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5권 > 2. 결택분(決擇分) ③ > 97 - 106쪽
K.572(16-157), T.1605(3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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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집론 제5권
무착보살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2. 결택분(決擇分) ③
1) 제품 ③
멸제(滅諦)란 무엇입니까?
모 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아주 심오하기 때문이고, 세속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승의(勝義)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원만하지 않기 때문이고, 원만하기 때문이고, 장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장엄하기 때문이고, 유여(有餘)이기 때문이고, 무여(無餘)이기 때문이고,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니, 이 같은 차별에 연유해서 멸제를 분별하게 된다.
그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진 여(眞如)의 성스러운 도에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依)가 소멸되거나 소멸시키거나 또는 소멸된 성품이 바로 멸제의 모양이다. 세존께서 “안처와 이처 그리고 비처ㆍ설처ㆍ신처 및 의처에서 명색(名色)이 끝까지 소멸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이리하여 너희들이 지금 이 같은 처(處)를 관찰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른바 여기서 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안처가 끝까지 소멸하여 색상(色想)을 원리(遠離)한 것이고 아울러 의(依)가 궁극까지 소멸되어 그 법상(法想)조차도 원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그 소연(所緣)이 나타나서 진여경계위(眞如境界位)에서 유루법이 소멸되는 것이 멸제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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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심오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그 제행이 구경(究竟)에 이르러 적멸(寂滅)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적멸에서 그들의 제행을 추론하더라도 다르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다른 것도 아니면서 그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 가운데에서 만약 희론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바른 사고도 아니고 도도 아니고 진여도 아니고 또 훌륭한 방편에 의한 사(思)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존께서 “이러한 6촉처(觸處)가 소진되고 욕(欲)을 여의어 일체가 소멸되고 고요하고 잠잠하고 사라진 것 등을 다르다고 말하거나, 다르지 않다고 말하거나,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거나,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희론이 없는 곳에서 도리어 희론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6처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가 가능한 여러 희론도 6처가 소멸되면 모든 희론이 끊어져 버리니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세속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세간도(世間道)가 그 종자(種子)를 끊는 것에서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세존께서 별도로 “그 같은 분(分)이 열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승의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성스러운 지혜로 종자를 영원히 뽑아 내려는 것에 의하여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원만하지 않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모든 유학 혹은 예류과(預流果)에 속하거나, 혹은 일래과(一來果)에 속하거나, 혹은 불환과(不還果)에 속하는 등의 유(有)가 소멸하는 것이다.
원만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모든 무학, 즉 아라한과에 속하는 등의 유가 소멸하는 것이다.
장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혜해탈(慧解脫)하는 아라한의 유가 소멸하는 것이다.
장엄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구분해탈(俱分解脫)하는 3명(明)과 6통(通)의 아라한의 유(有)가 소멸하는 것이다.
유여이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소멸해야 하는 의(衣)가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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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여이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소멸해야 하는 의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과 보살이 열반에 머물지 않고 일체를 포섭하여 소멸시키는 것이다. 언제나 안정되게 머무르는 것으로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고 안락케 하려는 일 때문이다.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남김없이 영원한 끊음[無餘永斷]ㆍ영원한 벗어남[永出]ㆍ기지개를 펴고 잠을 깸[永吐]ㆍ다하는 것[盡]ㆍ욕의 여읨[離欲]ㆍ소멸[滅]ㆍ적정[寂靜]ㆍ사라짐[沒] 등이다.
어째서 남김없이 영원한 끊음이라고 이름합니까?
그 밖의 다른 구절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어째서 영원한 벗어남이라고 이름합니까?
모든 전(纏)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기지개를 펴고 잠을 영원히 깨는 것이라고 이름합니까?
수면(隨眠)에서 기지개를 펴고 영원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하는 것이라고 이름합니까?
견도(見道)의 대치(對治)에서 마침내 이계(離繫)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욕의 여읨이라고 이름합니까?
수도(修道)의 대치에서 이계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소멸이라고 이름합니까?
미래에 그러한 과보의 고통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적정이라고 이름합니까?
현법(現法) 가운데에서 그러한 과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영원히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라짐이라고 이름합니까?
그 밖의 모든 일이 영원히 소멸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무위(無爲)라고 이름합니까?
3상(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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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보기 힘든 것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의 경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전전(轉展)하지 않는 것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여러 취(趣)가 차별적으로 전향하는 것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에 대해 수모를 겪지 않는 것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세 가지 애착을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감로(甘露)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온(蘊)의 마장(魔障)을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무루(無漏)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일체의 번뇌의 마장을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집(集)이라 이름합니까?
