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2권 > 4. 사품(使品) > 39 - 48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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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심론 제2권
법승 지음
승가제바ㆍ혜원 공역
김 재천 번역
4. 사품(使品)
이미 모든 업에 대하여 설명했으니, 이제 모든 번뇌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일체 존재[有]의 근본이니
업과 짝하여 온갖 고[百苦]를 낳는다.
아흔여덟 가지 사(使)는
문니(文尼, muni)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비유하면 원수를 알지 못하면 곧 해를 받는 것과 같으니, 만약 알면 곧 [원수의 곁에서] 멀리 떠날 수 있다. 모든 번뇌도 역시 그러하여 마치 원한 있는 집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문] 어떻게 아는가?
[답] 일체의 번뇌의 부류[使品]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견제(見諦)에서 끊어야 할 종류와
또한 사유(思惟)로 끊어야 할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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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번뇌가 있으면 모두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하거나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한다. 말하자면 견도를 따르는 것은 곧 견도에서 끊어야 하고 사유도를 따르는 것은 곧 사유로 끊어야 한다.
그 중에서 스물여덟 가지 번뇌는
고제(苦諦)를 봄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니,
이른바 장차 고(苦)를 깨달을 때에는
단멸하고 다하여 하나도 남음이 없다.
견습(見習)에서 끊어야 할 것이 열아홉이고
멸도도 그와 같다고 알아야 하며,
세 가지를 더한 것1)은 견도에서 끊어지고
열 가지는 사유로써 그친다.
이것이 말하자면 98가지 사(使)로서 이미 설명하였다. 종(種)과 계(界)를 이제 설명하겠다.
제1번뇌의 씨앗이
욕(欲)에 있음을 알아야 하니 그 종류는 열 가지이다.
두 가지는 각각 일곱 가지가 있고
나머지 여덟은 견도에서 끊어야 한다.
욕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
이 네 가지는 곧 사유로써 끊어야 한다.
나머지 두 계(界)에 대해서도
또한 분별해야만 한다.
1) 곧, 스물두 가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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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 이 네 가지는 사유로써 끊어야 한다’고 함은 이 서른여섯 가지 사는 욕계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계에 대해서도 또한 분별해야만 한다’고 함은 나머지 62가지 사 가운데 31가지는 색계에 매여 있고 31가지는 무색계에 매여 있음을 말한다.
이미 계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사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수변견(受邊見)과 사견(邪見)과
그리고 5아견(我見)과
두 가지 도(盜)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번뇌를 견이라고 말한다.
인(因)을 좇아 상속(相續)하기 때문에 모든 법성을 알지 못하나니, 그 중에는 혹은 항상한 모양[常相]이 있고 혹은 끊어지는 모습[斷相]이 있다. 단과 상은 바로 두 가지 치우침[邊]이라는 것이 세존의 말씀이다. 그중에서 만약 견해의 한 쪽만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을 수변견(受邊見)2)이라고 한다. 진실한 뜻을 비방한다면, 이런 견해는 바로 사견(邪見))이다. 만약에 유정의 인식작용[識類]에 대하여 어리석은 이가 그에 대하여 나라고 계교한다면 이를 일컬어 신견(身見)3)이라고 한다. 유루법을 제일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견해는 바로 견도(見盜)4)이고 인(因)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본다면 이런 견해는 바로 계도(戒盜)5)이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곧 지혜의 성품[慧性]이니 그러므로 견이라고 한다.
욕(欲)과 유예(猶豫)와 진에(瞋恚)와
만(慢)과 치(癡)는 견(見)이 아니라고 말하니,
2) 변견이란 세간의 단멸과 영원성을 주장하는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말한다.
3) 범어로는 satkāya-dṛṣṭi. 유신견을 말한다.
4) 범어로는 ḍṛṣṭi-parāmarśa. 유루법을 가장 청정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견취(見取)라고도 한다.
5) 범어로는 śilavrataparāmarśa. 유루행을 생천의 인이 된다고 보고 계착하는 견해이다. 계취(戒取)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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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界)의 차별 때문에
옮겨 변하므로 종종의 이름이 생긴다.
‘욕과 유예와 진에와 만과 치는 견이 아니다’고 함에서, 욕(欲)은 애(愛)의 염(念)ㆍ상(想)ㆍ사(思)로서 모든 행 가운데서 즐겨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유예는 앞의 소견과 같은 것을 혹시 하면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진에는 짓는 모양이 달라서 분노하는 것을 말한다. 만은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을 말하며, 치는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견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모든 번뇌라고 한다.
‘이 계의 차별 때문에 옮겨 가며 변하므로 종종의 이름이 생긴다’고 함은 이 열 가지 번뇌는 혹은 고(苦)를 따라서 행하고, 혹은 습(習)을 따르거나 혹은 멸(滅)을 따르거나 혹은 도(道)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 만약 고를 따라서 행한다면 이것은 고를 보아 끊는[見苦斷] 것이며, 마찬가지로 도에까지 이르며, 나머지는 사유로써 끊는다.
아래세계는 온갖 것에 다 괴롭고
세 가지 견(見)을 떠나 나머지는 두 가지로 행한다.
도로써 두 가지 견을 제거하며
상계(上界)에서는 에(恚)를 행하지 않는다.
‘아래세계는 온갖 것에 다 괴롭다’고 함에서 아래세계의 고는 욕계의 고를 말하는데, 그중에서 열 가지 번뇌를 모두 다 행한다는 것이다. 범부로서 어리석은 이는 욕계의 고에서 인을 잘 알지 못해서 끊어짐을 보고[見斷], 과를 잘 알지 못해서 항상함을 본다[見常]. 과를 비방하고 고를 비방하여 삿되게 보고, 고를 제일로 받아들여 견도(見盜)하며, 법을 법에서 말하고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생각하여 계도(戒盜)한다. 자신의 견해만을 좋아하고 다른 이의 견해에 대하여는 성을 내며, 견해를 좇거나 혹은 스스로의 견해를 따라서 거만해지고 잘 알지 못하며 밝지 못하다[無明].
