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백제의 제24대 국왕 (?–501)
(백제 동성왕에서 넘어옴)

동성왕(東城王, 468년[1] ~ 501년 음력 12월, 재위 : 479년 음력 11월 ~ 501년 음력 11월)은 백제의 제24대 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모대(牟大)이다. 또 다른 이름은 마모(摩牟)·마제(麻帝)·말다(末多)·여대(餘大)등이 있다. 제22대 왕인 문주왕의 아우인 좌평 곤지의 둘째 아들로서 담력이 있고 활을 쏘는 솜씨가 뛰어나서 백발백중이었다.[1]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한 뒤 정권을 잡은 진씨(眞氏)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삼근왕의 뒤를 이었다.

동성왕
東城王
어라하
동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공주 송산리 6호분(오른쪽)
동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공주 송산리 6호분(오른쪽)
제24대 백제 국왕
재위 479년 11월 ~ 501년 11월 (음력)
전임 삼근왕
후임 무령왕
이름
부여모대(扶餘牟大)
이칭 마모(摩牟) 마제(麻帝)
말다(末多) 여대(餘大)
대(大)
시호 동성(東城)
신상정보
출생일 468년경?
출생지 왜국?
사망일 501년 12월 (33세?) (음력)
사망지 웅진성
부친 부여곤지
모친 미상
형제자매 5남 중 차남?
무령왕
배우자 미상 (신라 출신 왕족)
자녀 아들,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종교 토착 신앙
능묘 송산리 6호분 (추정)

479년부터 50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479년부터 482년까지 진로(眞老)가 실권을 맡았고 482년부터 501년 죽을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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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의 본명은 모대 또는 여대, 마모이고, 일본일본서기속일본기에는 말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은 전지왕의 손자로,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일본일본서기에도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 한다. 모후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동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라 학계에서는 동성왕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로 추정되는 재위 8년인 486년 당시 동성왕의 나이를 18세로 보고 468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1]

일본에서 체류하다 사촌 삼근왕이 살해되자 아버지 곤지에 의해 백제로 보내져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2] 동성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48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말갈의 연합군을,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이듬해인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488년(동성왕 10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 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493년(동성왕 15년)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고,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에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3]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으며 놀기만 했다. 499년(동성왕 21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동성왕 22년) 봄에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4]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501년(동성왕 23년) 겨울 음력 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졌고, 현장에서 바로 사망하지 않고, 부상을 입은 채 웅진성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음력 12월에 사망했다.[5]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이라는 것을 인용하여 "백제신찬에 이르기를 말다왕이 무도하여 폭정을 펼치니,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백제의 국인이 함께 그를 제거하였다. 무령왕을 옹립하니 휘는 사마왕인데,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동성왕)은 이모형(이복형)이다.(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立 諱斯麻王 是 昆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라고 기록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능의 위치는 미상이다.

무령왕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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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측의 저서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곤지의 첫째 아들이고 동성왕의 형이라고 한다. 한편 그의 딸 보과부인(寶菓夫人)은 신라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고 남모의 외조부가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무령왕의 이복 동생이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의해 무령왕462년에 태어났음이 밝혀지면서 이 가설은 신뢰를 얻었다. 무령왕461년 혹은 462년 출생하였고 523년 사망함이 묘지명에 기록되었다. 한편 동성왕은 465년생인 삼근왕이 479년에 사망한 이후 즉위 당시 동성왕이 어린 나이였다는 기록이 있어 대략 468년경에 출생했고 501년에 백가에게 시해되었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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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이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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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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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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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2권 이노우에 히데오 역주, 헤이본샤〈동양문고425〉1983년 ISBN 4-582-80425-X
  • 삼국유사쓰보이 구메조, 구사카 히로이 교정〈문과대학사지총서〉도쿄 1904년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디지털 라이버리)
  • 일본서기반 노부토모 교정, 기시다 긴코 외 1883년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디지털 라이버리)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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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삼근왕
제24대 백제 국왕
479년 ~ 501년
후 대
무령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