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粉靑沙器)는 분장회청사기(粉裝灰靑沙器)의 약칭으로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 위에 백토(白土)로 표면을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운 자기를 일컫는다. 고려 시대 말기인 14세기 중반에 시작하여 세종~세조 시대인 1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16세기백자에 밀려 쇠퇴할 때까지 만들어졌다.

음각어문편병,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이 명칭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미시마데'(三島手)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것을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처음으로 붙인 것[1]으로, 분청사기는 자기 표면에 상감(象嵌), 박지(剝地), 백토분장(白土粉粧), 각화(刻畵), 철화(鐵畵) 등으로 장식한 것을 전부 포함하는데 편의상 상감분청계(象嵌粉靑系: 인화분청, 감화분청)와 백토분청계(白土粉靑系: 백토분청, 박지분청, 철화분청)로 구분된다.

분청사기 가운데 철화, 박지, 귀얄, 덤벙류는 14~15세기[2]에 한반도에 정착하거나 귀화한 유이민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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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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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유섭, 〈高麗 陶磁와 李朝 陶磁〉, 《조광(朝光)》, 조선일보사, 1941년, 46~48면.
  2. 시기상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에 해당한다.
  3. 김윤정,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과 분청사기에 미친 영향〉, 《미술사학연구》 312, 한국미술사학회, 2021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