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손씨(密陽孫氏)는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 때의 인물로 효심이 깊어 왕에게 알려져 신라의 국효(國孝)로 일컬어졌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밀양 손씨
密陽孫氏
나라한국
관향경상남도 밀양시
시조손순(孫順)
중시조손긍훈(孫兢訓)
집성촌경상남도 밀양시
전라남도 보성군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평안남도 양덕군
주요 인물손수경, 손비장, 손기양, 손기남, 손병희, 손지현, 손재하, 손영목, 손홍원, 손정규, 손진태, 손창식, 손동욱, 손지환, 손원일, 손기정, 손명순, 손영길, 손주항, 손세일, 손경식, 손지열, 손학규, 손용근, 손정수, 손혜원, 손석희, 손석도, 손명순 영부인
인구(2015년)306,895명
비고밀양손씨 중앙종친회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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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진한(辰韓) 육촌(六村) 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村長) 구례마(俱禮馬)가 처음 이산(伊山)에 내려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원조(元祖)가 되었다고 한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는 기원전 57년 육부(六部)가 알천(閼川)에 모여 상의하여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금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신라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년(서기 32년) 대수부(大樹部)를 모량부(牟梁部)로 고치고 손씨(孫氏)로 사성하였다고 한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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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경북 경주 모량리 출신으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835년(신라 흥덕왕 10년) 손순(孫順)의 효행이 왕에게 알려져 신라의 국효(國孝)로 일컬어졌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삼국유사》에는 손순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파묻으려 한 이야기가 나온다.[1]

손순의 장손자 손익감(孫翼減)도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손순의 7세손인 중흥조(中興祖) 손긍훈(孫兢訓)이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밀양 손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8명, 무과 급제자 125명을 배출하였다.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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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사전공파(左師傅公派)
  • 전농시사공파(典農寺事公派)
  •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 군사공영파(郡事公榮派)
  • 부사공파(府使公派)
  • 오곡공파(梧谷公派)
  • 오한공파(??公派)
  • 국자진사공파(國子進士公派)
  • 명천공파(明川公派)
  • 현감공파(縣監公派)
  • 군수공파(郡守公派)
  • 목사공파(牧使公派)
  • 기로공파(耆老公派)
  • 정승공파(政丞公派)
  • 사부공파(師傅公派)
  • 첨정공파(僉正公派)
  • 충의공파(??公派)
  • 돈암공파(遯巖公派)
  • 계륜공파(??公派)
  • 후능참봉공파(??公派)
  • 팔룡공파(八龍公派)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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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수경(孫守卿) : 1326년(고려 충숙왕 13)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전 왕인 충혜왕(忠惠王)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뇌물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39년(충혜왕 복위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서 형부(刑部)에 투옥되자 함께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이 공으로 1342년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1등공신에 책록(冊錄)되고, 토지 100결(結)과 노비 10구(口) 등을 받았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물(貢物)을 바치고 돌아왔으며,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어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다. 이어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왕자 저(㫝 : 뒤의 충정왕(忠定王))를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와 즉위시킴으로써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 판삼사사 의창부원군(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判三司事義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곧 좌정승(左政丞)에 이어 우정승(右政丞)을 거쳐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역임한 후 1356년 전 호군(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釋器)를 추대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2]
  • 손비장(孫比長) :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 (笠巖). 아버지는 현감 손민(敏)이다. 전라도 부안 출신. 1464년(세조 10)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 및 『예종실록』을 편찬한 공으로 1471년(성종 2) 이조정랑으로 승진되고 1475년 장령이 되어 여러 차례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 1476년 전첨으로 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부제학·참찬이 되어, 간언에 기꺼이 따를 것과 대간의 임기를 연장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시무4조(時務四條)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다음해 대사간·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1478년 승지로서 왕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예에 어긋났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 손기양(孫起陽, 1559년 ~ 1617년) :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전적, 울주판관, 영천군수를 역임했다.[3]
  • 손덕심(孫德沈)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손덕호(孫德浩)·손덕순(孫德淳)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창암(蒼巖)에서 적을 무찔러 여현(礪峴)을 방비하였다.
  • 손기남(孫起南)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산에 숨고 들로 도망을 가는데 홀로 몸을 떨쳐 불타는 향교에 뛰어들어 오성제현의 위판을 근처 험산 암굴에 옮겨 8년간 보존하였으며 왜란이 끝나고 영남지역 향교재건의 표준으로 삼도록 하는 공적을 세워 선조로부터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사재감첨정>의 품계와 관직이 내려졌다.
  • 손병희(孫秉熙, 1861년 ~ 1922년) : 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지도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 손정도(孫貞道, 1881년 ~ 1931년) : 일제 강점기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장을 역임하였다.
  • 손일민(孫逸民, 1884년 ~ 1940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상임의원을 역임하였다.
  • 손동욱(孫東頊, 1909년 ~ 1976년) : 대한민국의 대법관을 역임하였다.
  • 손원일(孫元一, 1909년 ~ 1980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운동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손명순(孫命順, 1929년 ~ 2024년) 대한민국의 영부인을 역임하였다.
  • 손재식(孫在植, 1934년 ~ ) : 대한민국의 관료.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하였다.
  • 손경식(孫京植, 1939년 ~ ) : 대한민국의 기업인. CJ그룹 대표이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손지열(孫智烈, 1947년 ~ 2019년) : 대한민국의 대법관. 대한민국 제14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손학규(孫鶴圭, 1947년 ~ ) :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 제14·15·16·18대 국회의원. 제31대 경기도지사. 대한민국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손혜원(孫惠園, 1955년 ~ ) : 대한민국의 정치인. 예술가.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손석희(孫石熙, 1956년 ~ ) : 대한민국의 언론인. JTBC 보도부문 총괄사장을 역임하였다.
  • 손주은(孫主恩, 1961년 ~ ) : 대한민국의 교육자. 메가스터디 설립자이다.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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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항렬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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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58,369가구 243,473명
  • 2000년 85,333가구 274,700명
  • 2015년 306,895명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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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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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연; 김혜경 (옮긴이) (2006년 2월 1일). 〈여덟 번째 여행 - 삼국 시대의 효자들 이야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 서울: 서해문집. ISBN 8974832747. 
  2. 『고려사』 권108, 열전21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손기양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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