계율을 어기지 않고[無罪] 깨끗하게 즐거운 것에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삼각주(三角洲)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3계와 단절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널리 제도함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일체의 커다란 고난이나 재난ㆍ횡액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귀의(歸依)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허망하지 않은 그 의요(意樂)의 방편으로 의지하는 처소가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승귀처(勝歸處)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일체의 가장 뛰어난 성인의 성품으로 능히 되돌아감에 있어 의지받게 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죽지 않는 것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죽지 않는다는 것은 태어남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뜨거운 고뇌가 없는 것과 일체의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에 아주 뜨거운 고뇌로부터 영원히 떠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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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불타지 않는 것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일체의 근심ㆍ한탄ㆍ걱정ㆍ괴로움 따위의 여러 고뇌를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편안함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두려움을 벗어나 그 의지처에 머물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시원함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모든 유익한 일이 의지받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즐거운 일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가장 뛰어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상서로운 길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그들이 쉽게 닦을 수 있는 방편에 의지하는, 증득을 위한 처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근심이 없는 것[無病]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모든 장애로 인한 근심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부동(不動)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일체의 어지러운 움직임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열반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무상(無常)한 적멸의 커다란 안락함에 머무는 것[大安樂住]에 의지 받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무생(無生)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연속해서 태어나는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무귀(無歸)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지금 이후로는 차츰 생겨나는 것을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무조(無造)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전제(前際)의 모든 업번뇌(業煩惱)의 세력에 인도되는 바를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무작(無作)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현재의 모든 업 번뇌를 만들지 않는 것에 의지 받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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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같은 소멸을 불생(不生)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미래의 상(想)이 상속되는 것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멸제에는 총괄적으로 네 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있으니, 멸상(滅相)ㆍ정상(淨相)ㆍ묘상(妙相)ㆍ이상(離相)을 가리킨다.
멸상이란 무엇입니까?
번뇌에서 이계하기 때문이다.
정상이란 무엇입니까?
고에서 이계하기 때문이다.
묘상이란 무엇입니까?
즐겁고 고요한 것을 일삼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무엇입니까?
언제나 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도제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에 연유해서 고를 깨닫고 고집(苦集)을 끊고 고멸(苦滅)을 증득하고 도를 닦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도제의 모양이라고 간략하게 설하는 것이다. 도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자량도(資糧道)ㆍ가행도(加行道)ㆍ견도(見道)ㆍ수도(修道)ㆍ구경도(究竟道)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자량도입니까?
여 러 이생(異生)이 간직하는 시라(尸羅)를 가리킨다. 6근(根)의 문을 잘 단속하고 음식도 그 양을 잘 조절해서 초야(初夜)ㆍ후야(後夜)에 언제나 잠자지 않고 지(止)와 관(觀)을 열심히 닦아 정지(正知)에 머무는 것이다. 또 그 밖의 모든 선업을 익혀 나가는 문소성혜(聞所成慧)ㆍ사소성혜(思所成慧)ㆍ수소성혜(修所成慧)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닦아 익히는 까닭에 현관(現觀)을 성취하여 해탈의 소의(所依)가 되는 법기(法器)의 성품[器性]을 얻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가행도입니까?
자량도에 해당되는 것은 모두 가행도이나, 가행도에 해당된다고 해서 모두 자량도는 아니다. ‘이미 양식을 비축한 도’란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순제인법(順諦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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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법이란 무엇입니까?
각자 별도로 여러 진제 가운데에서 내증(內證)하는 것을 가리킨다. 삼마지발라야(三摩地鉢羅若) 및 그것에 상응하는 것 등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다.
정법이란 무엇입니까?
각자 별도로 여러 진제 가운데에서 내증하는 것을 가리킨다.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것 등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다.
순제인법이란 무엇입니까?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것 등의 법에 부분적으로 편입되는 것에 부수되는 것이다.
세제일법이란 무엇입니까?
무간심지(無間心地)의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것 등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견도입니까?
만 약 총괄적으로 설명한다면 세제일법에서 간단없고[無間] 소득도 없는[無所得]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것 등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고, 또 소연(所緣)과 능연(能緣)이 평등한 평등지(平等智)를 그 모양으로 삼는 것이다. 또 각각 따로 유정가(有情假)와 법가(法假)를 쫓아내거나 두 가지 가(假)의 소연을 모두 쫓아내는 법지를 모양으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견도의 차별을 분별하여 해설한다면 세제일법의 무간에서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ㆍ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ㆍ집법지인(集法智忍)과 집법지(集法智)ㆍ집류지인(集類智忍)과 집류지(集類智)ㆍ멸법지인(滅法智忍)과 멸법지(滅法智)ㆍ멸류지인(滅類智忍)과 멸류지(滅類智)ㆍ도법지인(道法智忍)과 도법지(道法智)ㆍ도류지인(道類智忍)과 도류지(道類智)가 있다. 이와 같이 열여섯 가지 지(智)와 인(忍)이 바로 견도의 차별된 모양이다.
고란 무엇입니까?
고제를 말한다.
고법이란 무엇입니까?
고제의 증상(增上)에서 일어난 교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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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지란 무엇입니까?
가행도 사이에서 진제의 증상을 관찰하는 법지이다.
지인(智忍)이란 무엇입니까?
앞 서의 관찰에서 유력(有力)을 증상하기 때문이다. 각기 고제의 행상 가운데에서 일어나 무루혜(無漏慧)를 현증(現證)하게 된다. 이 같은 혜에 기인해서 영원히 버리고 고를 인견(忍見)하는 것에 의해 일체의 번뇌가 끊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고법지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고법지인이란 무엇입니까?
인(忍)의 무간도(無間道)에서 이 같은 지(智)가 연유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뇌를 해탈하여 증득을 이루게 된다. 이리하여 고법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고류지인이란 무엇입니까?
