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익
박순익(朴順益, 1881년 7월 23일 ~ 1934년 10월 30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박순익
朴順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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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군 예하 군서기관 | |
임기 | 1906년 6월 15일 ~ 1908년 5월 20일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이형 대한제국 순종 이척 |
섭정 | 황태자 이척(前) 의친왕 이강(前)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1년 7월 23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함안군 漆原面 龜城里 |
거주지 | 조선 경상남도 함안 조선 전라북도 전주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 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 대한제국 경상남도 함안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 |
사망일 | 1934년 10월 30일 | (53세)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 |
학력 | 전라북도 전주소학교 |
경력 | 한국독립당 행정위원 겸 당무위원 |
정당 | 무소속 |
본관 | 밀양(密陽) |
배우자 | 전주 최씨 부인(사별), 한점순(재혼) |
자녀 | 슬하 6남 8녀 (장남 박기하, 차남 박문하, 5남 박승하, 6남 박병하)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개신교 |
웹사이트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
상훈 | 1992년 3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
본관은 밀양(密陽), 아명(兒名)은 박경흡(朴景洽)이며 1886년에 박순익(朴順益)으로 개명(改名)하였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생애
편집일생
편집대한제국 시대에는 잠시 대한제국 하위급 관료 직을 지내기도 한 그는 1908년 대한제국 관료 퇴임 후 1910년 경상남도 함안 향리에서 경술국치 사건을 목도하였으며 그 후 1919년 3월 24일과 1919년 4월 3일 등 두 차례에 걸쳐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동네 향리 장날을 기해 대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또한 사전 모의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太極旗)를 제작 및 배포한 후 경상남도 함안 칠원주재소를 습격하고 대한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운동을 전개하다 결국 일경에게 피체되었고 평안남도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으며 같은 해 1919년 겨울에 평안남도 평양형무소 출감을 하였다.
정당 당원 이력
편집- 前 한국독립당 행정위원 겸 당무위원(1920년~1921년)
사후
편집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2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하였다.
가족 관계
편집- 생전에 상배(喪配)를 하여 한 차례 재혼을 한 그는 슬하 6남 8녀를 두었다.
각주
편집외부 링크
편집-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박순익 Archived 2018년 12월 17일 - 웨이백 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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