2남 5녀로, 민유중의 최종 가계에 기록된 송씨의 자녀수와 일치하지 않는데 이는 1672년에 탄생한 삼녀 신이(혹은 정신)와 쌍둥이 중 한 명이 조졸한 탓이다. 성인식 혹은 혼인식을 치르기 전에 사망한 자녀는 부모의 가계에 포함하지 않는다.
- ↑ 김수항의 차남 김창협(金昌協)의 처제이며 김창국(金昌國)의 맏사위인 이하조(李賀朝, 영빈 김씨의 형부)의 누이이다. 이단상의 장남 이희조(李喜朝)는 김수흥의 사위로 김창협과는 사촌남매이며, 이단상의 다른 사위 송징오는 이하조의 처와 이종남매이기도 하다. 이단상의 질녀 이씨는 인경왕후의 당백모(김만균(金萬鈞)의 처)이며 원몽린(元夢隣, 숙경공주의 남편)의 고종아우이자 노론4대신 중 한 명인 이건명(李健命)의 장모이다.
- ↑ 폐비가 되어 사가로 돌아온 인현왕후가 저택 별채에서 유폐생활을 하며 손수 키운 질녀이다. 《소설 인현왕후전》에는 인현왕후가 민진후(閔鎭厚)의 딸을 거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소설 인현왕후전》에 잘못 쓰여진 것일 수도 있으나 인현왕후가 둘 다 거두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 ↑ 조태휘(趙泰彙) 아들이며 노론4대신 중 한 명인 조태채(趙泰采)의 친조카이다.
- ↑ 영조에게 어머니 민씨가 인현왕후의 폐비시절을 직접 모셨던 것을 피력하고 어머니 혹은 인현왕후가 썼다는 수필을 바쳐 상당한 재물과 관직을 얻었으며 음서로 문관 당상직에 오를 만큼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영조를 인현왕후가 폐비시절 머물었던 민유중의 저택(당시는 민백분의 소유) 별채로 멋대로 안내하여 영조가 인현왕후가 침실로 썼다는 건물에 '감고당'으로 이름짓고 친필로 편액을 써주고, 조규빈을 종2품 한성부우윤으로 특진해주었는데, 훗날 영조실록의 사관이 그 집안 사람들에게서 전해들었던 바에 따르면 방향이 틀린 곳이었다고 한다. 출처: 영조실록 97권, 37년(1761 신사 / 청 건륭(乾隆) 26년) 6월 13일(경진) 4번째기사
- ↑ 명성황후의 고조부
- ↑ 명성황후의 증조부
- ↑ 경종 즉위 후, 무고의 옥을 재수사하여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무고함을 밝히고 왕후로 추존해야 한다는 소론과 남인의 주장이 일어나자 국상 중이니 언급치 말라는 경종의 왕명을 무시하고 성균관 장의의 입장으로 권당을 선언하며 숙종이 희빈 장씨를 죽인 것은 빛나는 업적이니 만인과 후세가 이를 칭송하도록 행록에 남길 것을 요구한 자가 바로 윤지술이다. 이 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는 민진원과 그 무리(노론)에게 결기 넘치는 젊은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보호받다가 신임옥사로 뒷배를 모두 잃고 즉결 처형됐다.
- ↑ 윤지술 남매의 어머니 능성구씨의 양동생으로, 가문의 배경으로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진사에 불과한 출신으로 음관(蔭官)‧문관(文官)‧무관(武官)의 높은 관직에 모두 올라 대신들의 반발이 격렬했다.
- ↑ 김만중(金萬重)의 손자로 기사환국 때 처참된 이사명(李師命)의 사위인 김용택(金龍澤)의 친형이다. 김춘택(金春澤)의 사촌아우다.
전임 서종태 |
제573대 한성부판윤 1702년 음력 10월 8일 ~ ? |
후임 최규서 |
전임 송창 |
제580대 한성부판윤 1703년 음력 10월 21일 ~ ? |
후임 조태채 |
전임 윤세기 |
제589대 한성부판윤 1705년 음력 2월 18일 ~ ? |
후임 서종태 |
전임 권시경 |
제597대 한성부판윤 1706년 음력 8월 9일 ~ ? |
후임 이익수 |
전임 강현 |
제603대 한성부판윤 1707년 음력 12월 4일 ~ ? |
후임 김우항 |
전임 이언강 |
제622대 한성부판윤 1711년 음력 3월 5일 ~ ? |
후임 황흠 |
전임 김석연 |
제635대 한성부판윤 1713년 음력 2월 22일 ~ ? |
후임 윤덕준 |
전임 홍만조 |
제644대 한성부판윤 1716년 윤음력 3월 3일 ~ ? |
후임 강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