고법지의 무간도에서 무루혜가 생겨나는 것을 가리킨다. 고법지인과 고법지는 각각 별도의 내증이 있으니 그 이후의 여러 성스러운 법도 모두 이와 동일한 종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고류지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고류지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무간에서 무루지(無漏智)가 생겨나는 그 결정성을 가려내 인가(印可)하는 고류지인을 고류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같이 여타의 진제에서도 그 대응되는 바에 따라 여러 인(忍)과 여러 지(智)가 있으니 마땅히 숙지해야 한다. 이 같은 지위에서 법인(法忍)과 법지(法智)에 연유한 깨달음은 소취(所取)이고 유인(類忍)과 유지(類智)에 기인한 깨달음은 능취(能取)이다.
또 이 같은 일체의 인과 지의 지위에 해당되는 것을 해설하여 ‘무상관(無常觀)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라 이름하고, 이 같은 심찰나(心刹那)를 설명하여 견도라고도 이름한다. 그 소지경(所知境)에 있어서 지(智)의 구경위가 생겨나는 것을 일찰나(一刹那)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일체의 도제는 네 종류의 상응에 연유해서 따라 깨치는 것이니, 안립(安立)하기 때문이고, 사유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증득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원만함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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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립하기 때문이란 무엇입니까?
성문(聲聞) 등이 자소증(自所證)에 따라서 구경을 성취하고서 다른 사람을 또 깨닫게 하려는 까닭에, 그 후득지에 연유한 한량없는 종류의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으로 도제를 안립하는 것이다.
사유에 연유하기 때문이란 무엇입니까?
현관(現觀)의 방편을 올바르게 닦아 익히고자, 세간의 지혜로 사유를 안립해서 이를 되풀이하여 익히는 것이다.
증득하여 받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되풀이하여 익힌 자내증(自內證)으로 최초로 견도위(見道位)에서 올바르게 세간을 벗어나는 희론이 없는 위치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원만하기 때문이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지위가 나중에 원만하게 전의(轉依)되어 구경의 증득에 이르는 것까지 가리킨다. 그들이 구경위(究竟位)를 증득하고서 다시 후득지에 연유하여 명신ㆍ구신ㆍ문신으로 도제를 안립하는 것이다.
계 경(契經)에서의 “6진(塵)을 멀리하고 6구(垢)를 여의어서 제법 가운데에서 정법의 안목이 생긴다”라는 말씀은 이 같은 견도에 의지해서 여러 법인(法忍)으로 능히 6진을 멀리하고, 여러 법지(法智)가 능히 6구를 여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변지(遍知)하기 때문이고, 영원히 끊기 때문에 마침내 도가 청정케 된다.
계 경에서 “견법(見法)ㆍ득법(得法)ㆍ득통달법(得通達法)ㆍ구경견법(究竟見法)으로 일체의 소망과 의혹을 건너서, 다른 그 밖의 연(緣)에 따르지 않고 또 대사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에 끌리지 않고 제법 가운데에서 무외(無畏)를 성취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견도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견법이란 여러 법인(法忍)을 가리키는 것이고, 득법이란 여러 법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극통달법이란 여러 유지(類智)를 가리키는 것이고, 구경견법이란 여러 유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의 소망을 건넌다는 것’이란 여러 인과 지에 연유한 소연에 의해서 구하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일체의 의혹을 건넌다는 것’이란 이 같은 견도 가운데에서의 타소증(他所證)에 있어서 머뭇거리는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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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연에 따르지 않는 것’이란 그 도를 닦는 바에 있어서 다른 것에 끌리지 않고 스스로 잘 대처한다는 것[自然善巧]이다. ‘대사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에 끌리지 않는다는 것’이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사도에게 설득 받아 끌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 가운데에서 무외를 성취한다는 것’이란 그 소증(所證)에 의거해서 법을 질문하고 청취하는 때에 겁내거나 나약한 갖가지 마음이 영원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수도(修道)란 무엇입니까?
견도에 있는 세간도(世間道)ㆍ출세간도(出世間道)ㆍ연도(軟道)ㆍ중도(中道)ㆍ상도(上道)ㆍ가행도(加行道)ㆍ무간도(無間道)ㆍ해탈도(解脫道)ㆍ승진도(勝進道) 등을 모두 ‘수도’라 이름한다.
세간도란 무엇입니까?
세 간의 초정려ㆍ제2정려ㆍ제3정려ㆍ제4정려ㆍ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가리킨다. 이 같은 정려와 무색계에는 네 종류의 상응에 연유해서 자세히 분별되어지니, 그 잡염(雜染)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깨끗한 백업(白業)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건립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청정함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잡념이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네 가지 무기근(無記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애유(愛有)이고, 두 번째가 견(見)이고, 세 번째가 만(慢)이고, 네 번째가 무명(無明)이다. 유(有)에 대한 애착에 기인하는 까닭에 그 맛 들이는 것에서 정려가 잡염에 염착되는 것이다. 견에 연유하는 까닭에 그 소견하는 것에서 정려가 잡염에 염착되는 것이다. 만에 연유하는 까닭에 자만하는 것에서 정려가 잡염에 염착되는 것이다. 무명에 연유하는 까닭에 그 의심 내는 것에서 정려가 잡염에 염착되는 것이다. 이처럼 번뇌가 그 마음을 염착해서 마침내 색계ㆍ무색계의 번뇌와 수번뇌가 서로 이어져서 유전(流轉)하게 된다.