‘세 가지 견을 떠나 나머지는 두 가지로 행한다’고 함은 습(習)과 멸(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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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각각 일곱 가지로 행한다는 것이다. 신견(身見)은 나타나는 5음(陰)에서 행한다. 습이란 미세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며, 멸도 역시 이와 같다. 수변견도 역시 현재에서 행한다. 계도는 계(界)에서 행하는데, 그것도 역시 습ㆍ멸이 아니다.
‘도제[道]로는 두 가지 견을 제거한다’고 했는데, 신견과 변견(邊見)은 도제에서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유루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계도는 도제에서 행한다. 도제와 비슷하기 때문에 마지막 경지에 다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도(正道)를 보지 못한다.
‘위 세계에서는 성냄[恚]을 행하지 않는다’고 함은 욕계의 분별과 같이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 에를 제거할 때에 그 중에는 성냄이 없고 생각[意]은 그쳐 부드럽기 때문이다.
모든 견과 의(疑)는 사유로써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머지 욕계의 네 가지는 사유로써 끊어지나니 색계는 셋, 무색계는 둘이다.
[문] 어떻게 그것은 경계(境界)를 연(緣)하는가?
[답]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괴로움의 원인인
의(疑)와 견(見)과 무명은
온갖 종류의 사(使)로서
하나의 지(地) 중에 즐겨 존재한다.
고제를 보아 끊는 종류와 습(習)을 보아 끊어지는 의와 견과 무명이라는 이 번뇌는 두루 존재해 있고 일체의 다섯 종류는 자신의 경지에서 행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유루법은 바로 고ㆍ습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문] 왜 자신의 지에서 행하고 다른 지에서는 행하지 않는가?
[답] 경계가 아니므로 위의 세계[上]에서는 행하지 않는다. 욕탐을 여의었기 때문에 아래의 세계[下]에서는 행해지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욕계의 열한 가지로서 일체에 두루하는 번뇌[一切遍使]라고 한다.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는 일체에 두루한 것이 아니니, 자신의 종(種)을 경계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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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번뇌 다섯 가지와
네 가지로서 두 번째 것은
상계(上界)를 경계로 한다는 것은
미리혜(未離慧)의 말씀이다.
욕계에서 고제를 보아 끊어지는 사견(邪見)은 색계ㆍ무색계의 고제를 비방한다. 견도(見盜)는 제일이라고 받아들이고, 계도(戒盜)는 해탈의 방편이라고 받아들이니, 의심하고 미혹하며 밝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습으로 끊어지는 사견은 색계ㆍ무색계의 인을 비방하고, 견도는 인에 대하여 제일이라고 받아들이니, 의심하고 미혹하며 밝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색계ㆍ무색계의 일체의 경지[地]에서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사(邪)와 의(疑)가 함께 생겨나거나
함께 생겨나지 않는 무명[不共無明]은
식지(息止)와 도제[道]의 두 가지로 끊으면
무루연이 됨을 알아야 한다.
멸제를 보아 끊는 사견은 멸제를 비방한다. 이것은 멸을 연(緣)하기 때문에 무루연이다. 이와 같이 멸제에 대하여 의혹하고,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은 무루연이다. 마찬가지로 멸제를 보아 끊어지는, 함께 하지 않는 무명은 말하자면 열반을 바라지 않지만, 그것 역시 무루연이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 열여덟 가지 사(使)는 무루연이다.
[문] 왜 유루인 종류[種]는 모든 사에 묶이는가?
[답] 만약 어떤 종류가 욕계에 있으면
일체의 두루하는 번뇌[使]이고
자기 경지[地]를 속박됨을 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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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계[界]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일체의 두루하는 번뇌는 자기의 경지[地]에서 일체의 종류를 연하여 부림을 당한다.
그 나머지 모든 결사(結使)6)는
자신의 종류가 연이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계(界)에서 부림을 당하며
그리고 이는 상응하는 부류[相應品]이다.
‘그 나머지 모든 결사는 자신의 종을 연하여 자신의 계를 묶는다’고 함은 일체의 두루하지 않는 번뇌는 스스로 종(種) 중에서 모든 법을 연한다는 것, 곧 그것을 묶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응하는 부류이다’고 함은 일체에 두루한 것과 일체에 두루하지 않은 것이 일체의 자신의 부류[自品] 가운데에 상응하며 부림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무루의 소행(所行)과
타지를 연하는 번뇌라면
이는 상응하여 부림을 당한다.
경계를 해탈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루의 소행과 타지를 연하는 번뇌라면 이는 상응하여 부림을 당한다’고 함은 만약 사(使)가 무루를 연하고 위의 경지[地]를 연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품에서 상응하여 부림을 당하는 것이지, 사에 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경계를 해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는 경계를 반
6) 결(結, saṃyojana)은 ‘얽어 매임’을, 사(使, anuśaya)는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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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지 않는다. 무루의 모든 법은 일체 번뇌를 해탈하고, 위 경지의 모든 법은 아래 경지의 번뇌를 해탈한다.
[문] 이러한 사는 마땅히 불선(不善)이라고 해야 하는가, 무기라고 해야 하는가?
[답] 기신견(己身見)7)과 변견(邊見)8)과
이들에 상응하는 무명이 있으니
이것은 욕계 안에서는 무기이며
색계ㆍ무색계도 일체가 (그러하다).
‘기신견과 변견과 이들에 상응하는 무명이 있으니 이것은 욕계 안에서는 무기이다’고 함은 욕계의 신견과 변견, 그리고 상응하는 무명은 바로 무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기신견은 자주 행하는데 만약 선하지 못한 일을 하면 욕계의 중생은 마땅히 즐거움이 없으니 많은 불선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만약 선하지 못하면 복(福)과 서로 어긋나나니, 이 가운데서 아(我)ㆍ인(人)을 헤아리고 복을 행하여 자신[我]으로 하여금 낙을 얻게 한다. 선하지 못한 것이란 선과는 다른 것이니, 그러므로 신견은 불선이 아니다.
단견(斷見)이란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것으로 생사를 싫어하지만 이것도 역시 선하지 못한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불선이 아니다. 유상견(有常見)도 역시 선과 다르지 않다. 마치 신견과 같아서 불선이 아니다. 나머지 욕계의 번뇌는 오로지 불선이다.
