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
민찬호(閔贊鎬, 1877년 10월 21일 ~ 1954년 2월 5일)는 황해도 평산도호부[1] 출신으로 일제 시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을 이끌었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2]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목사로서 합성협회, 국민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다.[2]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에 따라 소약소국동맹회의와 필라델피아 대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으며, 하와이 한인기독학교의 교장으로도 재직하였다.[2] 본관은 여흥(驪興), 이명(異名)은 민찬호(閔燦鎬) · 민찬호(閔讚鎬)이다.[2]
생애 및 활동
편집민찬호는 1877년, 황해도 평산에서 민형찬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주로 성장했다.[3] 배재학당 재학 중 서재필의 지도를 받아 협성회에 관여했으며 1901년, YMCA가 발족할 때에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었다.[4]
1905년, 하와이그리스도감리교회에 제2대 목회자로 초빙되어 LA로 유학가기까지 약 6년간 시무하였다.[3][4] 이후 동포들과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였고 1909년, 국민회(國民會) 창립에 관여했으며 1913년, 안창호 등이 흥사단을 만들 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5]
1911년, LA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16년, 남가주 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6]
1918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뽑혔으나, 미국 정부가 한국 대표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실제 파견되지는 못했다.[3] 대신 1919년 4월 14일부터 4월 16일까지 3일간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19년, 한인기독교회 초대 목사를 역임했으며,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약 10여년간 한인기독학원의 교장으로도 재직했다.[3][6]
1921년, 호놀룰루에서 동지회가 창립될 때 참가했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반이승만 계열인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에도 가담했다.[3]
기타
편집그의 부인인 몰리 홍 민은 하와이 초기 한인 목사였던 홍치범의 동생으로, 영민한 그들 남매는 평양지역 선교 책임자 윌리엄 노블(William Noble) 목사의 도움으로 서울과 미국 등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3]
하와이의 엘리트 여학교였던 카와이아하오 여자신학교와 디이컨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몰리 홍은 1913년, 샌프란시스코 감리교 주교인 휴스의 중매로 민찬호를 만나, 같은해 6월 4일에 결혼했다.[3] 그 후 민족운동과 목회활동으로 바빴던 민찬호 목사 대신 집안의 경제를 도맡았으며, 민 목사 사후에는 적십자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