깨끗한 백업이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청정한 정려와 무색계(無色界)의 정(定)을 가리킨다. 그 성품이 어진 것에 기인해서 깨끗한 백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5권 > 2. 결택분(決擇分) ③ > 107 - 116쪽
K.572(16-157), T.1605(31-663)
[107 / 159] 쪽
건립(建立)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네 종류의 건립이 있으니, 지분건립(支分建立)ㆍ등지(等至)건립ㆍ품류(品類)건립ㆍ명상(名想)건립을 가리킨다.
지분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초정려에 있는 다섯 가지 지분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심(尋)이고, 두 번째가 사(伺)이고, 세 번째가 희(喜)이고, 네 번째가 낙(樂)이고, 다섯 번째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2정려에도 네 가지 지분이 있다.
어떠한 것이 그 네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내등정(內等淨)이고, 두 번째가 희(喜)이고, 세 번째가 낙(樂)이고, 네 번째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3정려에도 다섯 가지 지분이 있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사(捨)이고, 두 번째가 염(念)이고, 세 번째가 정지(正知)이고, 네 번째가 낙(樂)이고, 다섯 번째가 심일경성이다. 제4정려에도 네 가지 지분이 있다.
어떠한 것이 그 네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사청정(捨淸淨)이고, 두 번째가 염청정(念淸淨)이고, 세 번째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고, 네 번째가 심일경성이다. 대치하는 지분이기 때문이고, 이익이 있기 때문이고, 두 가지 소의(所依)의 자체적인 성품이 되는 지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무색계 가운데에는 지분을 세우지 않으니 사마타(奢摩他)가 그 일미(一味)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등지(等至)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일곱 가지 작의(作意)에 연유하여 초정려를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이같이 비상비비상처까지 이르게 된다.
어떠한 것이 일곱 가지 작의라고 이름합니까?
요상작의(了相作意)ㆍ승해작의(勝解作意)ㆍ원리작의(遠離作意)ㆍ섭락작의(攝樂作意)ㆍ관찰작의(觀察作意)ㆍ가행구경작의(加行究竟作意)ㆍ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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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류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초 정려에서 연도(軟道)ㆍ중도(中道)ㆍ상도(上道)의 세 가지 품(品)을 갖추어 훈수(薰修)하는 것을 가리킨다. 초정려와 여타의 정려 및 무색계도 그 세 가지 품의 훈수는 마찬가지이다. 연도품ㆍ중도품ㆍ상도품에 연유해서 초정려를 훈수하기 때문에 초정려 가운데에서 세 가지 이숙과가 다시 생겨난다. 초정려와 그 밖의 정려 가운데에서도 그 훈수하는 것이나 이숙과가 생겨나는 것에 각각 세 가지 품이 있는 것도 이와 같다. 무색계 가운데에는 별도의 처소가 없기 때문에 그 이숙과가 생겨나는 처소의 차별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품에 연유하여 무색정을 훈수하는 까닭에, 그러한 이숙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높거나 낮거나 열등하거나 뛰어난 것이 있게 된다.
명상(名想)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초 정려에 수렴되는 정 가운데의 모든 불세존 및 구경을 성취한 커다란 위덕을 갖춘 보살마하살이 들어가는 삼마지이다. 그러한 삼마지는 일체의 성문이나 독각 등이 그 이름조차 깨닫지 못하기에 어찌 능히 그 중생수(衆生數)를 헤아리고 다시 이를 증득해서 이곳에 들어가게 되겠는가? 초정려에 수렴되는 정 가운데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밖의 정려나 무색계에 수렴되는 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은 모두가 정려바라밀다(靜慮波羅蜜多)에 의거하는 것이다.
청정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초정려 가운데의 변제정(邊際定)에서 비상비비상처의 변제정까지를 청정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출세도란 무엇입니까?
수 도 가운데 있는 법지품(法智品)과 유지품(類智品)에 수렴되는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 및 그에 상응하는 삼마지 등이거나 또는 미지정(未至定)에 수렴되는 것이거나 또는 초정려 내지는 무소유처에 수렴되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에는 오직 이 세간을 밝게 터득하지 못한 상(想)이 언제나 현행하기 때문에 이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무상(無相)이라 이름하더라도,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상삼마발저(有想三摩鉢底)까지는 능히 실답게 비추어 통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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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 진정(滅盡定:滅定)도 또한 출세간에 수렴되는 것이다. 성스러운 도에 연유하여 나중에 증득되기 때문이다. 그 인취(人趣)에서도 능히 인발(引發)될 수 있고 또는 인취에서나 색계에서도 능히 현전할 수 있으나 무색계에 태어나면 그 현전이 발동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적정(寂靜)에 머무는 것에 연유하여 해탈이 이숙되기 때문에, 이 같은 멸정은 흔히 일어나지 않기에 이것
이 방편에 힘써야 하는 까닭이다.
연도란 무엇입니까?
연연품(軟軟品)ㆍ연중품(軟中品)ㆍ연상품(軟上品)의 도를 가리킨다.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능히 삼계에 얽매어진 품지(品地)를 버릴 수가 있으나 품지에도 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의 세 가지 품의 번뇌가 있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중연품(中緣品)ㆍ중중품(中中品)ㆍ중상품(中上品)의 도를 가리킨다.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능히 삼계의 얽매어진 품지를 버릴 수가 있으나 품지에도 상상ㆍ상중ㆍ상하의 세 가지 품의 번뇌가 있다.