‘색계ㆍ무색계도 일체가 (그러하다)’고 함은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는 모두 무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정수(正受)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선이면 괴로움의 과보를 받으나 그 안에서는 괴로움의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문] 일체의 번뇌는 다 모두 자신이 소유하는 경계를 묶는가, 아닌가?
7) 유신견(有身見, satkāya-dṛṣṭi)을 말한다.
8) 범어로는 antagrāha-dṛṣṭi. ‘끝이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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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탐욕과 진에와 만(慢)은
혹은 과거의 얽매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래는 일체를 받고
나머지 2세(世)는 모두 받는다.
‘탐욕과 진에와 만은 혹은 과거의 얽매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과거의 애(愛)ㆍ에ㆍ만은 반드시 앞의 모든 자신의 경계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애는 앞의 일체의 법 가운데서 일어날 수 없으니,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래는 일체를 받는다’고 함은 말하자면 미래의 애ㆍ에ㆍ만은 일체의 유루법을 묶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유루를 연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세는 모두 받는다’고 함은 견ㆍ의(疑), 그리고 무명은 모두 일체법을 연하므로 과거ㆍ미래의 모든 유루법을 묶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는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자가 자상(自相)9)을 받으면, 그것은 마땅히 과거와 같이 말해야 한다.
이미 여러 사의 경계를 설명했으니 이제 순서를 설명하겠다.
이것은 차례로 전전하여 생하는 것이니
자신의 경지[地]는 자신의 경지에서다.
위의 경지에서는 또한 아래의 경지를 생하나니
이 일은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차례로 전전하여 생하는 것이니 자신의 경지는 자신의 경지에서다’고 함은 일체의 번뇌는 자기 경지의 번뇌에서 차례로 연하여 하나하나 차례대로 일체를 생겨나게 함을 말한다.
‘위의 경지에서는 또한 아래의 경지를 생하나니 이 일은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함은 범천 위에서 목숨이 끝나면 차례로 욕계의 일체를 생하는데, 만
9) 애ㆍ에ㆍ만을 자상번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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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그 중에서 더러운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면 이 중에서 오로지 더러운 마음이 상속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경지가 이와 같다.
이미 여러 사의 제 모습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번뇌를 세존께서 교화(敎化)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으니, 이제 분별하겠다.
[문] 세존께서 일곱 가지 사(使)를 말씀하셨으니, 욕애ㆍ에ㆍ유애ㆍ만ㆍ견ㆍ의ㆍ무명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답] 욕계에 다섯 가지 탐욕이 있으니
이를 욕애사(欲愛使)라고 한다.
색계ㆍ무색계도 위에서와 같이
유애(有愛)라고 분별해야 한다.
‘욕계에 다섯 가지 탐욕이 있으니 이를 욕애사라고 한다’고 함은 견고ㆍ습(習)ㆍ멸ㆍ도ㆍ사유로써 끊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색계ㆍ무색계도 위에서와 같이 유애라고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함은 색계의 애는 다섯 종류이고,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에는 곧 에사(恚使)로서
다섯 종류인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교만과 무명은
열다섯 가지로서 삼계에 존재한다.
‘에는 곧 에사로서 다섯 종류인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함은 진에(瞋恚)도 역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라는 것이다.
‘교만과 무명은 열다섯 가지로서 삼계에 존재한다’고 함은 만(慢)은 욕계에 다섯 가지, 색계에 다섯 가지, 무색계에 다섯 가지이고, 무명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견사(見使)는 서른여섯 가지로서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2권 > 4. 사품(使品) > 49 -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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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삼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의사(疑使)는 열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다.
‘견사는 서른여섯 가지로서 널리 삼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고 함은 욕계에 열두 가지의 견이 있으니 견고로 끊어야 할 것 다섯과 견습으로 끊어야 할 둘과 견멸로 끊어야 할 둘10)과 견도로 끊어야 할 셋11)을 말한다.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의사는 열두 가지가 있다’고 함은 욕계에 네 가지가 있으니 견고ㆍ습ㆍ멸ㆍ도로써 끊는 것이다.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에서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함은 이러한 번뇌를 액(扼)ㆍ수(受)ㆍ유(流)ㆍ누(漏)라고 한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인가?
[답] 액박(扼縛)과 수와 유
그리고 누는 모두가 무궁하며,
모든 액과 수와 유의 번뇌
이것을 누라고 한다.
일체 중생을 묶으므로 액이라고 하고, 생(生)과 구(具)12)를 받으므로 수(受)라고 한다. 일체의 중생을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므로 유(流)라고 한다. 일체가 한없이 새므로 누(漏)라고 한다.
이미 갖가지 모습을 설명했으니 이제 상응하는 근(根)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모든 사(使)는 삼계에 있으면서
10) 둘이란 모두 사견ㆍ견도를 말한다.
11) 사견ㆍ견도ㆍ계도의 셋을 말한다.
12) 여기에서는 감관(indriya)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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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호근(護根)과 상응한다.
경지[地]에 따라 모든 근과 사가
상응하는 것은 색신(色身)에서이다.
‘모든 사는 삼계에 있고 모두 호근과 상응한다’고 함은 98가지 사는 일체가 다 호근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모든 번뇌는 나중에 구함이 없는 것에 의존하여 그친다.
‘경지에 따라 모든 근과 사가 상응하는 것은 색유(色有)13)에서이다’고 함은 범천과 광요(光曜)에는 희근(喜根)이 있고, 그 지(地)의 모든 사는 희근에 상응하고 아울러 호근에 (상응한다). 그리고 변정(遍淨)에는 낙근(樂根)이 있고, 그 지의 모든 사는 낙근에 상응하고 아울러 호근에 (상응한다).
사견과 무명은
욕계 중에 낙과 고이다.
진에와 의는 오직 고이고
나머지는 오로지 낙이다.
‘사견과 무명은 욕계 중에 낙과 고이다’고 함은 욕계의 사견과 무명은 낙근에도 상응하고 아울러 고근에도 (상응한다는) 것이다. 사견이란 악업을 짓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맑은 업을 [짓는 것을] 근심한다.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도 역시 그러하다.
