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원 (조선)

박명원(朴明源, 1725년 음력 10월 21일 ~ 1790년 음력 3월 25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

박명원
朴明源
조선 영조의 부마

금성위 錦城尉
이름
별호  : 회보(晦甫) ·  : 만보정(晩葆亭)
시호 충희(忠僖)
신상정보
출생일 1725년 10월 21일(1725-10-21) (음력)
사망일 1790년 3월 25일(1790-03-25)(64세) (음력)
가문 반남 박씨
부친 박사정
모친 함평 이씨
배우자 화평옹주
자녀 4남 3녀 (첩실 소생) · 박상철 (양자)
능묘 화평옹주 · 박명원 묘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산57-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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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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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년(영조 1년) 10월 21일, 박사정함평 이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와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부부의 5대손이다.[1]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박명원의 8촌 동생이며, 순조의 외조부이자 수빈 박씨의 아버지인 박준원 또한 동항렬의 친척이다.

처음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제수되고, 품계가 쌓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봉해졌다.

부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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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년(영조 14년) 2월,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2]

화평옹주와 박명원의 혼례를 주관하였던 효종의 부마이자 숙녕옹주의 남편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은 '영조의 장녀 화순옹주의 혼례때의 의물이 숙녕옹주 때보다 열 배나 더 풍성하였는데, 화평옹주의 혼례는 화순옹주보다 더욱 풍성하다'고 말하였다.[3] 영조가 화평옹주를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에, 화평옹주의 남편인 박명원 또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화평옹주와 박명원 부부는 혼례를 치른 후에도 궐 안에서 생활하다가, 1742년(영조 18년) 출합하여 사저에 나가 거주하였다. 화평옹주가 출궁할 때 영조는 이현(梨峴)의 별궁을 하사하였는데 옹주가 사양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화평옹주와 사별하였다.[4] 영조가 화평옹주의 상에 친림하려 하자 대신들이 만류하였고, 이때 박명원이 대죄를 청하자, 영조는 박명원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5]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하고 환궁할 때 지나다가 화평옹주(和平翁主)의 상(喪)에 들른다 하니,
대신과 약원(藥院)에서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수레를 탈 때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말하기를,
 "경 등이 기필코 간쟁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원직(院直)하게 하겠다." 하자,
대신이 감히 간쟁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땅에 엎드려 죄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기를,
 "네가 나를 부옹(婦翁, 장인어른)으로 여긴다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가(大駕)가 옹주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초경(初更)에 이르러 정원 ·옥당 ·내국과 시임 대신 · 원임 대신이 품계하자 환궁하였다.
—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7월 3일 (을유)

이후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를 국상에 버금갈 정도로 성대하게 치렀다.[6] 영조는 이후에도 화평옹주의 저택을 수차례 들러 박명원을 만나보고 돌아갔다.[7][8]

정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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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정조 4년), 연행사로 선발되어 진하 겸 사은사로서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의 풍경과 실황을 보고하였다. 이때 수행관의 일원으로 함께 따라간 8촌 동생인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적어 《열하일기》를 편찬하였다.[9]

1786년(정조 8년), 문효세자가 죽자 초상에서부터 장례 때까지 주관하였으며 장지를 정하는 일까지도 행하였다.[10]

1789년(정조 9년), 박명원은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융건릉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정조는 박명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히 제문과 신도비명을 작성하였다. 박명원이 생전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길 바랬던 뜻과 달리, 정조는 호조에 명을 내려 장례에 1등급의 예를 적용하였다.[11]

금성위는 어진 도위(都尉)였다.
살아서는 3조(朝)의 은혜와 대우가 지극하였고,
죽어서는 벼슬아치와 하인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니,
옛말에 ‘살아서는 영광이 있고 죽어서는 슬퍼한다.’ 는 것은
바로 도위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정조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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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원의 초상화 두 점에 영조가 직접 어필로 찬(贊)을 적어주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할 때 요하에서 비가 내려 길이 막히자, 급히 강을 건너자 뒤따르던 사람들이 허둥대었다. 강을 건너고 사람들에게 “오늘 일은 진실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조의 위덕(威德)에 힘입은 자는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고, 설사 빠져 죽는다 해도 이것은 자기의 직분이다.” 라고 말하였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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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해, 형의 아들인 박상철을 양자로 들였으나 박상철 또한 요절하였다. 측실에게서 4남 3녀를 두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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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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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미 → 박세교 → 박태두 → 박필하 → 박사정 → 박명원
  2.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1738년 청 건륭(乾隆) 3년) 2월 30일 (임자)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이 화평옹주에게 장가들어 금성위로 봉작되다
  3.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8월 2일 (갑신)
    처음 화평옹주가 하가(下嫁)할 때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주(貴主, 옹주)들의 혼인을 매번 주관해왔다.

    그런데 화순옹주(和順翁主)가 하가할 때의 의물이 내가 관주(館主)가 되었을 때에 견주어 보면 열 배나 더 풍성하였으며, 이제 귀주(화평옹주)의 혼수(資裝)는 또 화순옹주에 견주어보면 더할 수 없이 풍성하였다."

    하였다.

  4.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6월 24일(정축)
    화평옹주가 위독하여 옹주 집에 행행하다
  5.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7월 3일 (을유)
    화평옹주의 상에 들른다하여 대신이 간쟁했으나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꾸짖다
  6.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8월 2일 (갑신)
    화평옹주를 장사지냈는데 의물의 성대함이 국장에 버금갈 정도였다
  7. 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6월 23일 (기해)
    임금이 금성위 박명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옹주의 소상이다
    임금이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옹주(和平翁主)의 소상(小祥)이었다.

    임금이 그 대문에 이르러 남여(藍輿)에서 내려와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배종(陪從)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오륜(五倫)도 없는가? 모름지기 나에게 하루의 여가라도 허락하라."

    하고, 임금이 화평옹주를 생각하는 슬픔이 심하여 자주 그 집에 거둥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밤이 깊어 문을 닫았을 것이니 군병(軍兵)이 더러 끼니를 거르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밥을 전달하도록 하고, 그 성(城) 밖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군문에서 밥을 먹인 뒤에 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8. 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2월 1일 (을사)
    명선공주 · 명혜공주의 사당에 나갔다가 금성위의 집에 들르다
    임금이 명선공주(明善公主) · 명혜공주(明惠公主) 두 공주의 사당에 나아갔다가 지나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 들렀다.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바로 현종(顯宗)의 따님으로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임금이 그 묘우(廟宇)가 황폐하고 쓸쓸하다고 여겨 직접 임어(臨御)하여 경계시켰다.

  9. 정조실록》 10권, 정조 4년(1780년 청 건륭(乾隆) 45년) 9월 17일 (임진)
    진하 겸 사은 정사 박명원 등이 청나라의 사정을 아뢰다
  10. 《금성위 박명원 신도비명》
  11.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3월 25일 (을사)
    금성위 박명원이 졸하니 하교하다
  12.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12월 28일 (임진)
    광주 부윤 박상철의 죽음을 애도하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광주 부윤 박상철(朴相喆)이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무릎을 치며 놀라 탄식하기를,

    "아침에 정원(政院)에서 광주(廣州)의 밀부(密符)를 거두어 들인 것을 내가 깨닫지 못하였다.

    내가 그의 외조부(外祖父)로서 이와 같이 잊었으니 이것이 무슨 정신인가? 애석하다.

    조정의 사이에서 조경(躁競, 마음을 조급하게 굴며 남과 권세를 다투는 것)하지를 않은 자는 이 한 사람 뿐이었으니 사정에 가리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서 관(棺)의 재목을 가려서 주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