상도란 무엇입니까?
상연품(上軟品)ㆍ상중품(上中品)ㆍ상상품(上上品)의 도를 가리킨다.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능히 삼계의 얽매어진 품지를 버릴 수가 있으나 품지에도 연상ㆍ연중ㆍ연연의 세 가지 품의 번뇌가 있다.
가행도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번뇌를 능히 버리는 것을 수도 가운데의 가행도라 이름한다.
무간도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간단없이 번뇌를 영원히 끊어 남기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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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도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를 증득하여 번뇌를 끊는 것에 기인해서 해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승진도란 무엇입니까?
그 밖의 품지의 번뇌를 끊어가는 모든 가행도ㆍ무간도ㆍ해탈도를 승진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번뇌를 끊어가는 가행이나 또는 방편을 강구하여 제법을 사유하는 것이거나 또는 방편을 강구하여 제법에 안정되게 머무르는 것이거나 또는 그 밖의 삼마발저(三摩鉢底)로 나아가 닦게 되는 모든 도를 승진도라 이름한다. 또 승품(勝品)의 공덕을 인발(引發)하는 도를 내포하는 것을 승진도라 이름한다.
다시 어떻게 이 같은 여러 가지 도를 닦게 됩니까?
득 수(得修)ㆍ습수(習修)ㆍ제거수(除去修)ㆍ대치수(對治修)를 가리킨다. 득수란 생기지 않은 선법을 닦아 익혀서 생기도록 하는 것이고, 습수란 이미 생겨난 선법을 닦아서 굳게 머물러 잊지 않고 더욱 늘리고 넓혀 나가는 것이고, 제거수란 이미 생겨난 악한 불선법(不善法)을 닦아서 영원히 끊는 것이고, 대치수란 아직 생기지 않은 악불선법을 닦아서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도가 생겨나기 때문에 자연히 습기(習氣)가 안립되는 것을 득수라 이름하고, 이 같은 도가 현전해서 닦아 익히는 것을 습수라 이름하고, 이 같은 도가 현전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장애를 능히 버리는 것을 제거수라 이름하고, 이 같은 도가 이미 자체적으로 장애를 버려서 법을 미래에 머무르게 하여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을 대치수라 이름한다. 또 네 종류의 대치를 대치수라 이름하니, 바로 염괴대치(厭壞對治)ㆍ단대치(斷對治)ㆍ지대치(持對治)ㆍ원분대치(遠分對治)이다.
염괴대치란 무엇입니까?
유루의 제행에 있어서 허물과 걱정이 많은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다.
단대치란 무엇입니까?
가행도와 무간도를 가리킨다.
지대치란 무엇입니까?
해탈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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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분대치란 무엇입니까?
그 이후의 여러 도를 가리킨다. 또 도의 차별에는 열한 종류가 있으니, 관찰사도(觀察事道)ㆍ근공용도(勤功用道)ㆍ수치정도(修治定道)ㆍ현관방편도(現觀方便道)ㆍ친근현관도(親近現觀道)ㆍ현관도(現觀道)ㆍ청정출리 도(淸淨出離道)ㆍ의근차별도(依根差別道)ㆍ정수삼학도(淨修三學道)ㆍ발제공덕도(發諸功德道)ㆍ변섭제도(遍攝諸道)이다. 이 같은 여러 도는 그 자체에 따라서 37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말하니, 4종정행(種淨行)ㆍ4종법적(種法迹)ㆍ4종사마타(種奢摩他)ㆍ3무루근(無漏根)이다. 여기서 보리분법(菩提分法)은 모두 다섯 가지 문의(門義)에 기인해서 건립하게 된다. 이는 그 소연(所緣)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자체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조반(助伴)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수습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그 수행의 과보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4념주(念住)의 소연이란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가리킨다.
또 4사(事)가 있으니 아소의사(我所依事)ㆍ아수용사(我受用事)ㆍ아자체사(我自體事)ㆍ아염정사(我染淨事)를 가리킨다. 이러한 것의 자체(自體)는 혜(慧)와 염(染)을 가리키고, 그 조반(助伴)은 그것에 상응하는 심ㆍ심소 등이고, 그 수습은 내신 등에 있어서 순신관(循身觀) 등의 관을 닦는 것으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내외에서도 이와 같다. 내신(內身)이란 이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내색처(內色處)이다. 외신(外身)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외색처(外色處)이다. 내외신(內外身)이란 내처에 상응하는 모든 외처가 근에 의지받는 것을 가리킨다. 또 다른 사람의 신체 내에 존재하는 내색처이기도 하다.