‘진에와 의는 오직 고이다’고 함은 의는 근심과 슬픔을 근본으로 하는데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에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는 오로지 낙이다’고 함은 욕계의 나머지 사는 오로지 낙과 상응하므로 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환희를 근본으로 한다.
두 가지 훈(勳)은 몸에 견고하게 붙어 있고
13) 앞의 게송에서는 색신(色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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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단(見斷)인 것은 오직 의에 상응한다.
욕계의 모든 번뇌는
이러한 근과 서로 호응한다.
‘두 가지 훈은 견고하게 붙어 있다’고 함에서 (훈이란) 모든 번뇌를 사유로 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느낌[身痛]과 상응하며 마음의 느낌[心痛]과도 (상응한다). 그중에서 신통은 낙근과 고근이다. 심통은 희근과 우근이다. 호근과 함께 하는 모든 신통은 사유로 끊으니, 의(意)가 함께 한다.
‘견단인 것은 오직 의와 상응한다’고 함은 견제(見諦)로 끊어야 할 번뇌[結]로서 오직 뜻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욕계의 모든 번뇌는 이러한 근과 서로 호응한다’고 함은 욕계의 모든 번뇌를 말한다.
이미 상응하는 근에 대하여 분별하였으니 이제 상번뇌(上煩惱)14)를 설명하겠다.
무참(無慙)과 무괴(無愧)
수(睡)와 회(悔) 그리고 간(慳)
질(嫉)과 도(掉)와 면(眠)은 번뇌가 왕성하니
그러므로 상번뇌라고 한다.
이 여덟 가지 일을 상번뇌라고 말한다. 모든 사(使)는 번뇌이다. 그중에서 위의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 중에서 따라서 일어난다. 이것들은 사의 티끌[垢]로서 사에 의존한다.
[문] 무엇이 사의 티끌인가?
[답] 일체의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은
수(睡)와 도(掉)라고 말한다.
14) 범어로는 upakleśa. 근본번뇌에 의해 일어나는 이차적 종속 번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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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은 불선(不善)과 함께 하고
무괴도 역시 그러하다.
‘일체의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은 수와 도라고 말한다’고 함에서, 도(掉)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 번뇌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수(睡)는 마음이 잠기는 것을 이름하지만 그것도 역시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 마음이 잠김으로써 다시 번뇌를 생하기 때문이다.
‘무참은 불선과 함께 하고, 무괴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에서, 무참은 악을 행할 때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고, 무괴는 자신이 악을 싫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번뇌는 오로지 불선과 상응하므로 무기가 아니다.
소위 고(苦)가 마음에 있는 것은
회(悔)이니 사유(思惟)로써 끊어야만 하고
면(眠)은 오직 욕의(欲意)에 있으며
나머지는 각자 건립한다.
‘소위 고가 마음에 있는 것은 회이니 사유로써 끊어야만 한다’고 함에서, 회(悔)는 선과 악을 지으면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후회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희(喜)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 때문에 오로지 고와 상응한다. 이것은 마음[意]의 우근(憂根)과 상응하고, 악행으로부터 생하므로 사유로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와 상응하므로 이는 욕계임을 알아야 한다.
‘면은 오직 욕의에 있다’고 함에서, 면(眠)은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면이라고 한다. 이는 오로지 욕계로서 의지(意地)에 있는 것이니 그것은 욕계에서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 모든 번뇌는 마음이 닫혀 있을 때[眠時]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각자 건립한다’고 함에서, 나머지란 이른바 두 개의 상번뇌인 질과 간을 말한다. 질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보고 열을 내는 것을 말하며 간은 지키고 아끼고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두 스스로 건립되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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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는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문] 모든 번뇌는 몇 가지의 식(識)과 상응하는가?
[답] 욕과 진에와 무명은
6식(識)에 의존함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욕의 사유단이다.
색 중에서는 얻게 되는 것을 따른다.
‘욕과 진에와 무명은 6식에 의존함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욕의 사유단이다’고 함은, 욕계의 사유로써 끊는 애ㆍ에ㆍ무명이 6식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색 중에서는 얻게 되는 것을 따른다’고 함은, 애ㆍ무명의 색계는 얻어지는 바에 따른다는 것이다. 범천 위에는 네 가지 식(識)15)이 있다. 그 중에서는 이들 두 번뇌는 네 가지 식과 상응한다. 나머지 번뇌는 의식 중에 있다.
이미 모든 번뇌를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끊는 방법을 설명하겠다.
일시에 번뇌를 끊고
그 중에서 해탈한다.
무량시(無量時)에 얻게 됨은
바른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일시에 번뇌를 끊고, 그 중에서 해탈한다’고 함은 이 번뇌는 무애도(無礙道)로써 일시에 끊으니, 이미 끊어 다시 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량시에 얻게 됨은 바른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이러한 멸진을 얻는 일[得盡]은 자주 있다는 것이다. 즉 욕계 견단(見斷)의 다섯 가지 때가 있으니 자신과 네 사문과(沙門果)에서 번뇌가 다하는 깨달음[盡證]을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체는「현성품(賢聖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15) 안식ㆍ이식ㆍ신식ㆍ의식의 넷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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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에서의 해탈을
성인은 네 가지 단지(斷智)라고 말씀하셨다.
색계ㆍ무색계를 떠나는 것은
다섯 가지 단지라고 알아야 한다.
영원히 다하여 나머지가 없다면 그것을 일컬어 단지라고 한다. 그 중에서 욕계의 견고와 견습으로 끊는 것으로써 무여해탈(無餘解脫)을 다 얻으면, 이는 첫 번째 단지이다. 멸제를 보아 끊는 것은 두 번째, 도제를 보아 끊는 것은 세 번째, 사유로써 끊는 것은 네 번째이다. 색계ㆍ무색계의 고제ㆍ습을 보아 끊는 것은 첫 번째 단지이고, 멸제를 보아 끊는 것은 두 번째, 도제를 보아 끊는 것은 세 번째, 색계의 사유로써 끊는 것은 네 번째, 무색계의 사유로써 끊는 것은 다섯 번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단(斷)을 단지라고 하는가?
[답] 지혜의 과보이기 때문에 단지라고 한다. 구담(瞿曇, Gautama)이라는 성(姓) 중에 태어나면 역시 구담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문] 이 모든 사(使)는 마음과 상응하는가, 상응하지 않는가?
[답] 상응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心]은 사번뇌(使煩惱)이니
장애가 되므로 정(淨)과는 다르다.
모든 묘선(妙善)은 얻을 수 있나니
상응하는 번뇌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사번뇌이다’고 함은 만약 사가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음을 번민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마음을 번민하게 한다면 그 때문에 상응이라는 것이다.
‘장애’라고 함은, 만약 사가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모든 선법(善法)을 장애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장애한다면 선법이 생겨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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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인데, 장애하지 않는 사가 생하기에 따라서 서로 호응한다는 것이다.
‘정과는 다르니, 모든 묘선은 얻을 수 있다’고 함은 만약 사가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선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만약 선과 다르지 않다면 선한 마음도 또한 마땅히 생할 것이며, 만약 다르지 않으면 이는 번뇌의 성질이 아니니, 또한 마땅히 근심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다르다면 항상 서로 따라서 선을 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로 따르지 않으면 곧 [번뇌는] 선을 생한다. 이러한 일로 인하기 때문에 이는 서로 호응하는 사인 것이다.
5. 현성품(賢聖品)
이미「사품」을 설명하였으니, 이제부터는「현성품」을 설명하겠다.
이와 같이 성인은 번뇌[勞]와
수많은 공포의 근본을 끊는다.
등방편정지(等方便正智)를
이제 설명하겠으니 잘 들으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산란한 자는 정견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 자신의 처소에서
마음을 묶어 안정되게 하고
또한 식족(識足)을 묶으려 노력하고
번뇌라는 원적[怨]을 다한다.
이들 방편은 몸에 대하여
진실한 모습은 항상 결정된 것이다.
모든 통(痛)과 이 마음과
법도 또한 이와 같이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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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부정한 모습[不淨相]ㆍ무상한 모습[無常相]ㆍ괴로운 모습[苦相]ㆍ무아의 모습[無我相]이니, 이 모습은 결정코 진실하다. 그는 자신의 한곳에 마음을 묶어 마음의 산란함을 여의어야 비로소 진실로 몸의 모습을 관하게 된다. 다음에 통을 관찰한 뒤에 마음과 그것에 수반하고 의지하는 것과 그것에 상응하는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을 관찰하며, 또한 모든 심불상응행도 관찰한다. 그 본성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하여 신(身)ㆍ통(身)ㆍ심(心)ㆍ법(法)의 의지(意止)16)를 차례로 일으킨다.
법 중에 들어가 총관(總觀)하고
모든 법상을 동일하게 관찰해야 하니,
이 넷은 곧 무상과
공ㆍ무아ㆍ비락(非樂)이라네.
‘법 중에 들어가 총관하고 모든 법상을 동일하게 관찰한다’고 함은 법의 의지(意止) 중에 들어가서 거룩하게 총괄하여 모든 행상(行相)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모든 행상을 관찰하여 이미 증장(增長)하고 양지(養止)하며, 때 묻지 않은 지혜의 눈을 생하며, 일체의 신ㆍ통ㆍ심ㆍ법을 총괄하여 관찰한다.
[문] 어떻게 하여 그러한가?
[답] 이 넷은 곧 무상이며, 공ㆍ무아ㆍ비락이다. 이 신ㆍ통ㆍ심ㆍ법은 전전(展轉)하여 서로 생겨나게 하므로 무상이고, 자재(自在)하지 않으므로 공이며, 주인이 아니므로 무아이며, 거칠고 후환거리이므로 고이다.
이를 좇아 난법(煖法)이라고 이름하니
곧 마음[意]에서 생겨난다.
행이란 열여섯 가지가 행이니
네 가지 진리[眞諦]를 똑바로 관찰한다.
16) 원문의 의정(意正)을 의지(意止)로 고쳐 읽는다. 의지란 염처(念處) 혹은 염주(念住)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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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좇아 난법이라고 이름하니, 곧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함은 그는 이와 같이 관찰하여 훌륭한 난법[善煖]을 생겨나게 하고, 그 중에서 당연히 무루 지혜의 불을 생하여 온갖 행의 섶을 태운다는 것이다.
[문] 그것은 어떤 행이고 어떤 경계인가?
[답] 행은 열여섯 가지 행[十六行]17)이고, 네 가지 진리[眞諦]를 똑바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행은 열여섯 가지이고, 경계는 네 가지 진리이다.
네 가지 행으로 고제를 관찰한다. 이 고는 성품이 하열하여 인연 따라 생겨나므로 무상이다. 무상의 힘으로 파괴되므로 고이다. 안으로는 사람[人]을 떠나므로 공이요, 자재하지 않으므로 무아이다.
네 가지 행으로 습을 관찰하나니, 이 습은 서로 비슷한 과보를 만들므로 인(因)이 된다. 행이 상속하므로 습(習)이요, 일체의 생사가 무궁함을 얻으므로 유(有)이다. 서로 비슷하지 않은 일이 상속하므로 연이다.
네 가지 행으로 멸을 관찰하나니, 일체의 우환을 덮어 다하게 하므로 멸이라고 한다. 일체의 번뇌의 불을 제거하므로 지(止)이며, 일체법을 압도하므로 묘이며, 생사를 버리므로 이(離)이다.
네 가지 행으로 도를 관찰하나니, 이 도는 열반[非品]에 이르므로 도라고 한다. 뒤집어지지 않으므로 여(如)이며, 일체의 성인이 걸어온 것이므로 적(迹)이요, 생사의 우환으로부터 벗어나므로 승(乘)이다.
이는 말하자면 십육 행을 행하여 네 가지 진리를 경계로 하는 선근이므로, 그것을 일컬어 난법이라고 한다.
저것이 일어나 이미 성립되면
정(頂)과 인(忍)을 생한다.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얻고
하나의 상(相)에 의지한다.