‘신체 따위에서 신관(身觀)을 닦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 상신(影像身)과 본질신(本質身)의 평등을 분별하는 것이다. ‘내수(內受)를 관찰한다는 것’이란 내신에 기인하여 생겨난 수(受)를 가리킨다. 외수(外受)란 외신에 기인하여 생겨난 수를 가리킨다. 내외수(內外受)란 내외신(內外身)에 기인하여 생겨난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수심법(受心法)도 이와 같다. 신체에 있어서 순신관을 닦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수(受) 등에 있어서 순신관이나 수신관(受身觀) 등의 관(觀)도 그 대응되는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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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수습에도 욕수습(欲修習)ㆍ근수습(勤修習)ㆍ책수습(策修習)ㆍ여수습(勵修習)ㆍ용맹수습(勇猛修習)ㆍ불식수습(不息修習)ㆍ정념수습(正念修習)ㆍ정지수 습(正知修習) 및 불방일수습(不放逸修習)이 있으니, 이는 수습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욕수습이란 작의(作意)하지 않는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근수습이란 해태(懈怠)의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책수습이란 혼침(昏沈)과 도거(掉擧)의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여수습이란 마음을 비열하게 하는 성품의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용맹수습이란 누(漏)가 있어[所漏] 피곤하게 하는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불식수습이란 약간의 선법을 얻게 되면 곧 만족하는 희(喜)의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정념수습이란 세존의 가르침을 잊게 만드는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정지수습이란 죄를 범하면 곧 후회가 따르는 수번뇌를 대치하는 것이다. 불방일수습이란 모든 선법을 버리
게 하는 액(軶)의 수번뇌를 대치하려는 것이다. 그 수행의 과보란 네 가지의 전도(顚倒)된 취(趣)를 끊고 사제에 들어가기에 신체 따위가 이계(離繫)하는 것이다.
4 정단(正斷)의 소연이란 이생(已生)ㆍ미생(未生)ㆍ소치(所治)ㆍ능치(能治)의 법이다. 이것은 자체적으로 정근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조반은 그것과 상응하는 심ㆍ심소 등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수습은 계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욕(欲)ㆍ책(策)ㆍ여(勵)의 수습이 생겨나 바로 정근하되 마음을 경책하여 마음을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까지 모든 구절은 수(修)의 정근과 그 의지하는 바를 드러낸 것이다. 의지하는 바란 욕(欲)을 가리키는 것이고, 정근이란 책과 여의 수습 따위가 지(止)에 있어서 사상(捨相)의 일어남을 작의(作意)하는 도중에 혼침과 도거를 줄이고자 정근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야 마음을 경책하여 마음을 지키게 된다. 그 수행의 과보는 일체의 소치(所治)를 남김없이 버려서 능대치(能對治)에 있어서 성취하거나 늘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그 수행의 과보라고 이름한다.
4신족(身足)의 소연이란 이미 만위(滿位)를 성취한 정(定)에서 만들어지는 일이다. 이것은 자체적으로 삼마지를 가리키고, 그 조반은 욕과 근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것과 그것에 상응하는 심ㆍ심소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욕삼마지(欲三摩地)란 무엇입니까?
은근한 방편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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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삼마지(勤三摩地)란 무엇입니까?
무간도의 방편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심삼마지(心三摩地)란 무엇입니까?
예전에 삼마지를 닦았던 그 유력(有力)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관삼마지(觀三摩地)란 무엇입니까?
다 른 사람에게 교법을 전해 듣고서 속으로 스스로 간택(簡擇)하는 것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또 욕삼마지(欲三摩地)란 욕(欲:의지)이 생기는 것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근삼마지(勤三摩地)란 책(策)과 여(勵)에 일어나는 정근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심(心)삼마지란 마음이 지속되는 것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관(觀)삼마지란 마음의 경책에 연유해서 접촉되는 심일경성이다. 수행의 과보란 여덟 종류의 번뇌를 끊는 행을 되풀이하여 수습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그 여덟 가지입니까?
욕 (欲)ㆍ정진(精進)ㆍ신(信)ㆍ안(安)ㆍ정념(正念)ㆍ정지(正知)ㆍ사(思)ㆍ사(捨)이다. 이와 같은 여덟 종류를 간략하게 거둬서 가행(加行)ㆍ섭수(攝受)ㆍ계속(繼續)ㆍ대치(對治)라고도 일컫는다. 또 욕(欲)과 근(勤)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인연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원리수(遠離修)와 열등하지도 흩어지는 것도 아닌 그러한 두 가지에 의존하는 수순수(隨順修)를 가리킨다. 이 같은 수행의 과보는 이미 삼마지를 잘 닦아 다스린 까닭에 그 증득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법을 통달하는 것이니 바로 능히 마음을 따라 그 변화[變現]를 통달하는 것이다. 또 온갖 처소의 법 가운데에서 증득을 이루어 자유로운 작용을 감당하게 되기에, 이같이 그 즐겨 원하는 바에 따라 갖가지 신통 등의 일을 능히 처리하고 또 승품의 공덕을 능히 인발하게 된다.
5 근(根)의 소연이란 4성제를 가리킨다. 이것의 자체는 신(信)ㆍ정진(精進)ㆍ염(念)ㆍ정(定)ㆍ혜(慧)이고, 그 조반은 그것에 상응하는 심ㆍ심소 등이고, 그 수습은 모든 진제에서 인가행(忍可行)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진의 수습[修習情進]이란 근본을 진제에 두고 인가가 생겨나 깨닫고자 정진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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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근의 수습[修習念根]은 모든 진제에 있어서 정진을 발휘하여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잡아매어 그 행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정근의 수습[修習定勤]이란 모든 진제에 있어서 이미 생각을 매어 두고서 심일경성의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혜근의 수습[修習慧根]이란 모든 진제에 있어서 그 마음이 이미 정을 얻었기에 간택하는 행을 일으켜 수습하는 것이다. 그 수행의 과보는 진제의 현관을 속히 발명할 수 있는 것이니, 아울러 난법과 정법을 닦아 다스려서 세제일법의 인(忍)을 인발시키는 것이다. 5근과 5력(力)도 이와 같다. 차별이란 이로부터 능히 그 소대치(所對治)의 장애를 줄이는 것으로 비록 줄이기는 하되 굴복시키지 못하는 까닭에 유력(有力)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7각지(覺支) 의 소연이란 4성제의 실다운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의 자체는 염(念)ㆍ택법(擇法)ㆍ정진(精進)ㆍ희(喜)ㆍ안(安)ㆍ정(定)ㆍ사(捨)이다. 여기서 염은 소의지(所依支)에 해당하고 택법은 자체지(自體支)에 해당하고, 정지는 출리지(出離支)에 해당하고, 희는 이익지(利益支)에 해당하고, 안ㆍ정ㆍ사는 불염오지(不染汚支)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염오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불염오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이 같은 불염오를 바탕삼기 때문이다. 그 조반은 그것과 상응하는 심ㆍ심소 등을 가리키고, 그 수습은 원리에 의지하는 것이고, 무욕(無欲)에 의지하는 것이고, 적멸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키기에, 마침내 그 버리는 것을 회향하여 염각지를 닦게 된다. 염각지의 경우에서처럼 사각지(捨覺支)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다. 이처럼 네 구의 차제를 드러내 보이는 것에서 사제의 경(境)을 연(緣)하여 각지(覺支)를 수습하게 된다. 그 수행의 과보는 견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영원히 끊는 것을 가리킨다.
8 성도지(聖道支)의 소연이란 바로 이 다음 때에서 4성제의 실다운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의 자체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이다. 여기서 정견은 분별지(分別支)에 해당하고, 정사유는 회시타지(誨時他支)에 해당하고, 정어ㆍ정업ㆍ정명은 영시타지(令示他支)에 해당하는 것이니, 바로 계율로 인해서[見戒] 그 명(命)이 청정해지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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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정진은 정번뇌장지(淨煩惱障支)에 해당하고, 정념은 정수번뇌장지(淨隨煩惱障支)에 해당하고, 정정은 능정최승공덕장지(能淨最勝功德障支)에 해당한다. 그 조반은 그것에 상응하는 심ㆍ심소 등을 가리킨다. 그 수습은 각지(覺支)에서 설명한 그대로이지만 그 수행의 과보는 분별하는 것이며, 남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신심 내게 하는 것이며, 번뇌장(煩惱障)을 깨끗이 하는 것이며, 수번뇌장(隨煩惱障)을 깨끗이 하는 것이며, 최승공덕장(最勝功德障)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4종 정행(正行)이란 고지통행(苦遲通行:힘들고 더디게 깨치는 행)ㆍ고속통행(苦速通行:힘들지만 빨리 깨치는 행)ㆍ낙지통행(樂遲通行:즐겁지만 더디게 깨치는 행)ㆍ낙속통행(樂速通行:즐겁고도 빨리 깨치는 행)을 가리킨다. 첫 번째는 둔근기(鈍根機)가 근본정려(根本靜慮)를 얻지 못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이근기(利根機)가 근본정려를 얻지 못한 것이고, 세 번째는 둔근기가 근본정려를 이미 얻은 것이고, 네 번째는 이근기가 근본정려를 이미 얻은 것이다. 4종 법적(法迹)이란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을 가리킨다. 무탐과 무진은 계학(戒學)을 능히 증상시켜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정념은 심학(心學)을 능히 증상시켜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정정은 혜학(慧學)을 능히 증상시켜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 머물게 하되 평등하게 머물게 하고 안정되게 머물게 하고 가까이 머물게 해서[近住] 적정에 따르되, 그 적정이 지극하도록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專注一趣] 평등하게 거두어 지속시키는 것이다. 비발사나(毘鉢舍那:觀)는 제법을 간택하되 그 간택이 지극하도록 널리 심사(尋思)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추중(麤重)의 상결(相結)을 대치하려 하기 때문이고, 모든 전도된 것을 조복시키려 하기 때문이고, 전도되지 않은 마음을 잘 안주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 사마타(奢摩他:止ㆍ定)와 비발사나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도를 세우게 된다. 어떤 종류는 이미 사마타를 얻었으나 비발사나가 아닌 것이기에 이 같은 유는 사마타에 의지하여 비발사나를 닦아 나가게 된다. 또 어떤 종류는 비발사나를 이미 얻었으나 사마타가 아닌 것이기에 이 같은 종류는 비발사나에 의지하여 사마타를 닦아 나가게 된다. 또 어떤 종류는 사마타도 얻지 못하였고 또 비발사나도 아닌 것이기에 이 같은 종류는 마음을 모아 혼침ㆍ도거를 조복시키는 두 가지 도를
함께 닦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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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종류는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이미 얻었기에 이 같은 종류는 사마타의 비발사나의 두 가지 도가 화합하여 평등하게 함께 전향[轉]한다. 3근(根)이란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을 가리킨다.
미지당지근이란 무엇입니까?
가행도나 견도의 열다섯 가지 찰나심(刹那心) 사이에 있는 모든 근(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지근이란 무엇입니까?
제16견도위(見道位)의 찰나심 이상인 일체의 유학도(有學道) 가운데 있는 모든 근을 가리킨다.
구지근이란 무엇입니까?