17) 범어로는 ṣodaṡa-ākāra.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성제를 관찰하는 법을 말한다. 16행상(行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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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이 일어나 이미 성립되면, 정과 인을 생한다’고 함은 만약 이미 난법이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또한 욕계에 있어서 최상[頂]의 선근을 일으키고 역시 십육 행으로 네 가지 진리를 관찰한다는 것이다. 난법보다 뛰어나므로 정이라고 한다. 이미 정을 더하면 선근을 생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인이라고 하고, 역시 십육 행으로 네 가지 진제를 관찰한다. 견디고 참으므로 인이라고 한다.
만약 인이 이미 성립되었으면, 세제일법을 얻고 하나의 상에 의지한다. 일체 세속의 공덕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생하는 선근을 세간제일법이라고 이름한다. 열반의 문을 열기 때문에 또한 범부의 마음속에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일법이라고 말한다.
[문] 왜 하나의 상에 의지한다고 말하는가?
[답] 범부의 마음속에 다시 견줄 수 있는 두 공덕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마땅히 열반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인데 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문] 그것은 몇 가지 행과 몇 가지 연과 몇 가지 지(地)에 속하는가?
[답] 그것은 고의 네 가지 행(行)을 행하며,
여섯 지(地)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를 행한다’고 함은 저것은 곧 고제를 연(緣)하고 나머지는 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가지 행’이란 말하자면 행의 고제의 경계로서 무상이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초무루심의 연과 같이 그것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여섯 지에 의지하는 것에 속한다’고 함은 저 법은 여섯 가지 지를 포섭한다는 것이니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4선이다. 욕계는 그렇지 않으니 정계(定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색계에서도 또한 그렇지 않으니 견도(見道)가 없기 때문이다.
[문] 나머지 선근은 어떤 지에 포섭되는가?
아비담심론 > 5. 현성품(賢聖品) > 59 - 68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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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인(忍)도 역시 여섯 지에 포섭되고
나머지는 곧 일곱에 의지한다.
‘인도 역시 여섯 지에 포섭된다’고 함은 제순인(諦順忍)은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된다는 것이니, 세간제일법과 같다.
‘나머지는 곧 일곱에 의지한다’고 함은 난(煖)과 정(頂)은 일곱 가지 지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이 여섯과 욕계로서 아직 욕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욕계가 이미 욕을 제거하면 색계가 된다.
세제일법 다음에
반드시 법인(法忍)을 왕성하게 일으키고
인 다음에 지(智)를 낳으니
모두 아래 경지의 고(苦)를 관찰한다.
‘세제일법 다음에 반드시 법인을 왕성하게 일으킨다’고 했는데, 세간제일법 다음에 무루법인이 생겨남을 일컬어 고법인(苦法忍)18)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전에 관찰하지 않고 지금 관찰할 때 견디고 참으므로 인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초무루무애도(初無漏無礙道)라고 한다.
‘인 다음에 지를 낳는다’고 함은 그 다음에 고법지(苦法智)를 생한다는 것이니, 동일한 경계로서 진실한 성품을 받는 해탈도이다.
[문] 그 인(忍)과 지(智)는 어떠한 연인가?
[답] 모두 밑의 고를 관찰한다. 아래 경지의 고란 욕계의 고이니, 그것은 연이 같다.
위의 고도 역시 이와 같으며
인(因)ㆍ멸ㆍ도 역시 그러하다.
18) 범어로는 duḥkhe dharma-jñāna-kṣāntiḥ.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의 직전에 얻는 마음을 말한다. 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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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열여섯 가지 정심(淨心)이라고 한다.
‘위의 고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함에서 위의 고라는 것은 색계ㆍ무색계의 고를 말한다. 그것도 역시 이와 같이 인(忍)인 무애도와 지(智)인 해탈도를 일으키니, 고미지인(苦未知忍)과 고미지지(苦未知智)이다. ‘인(因)’이란 습제(習諦)이다. 그것도 역시 이와 같이 습법인(習法忍)ㆍ습법지ㆍ습미지인(習未知忍)ㆍ습미지지의 네 가지 도(道)를 일으키니, 마치 고와 같다. ‘멸’이라 했는데, 멸 역시 이와 같이 네 가지 도를 낳으니, 멸법인(滅法忍)ㆍ멸법지ㆍ멸미지인ㆍ멸미지지이다.
‘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도 또한 이와 같이 도법인(道法忍)ㆍ도법지ㆍ도미지인ㆍ도미지지(道未知智)의 네 가지 도를 낳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열여섯 가지 정심이라고 한다’고 함은 곧 견법(見法)을 말하니, 이것은 견의 다른 이름이다.
종법행(從法行)은 예리한 근이니
이것은 열다섯 가지 마음에 있다.
종신행(從信行)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둔한 견도 그 속에 있다.
‘종법행은 예리한 근이니, 이것은 열다섯 가지 마음에 있다’고 함은 열다섯 가지 마음이 만약 이근이라면 이것을 종법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종신행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둔한 견도 그 속에 있다’고 함은 곧 열다섯 가지 마음이 만약 둔근이라면 이것을 종신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직 욕계의 욕을 여의지 못했으면
시과(始果)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6취(趣)를 버리면 두 번째에 이르고
세 번째 향(向)은 아홉 가지 무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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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의 욕을 여의지 못했으면 시과를 향해 나아간다’고 함은 종신행과 종법행은 사문과(沙門果)를 향해 나아갈 때 만약 욕을 여의지 못했다 해도 함께 수다원과(須陀洹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6취를 버리면 두 번째에 이른다’고 함은 욕계의 번뇌에 아홉 종류가 있으니, 미미(微微)ㆍ미중(微中)ㆍ미상(微上)ㆍ중미(中微)ㆍ중중ㆍ중상ㆍ상미ㆍ상중ㆍ상상인데, 만약 범부일 때 이미 여섯 종류를 여의었고 그 뒤에 깨달음으로 나아가면 이는 함께 두 번째 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세 번째 향은 아홉 가지 무루이어야 한다’고 함은 만약 이미 아홉 가지를 여의면 이는 함께 아나함과(阿那含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만약 열여섯 번째 마음에 이르면
이것을 과(果)에 머문다고 한다.
신(信)해탈은 연견(軟見)이고
견도(見到)는 이견(利見)이라고 설한다.
‘만약 열여섯 번째 마음에 이르면, 이것을 과에 머문다고 한다’고 했는데, 열여섯 번째 마음을 일컬어 도미지지심상응(道未知智心相應)이라고 하며, 그것이 생기고 나면 과에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욕계의 욕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수다원이다. 이미 6품을 여의었으면 모두 사다함(斯陀含)이고 9품을 다 여의었으면 모두 아나함이다.
‘신해탈은 연견이고, 견도는 이견이라고 설한다’고 함은 만약 그것이 나아갈 때 종신행의 둔근(鈍根)이라면 이는 신해탈이고, 만약 그것이 종법행의 이근(利根)이라면 이는 견도라는 것이다.
사유단(思惟斷)을 다하지 못한 이는
일곱 번 생사를 왕래한다.
가가(家家)19)에 3진(盡)이 있고
19) 범어로는 kulaṁkula. ‘집에서 집으로 태어나는 자’라는 뜻으로, 이른바 사다함이 7번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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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도적과(道迹果)에 있다.
‘사유단을 다하지 못한 이는 일곱 번 생사를 왕래한다’고 함은 저 신해탈과 견도가 아직 욕계의 사유로 끊어야 할 번뇌를 끊지 못한 이는 곧 살았다 죽었다 하기를 일곱 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는 천상에서 일곱 번 생하는 것과 인간 중에 [일곱 번 생하는 일이] 있으므로 극생의 생사가 일곱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가에 3진이 있다’고 했는데, 만약 세 종류인 상미(上微)ㆍ상중ㆍ상상이 다하면 이것을 ‘집집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상과 인간 중에서, 혹은 두 집[二家]에 생하거나 혹은 세 집[三家]에 생하고 후에 반열반하기 때문에 가가라고 한다.
‘모두 도적과(道迹果)에 있다’고 함은 일곱 번의 생존을 다한 이[極七有]와 가가는 당연히 모두 수다원에 머문다고 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가 다하면 일왕래(一往來)이고
여덟을 여읜 것은 일종(一種)이라고 한다.
아홉이 멸진되면 불환(不還)이니
이미 욕의 더러운 진흙을 벗어났다.
‘여섯 가지가 다하면 일왕래이다’고 함은 만약 상(上)의 셋과 중(中)의 셋인 여섯 가지가 다하면 이는 사다함이니, 그에게는 나머지 한 번의 천상에 생하고 한 번 인간 중에 생하여 한 번 왕래하면 이미 반열반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다함이라고 한다.
‘여덟을 여읜 것은 일종(一種)이라고 한다’고 함은 만약 8품을 다하면 이는 한 가지 종이고, 그는 다만 한 번의 생을 남기고 나머지가 없으므로 일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홉이 멸진되면 불환이다’고 함은 만약 일체의 9품이 다하면 곧 아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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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그는 욕계에 다시 오지 않으므로 아나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미 욕의 더러운 때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번뇌가
만약 위의 여덟 지(地)에 있어도
그것은 두 가지 도(道)가 멸하는 것이니
[이는] 세존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번뇌가 만약 위의 여덟 지에 있다’고 함은 난난(煖煖)으로부터 상상(上上)에 이르는20) 욕계의 아홉 가지 번뇌와 같이 위의 계(界)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여덟 지 가운데에는 범세(梵世)ㆍ광요(光曜)ㆍ변정(遍淨)ㆍ과실(果實)ㆍ무량공처ㆍ무량식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도가 멸하는 것이니, [이는] 세존의 말씀이다’고 함은 이 일체 번뇌의 욕계와 색계ㆍ무색계는 두 가지 도가 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무애도(無礙道)로써 멸하고, 해탈도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문] 이 도는 세속이 되는가, 무루가 되는가?
[답] 유구(有垢)ㆍ무구도(無垢道)이니
함께 능히 여덟 지를 여읜다.
그중에 머무름을 신증(身證)이라고 하니
소위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이다.
욕계의 지(地) 하나, 색계의 지 넷, 무색계의 지 셋은 세속도의 멸이고 또한 무루이다. 범부도 세속도에 따라 오히려 멀리 여읨을 얻는데 하물며 다시 성인을 이르랴. ‘그중에 머무름을 신증이라고 하니, 소위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이다’고 함은 여덟 지의 무욕(無欲) 중에 머무름이 학(學)의 멸진정을 얻는
20) 원문의 유유(濡濡)를 난난(煖煖)으로 고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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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고 이것이 신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으로서 열반과 비슷한 것을 몸이 촉달(觸達)하는 것이므로 신증이라고 하는 것이다.
금강유정(金剛喩定) 다음에
반드시 진지(盡智)를 얻는다.
뜻을 일으켜 나의 생을 다하고
일체의 누(漏)를 여읜다.
‘금강유정 다음에 반드시 진지를 얻는다’고 함에서, 금강유정이란 비상비비상처의 욕탐을 여읠 때의 아홉 번째 무애도(無礙道)인 최후의 학심(學心)을 가리킨다. 그중에서 일체의 모든 번뇌는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 일체 성스러운 행위의 마지막이므로 금강유삼마제(金剛喩三摩提)라고 한다. 이 다음에 진지를 생하니, 최초의 무학지(無學智)이다.
‘뜻을 일으켜 나의 생을 다하고, 일체의 누를 여읜다’고 함은 그가 선정[定]을 일으켜 자신의 일체의 생은 다했음을 생각하는[意] 것이니, 그는 그때에 무착(無著)으로서 일체의 누에서 해탈한다고 하는 것이다.
[문] 무착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답] 무착은 여섯 종이 있으니
믿음을 따라 다섯 가지가 생기며
두 가지 지(智)를 체득하니
시해탈(時解脫)임을 알아야 한다.