무 학도에 있는 모든 근을 가리킨다. 초정려지(初靜慮地)가 드러나는 것에 의지하여 수도하는 때에 역시 욕계의 계(繫)를 닦는 모든 선근이, 그곳에서 자유로움을 얻기 때문이다. 초정려지에 의지해서 욕계의 선근을 닦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일체의 상지(上地)가 나투는 것에 의지하여 수도하는 때에는 모두 하계(下界)와 하지(下地)의 모든 선근을 능히 수습하게 되기에 그것들이 자유로움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구경도(究竟道)입니까?
금 강유정(金剛喩定)에 의지하여 일체의 추중을 영원히 그치게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계(繫)를 영원히 끊어 버리기 때문이고, 일체의 계득(繫得)을 여의는 것을 영원히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차제가 무간도에서 전의(轉依)하여 진지(眞智)와 무생지(無生智)를 증득하는 열 가지 무학법(無學法) 등에 해당된다.
어떠한 것이 그 열 가지입니까?
무학의 정견(正見) 내지는 무학의 정정(正定), 무학의 정해탈(正解脫), 무학의 정지(正智)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이 같은 법을 구경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5권 > 2. 결택분(決擇分) ③ > 117 - 126쪽
K.572(16-157), T.1605(3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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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리켜 일체의 추중이라 이름합니까?
간 략하게 설명하면 스물네 종류가 있으니, 일체변행희론추중(一切遍行戱論麤重)ㆍ영수(領受)추중ㆍ번뇌(煩惱)추중ㆍ업(業)추중ㆍ이숙장(異熟障)추중ㆍ개(蓋)추중ㆍ심사(尋思)추중ㆍ음 식(飮食)추중ㆍ교회(交會)추중ㆍ몽(夢)추중ㆍ병(病)추중ㆍ노(老)추중ㆍ사(捨)추중ㆍ노권(勞倦)추중ㆍ견고(堅固)추중ㆍ추(麤)추중ㆍ중 (重)추중ㆍ세(細)추중ㆍ번뇌장(煩惱障)추중ㆍ정장(定障)추중ㆍ소지장(所知障)추중을 가리킨다.
계득(繫得)이란 무엇입니까?
추중이 쌓여 모이는 것에서 계득의 성품을 가립(假立)하는 것을 가리킨다.
계득을 여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추중이 흩어지는 것에서 계득을 여의는 성품을 가립한다.
금강유정이란 무엇입니까?
수 도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결(結)을 끊는 도위(道位)에 있는 삼마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행도에 수렴되거나 무간도에 수렴된다. 가행도에 수렴된다는 것은 이미 제거한 것이 있어서 비록 일체 장애에 방해받지 않더라도 일체의 장애를 능히 깨뜨리는 것이고, 무간도에 수렴된다는 것은 이 같은 무간도에서 진지한 무생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또 이 같은 삼마지에서 그 무간도가 견고하여 그 일미(一味:한결같은 법미)가 두루 가득한 것이다. 이 같은 이치를 보여 주시고자 박가범께서는 “커다란 돌산이 떨어져 나간 부분도 없고 틈새도 없고 구멍난 곳도 없이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처럼, 지극한 선이 시방에 원만하여 거센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가리켜 무간도에서 전의한다고 이름합니까?
이미 무학도를 증득한 이에게 세 종류의 전의(轉依)가 있다.
어떠한 것이 그 세 가지입니까?
심전의(心轉依)ㆍ도(道)전의ㆍ추중(麤重)전의를 가리킨다.
진지란 무엇입니까?
이미 소진된 것에 연유해서 얻게 되는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소진된 것을 연하여 경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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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지란 무엇입니까?
과 보가 끊어지게 된 것에 기인하여 얻게 되는 지혜이니 과보가 생기지 않은 것을 연하여 경을 삼는다. 열 가지 무학법은 무학의 계온(戒蘊)ㆍ정온(定蘊)ㆍ혜온(慧蘊)ㆍ해탈온(解脫蘊)ㆍ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에 의거해서 설명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이같이 도제에는 총괄적으로 네 종류 행상의 차별이 있으니, 도상(道相)ㆍ여상(如相)ㆍ행상(行相)ㆍ출상(出相)을 가리킨다.
도상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진실한 이치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여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번뇌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행상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전도되지 않도록 잘 주석하기 때문이다.
출상이란 무엇입니까?
진실되어 상주하는 자취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여러 진제 가운데 있는 열여섯 가지 행상은 모두가 세간과 출세간에 통하는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
그 소지경에 처해서 어질지 못하게 깨달아 들어가거나 어질게 깨달아 들어가는 그러한 성품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장애가 있고 장애가 없는 그러한 성품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유분별(有分別)과 무분별(無分別)한 성품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진제 가운데 있는 무상과 고 등의 열여섯 가지 세간의 행상은 진여의 성품을 잘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번뇌와 소수면(所隨眠)이기 때문이고, 명자와 언설의 문(門)에 의지하여 희론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행상은 이것들과 상반된다. 출세간의 행상이 현전하는 때에 비록 다시 현증(現證)하여 무상의 이치를 인견하더라도 명자와 언설로 희론하는 문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 같은 무상의 이치를 인견하는 것에서 무상의 행상이 무상한 이치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밖의 행상도 그 밖의 이치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이 같음을 숙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