‘무착은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함은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 무착을 말씀하셨으니, 퇴법(退法)ㆍ염법(念法)ㆍ호법(護法)ㆍ등주(等住)ㆍ필승진(必昇進)ㆍ부동법(不動法)이다. 그중에서 만약 연한 지혜[軟智]와 연한 정진[軟進]이라면, 이는 물러날 도구를 얻어 곧 물러나므로 퇴법이라고 한다. 유지와 유진으로서 자주 몸을 미워하고, 몸을 미워하고 나서는 부서짐을 생각하기 때문에 염법(念法)이라고 한다. 유지로서 널리 나아가고 힘을 다하여 항상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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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보호하므로 호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와 등진(等進)으로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등 한결같이 중도(中道)에 머물기 때문에 등주(等住)라고 한다. 작은 예리함으로서 널리 나아가고 반드시 부동(不動)을 얻으므로 필승진(必昇進)이라고 한다. 예리한 지혜와 널리 나아감으로서 비로소 부동을 얻으므로 부동이라고 한다.
‘종신은 다섯을 생하고 두 가지 지를 체득한다’고 함은 그중에서 다섯은 이전의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니, 진지(盡智)와 무학의 등견(等見)이다.
‘시해탈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시해탈로서 그것을 구할 때 아무 때나 바라는 것에 따라 선(善)을 배울[學]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동법은 이근(利根)이고
이는 시해탈이 아니다.
세 가지 지(智)를 획득하고
등해탈(等解脫)을 성취한다.
‘부동법은 이근이고, 이는 시해탈이 아니다’고 함은 말하자면 오로지 이근인 것은 부동법인데 그것은 일시적인 해탈이 아닌 것으로서 능히 모든 때에 바라는 것을 따라 선을 배우니, 때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지를 획득한다’고 함은 그가 진지ㆍ무생지(無生智)ㆍ무학의 등견의 세 가지 지혜를 지닌다는 것이다.
‘등해탈을 성취한다’고 함은 소위 이들 다섯 가지 무착은 시해탈이고, 이는 바로 등의(等意)해탈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알아야 하니, 혜해탈(慧解脫)은
멸진정을 얻지 못한다.
오직 구해탈(俱解脫)이 있어
멸진정을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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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하니, 혜해탈은 멸진정을 얻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들 여섯 가지 무착이 멸진정을 성취 못하는 것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이는 지혜의 힘으로 해탈하고 정력(定力)으로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구해탈이 있어 멸진정을 성취한다’고 함은 이 여섯 가지 무착이 멸진정을 얻으면, 이것을 구해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함께 하는 힘으로 해탈하니, 혜력과 정력이다.
이미 현성인(賢聖人)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법을 설명하겠다.
믿음 따라 행하는 모든 법과
법을 따라 행하는 법과
성도(聖道)의 견제도(見諦道)가 있으니
이는 모두 동일한 모습이다.
믿음을 따라 행하는 법과 법을 따라 행하는 법을 곧 견도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 모든 근법(根法)을
미지근(未知根)이라고 이름한다.
나머지 유학법(有學法)을 일컬어
부처님께서는 이지근(已知根)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중에서 모든 근법을 미지근이라고 이름한다’고 함은 견도법 중에서 소위 근(根)과 근에 속한 마음[心]과 통(痛)과 신(信) 등 다섯 가지 근과 같은 것을 미지근(未知根)이라고 한다.
‘나머지 유학법을 일컬어 부처님께서는 이지근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함은 견도의 학법(學法)을 여읜 나머지 여러 학법 중에서는 곧 그 근을 이지근21)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21) 수도위에서 무루의 아홉 가지 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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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하니 무지근(無知根)은
무학 가운데에 있다.
이미 과를 얻으면 곧 앞의 도를 버린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알아야 하니 무지근은 무학 중에 있다’고 함은 무학법 중에서는 곧 그 근을 무지근(無知根)22)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미 과를 얻으면 곧 앞의 도를 버린다고 말해야만 한다’고 함은 이 무루법이 승진하여 과를 얻을 때는 앞의 무애도에 포섭된 것과 해탈도를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다하여 해탈하게 되면
얻는 것은 하나의 과에 포섭된다.
더럽지 않은 것으로서 아홉 번째를
멸진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다하여 해탈하게 되면 얻는 것은 하나의 과에 포섭된다’고 함은 무애도에서 해탈도에 이르는 그 중간에서 번뇌의 다함을 얻는데, 단지 과를 얻을 때는 일체의 번뇌가 다하여 하나의 해탈과(解脫果)를 얻는다는 것이다.
‘더럽지 않은 것으로서 아홉 번째를 멸진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함은 모든 번뇌는 아홉 가지 도로써 멸하는 것인데, 다만 더럽지 않은 것23)은 아홉 번째 무애도가 일시에 끊는 것이지 점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만약 서로 비슷한 이름이 있다면
그는 능히 부동을 획득한다.
무착과 벗어남을 믿는 것은
같은 성질로서 도를 증장한다.
22) 무학법 중의 무루의 아홉 가지 근을 가리킨다. 구지근(具知根)이라고도 한다.
23) 번뇌를 제거하는 무기법과 유루의 선법 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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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서로 비슷한 이름이 있다면 능히 부동을 획득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무착은 일체가 부동을 얻을 수가 없고, 필승진(必昇進)만이 그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비슷한 이름이다.
‘무착과 벗어남을 믿는 것은 같은 성품으로서 도를 증장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해탈을 믿는 데서 오로지 성품이 필승진인 것이 모든 근을 증익하고 견도(見到)를 얻는 것이지, 나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 어떻게 하여 조금씩 진리를 보게 됨을 아는가?
[답] 공덕과 악을 건립하여
차례로 진리를 본다.
공덕을 볼 때는 악(惡)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역시 악을 볼 때는 공덕을 볼 수도 없다. 또한 처음에 한꺼번에 그 악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일시에 일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총체적인 모든 공덕인 것도 아니고, 역시 일시에 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공덕과 악을 건립하고 차례로 진리를 보는 것이다.
[문] 어떻게 하여 유위ㆍ무위의 과를 아는가?
[답] 무애도의 힘으로 유위와 무위의 과를 얻는다.
무애도의 힘으로 유위과와 무위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무애도의 힘으로 유위와 무위의 과를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