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3권 > 6. 지품(智品) > 69 - 78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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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심론 제3권
법승 지음
승가제바ㆍ혜원 공역
김 재천 번역
6. 지품(智品)
지혜의 본질[性] 능히 깨닫고
밝게 관찰하니 모든 유와
유ㆍ무유(無有)의 열반 있으니
그 모습을 이제 설명하겠다.
이른바 지혜는「현성품」에서 간단하게 설명하였으니, 여기에서는 유ㆍ무유를 경계로 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세 가지 지(智)란 부처님의 말씀으로
최상이고 으뜸가는 뜻이니,
법지(法智)와 미지지(未知智)와
세속의 등지(等智)이다.
이 세 가지 지혜는 일체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법지라는 것은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곧 욕계의 고ㆍ습ㆍ멸ㆍ도인 무루지의 경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법상을 처음 받아들이기 때문에 법지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법지를 따른다면 근(根)이 나타나서 이미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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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역시 보이므로 미지지(未知智)1)이다. 미지지도 경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색계ㆍ무색계의 고ㆍ습ㆍ멸ㆍ도인 무루지의 경계를 말한다. 이것은 법상을 뒤에 받아들이므로 미지지라고 말한다. 등지(等智)는 일컬어 유루지라고 한다. 이것은 대부분 세속의 지혜[等諦]를 취하여 남녀ㆍ장단을 아는 것을 첫째로 한다.
고ㆍ습ㆍ식지(息止)ㆍ도에서
두 가지 지혜에 따라 얻을 수 있으니
이것에 4지(智)라고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해탈사(解脫師)의 말씀이다.
이 두 가지 지혜인 법지와 미지지가 만약 제(諦)에서 행하면 이와 같은 서로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고제를 경계로 하는 것을 고지(苦智)라 하고, 습제를 경계로 하는 것을 습지(習智)라고 하고, 멸제를 경계로 하는 것을 멸지라고 하며, 도제를 경계로 하는 것을 도지라고 하니, 해탈하신 스승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지혜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이것은 세 가지를 따라서 말하게 되니,
진(盡)ㆍ무생지(無生智)의 두 가지가 있고
경계는 네 가지 문(門)에 있다.
‘지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는 이것은 세 가지를 따라서 말한다’고 함은 타심지(他心智)가 소위 유루를 경계로 하는 것은 등지이고, 욕계도를 경계로 하는 것은 법지이고, 색계도를 경계로 하는 것은 미지지라는 것이다.
‘진ㆍ무생지 두 가지가 있다’고 함은 무학의 두 가지 지인 진지와 무생지가
1) 범어로는 ajñtam ājñāsyāmi indriyaṃ. ‘아직 모르던 것을 알고자 하는 근’이라는 뜻이다.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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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할 일을 이미 마치고 무학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지이고, 또 다시는 짓지 않으면서 무학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생지이니, 이 역시 법지와 미지지이다.
[문] 진지와 무생지는 어떠한 진리[諦]를 경계로 하는가?
[답] 경계는 네 가지 문에 있다. 이들 두 가지 지혜는 고ㆍ습ㆍ멸ㆍ도의 4제를 경계로 한다.
이미 열 가지 지를 설명했으니, 이제 행을 설명하겠다.
두 가지 지(智)는 십육 행이니
법지와 미지지이다.
이와 같은 행이거나 혹 아닌 것은
이것을 등지라고 말한다.
‘두 가지 지는 십육 행이니, 법지와 미지지이다’고 함은 법지의 성품은 십육 행인데 네 가지 행으로 고를 받고, 네 가지 행으로는 습을 받으며, 네 가지 행으로는 멸을 받고, 네 가지 행으로는 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미지지의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이와 같은 행이거나 혹 아닌 것은 이것을 등지라고 말한다’고 함은 난(煖)2)ㆍ정(頂)ㆍ인(忍)ㆍ제일법 중에 포섭하는 등지행과 무루행의 두 가지 진리3)가 포섭하는 것은 십육 행이고, 제일법이 포섭하는 것은 네 가지 행이며, 문(聞)ㆍ사(思), 그리고 나머지 사유(思惟)의 등지는 십육 행이고, 이를 떠난 나머지 등지는 십육 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施)ㆍ계(戒)ㆍ자(慈)는 이와 같은 부류[比]이다.
네 가지 지혜에는 네 가지 행이 있으니
결정행(決定行)에서 설명한 것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바르게 관찰하는 지혜는
2) 원문의 연(煙)을 난(煖)으로 고쳐 읽는다.
3) 등제와 진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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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이것이거나 혹은 아니다.
‘네 가지 지혜에는 네 가지 행이 있으니 결정행에서 설명한 것이다’고 함은 고지(苦智)에는 네 가지 행이 있으니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습ㆍ멸ㆍ도의 지혜도 이와 같음을 말한다.
‘다른 이의 마음을 바르게 관찰하는 지혜는 혹은 이것이거나 혹은 아니다’고 함은 무루의 타심지에는 네 가지 행이 있으니 도지(道智)와 같고, 유루는 아니라는 것이다.
진지와 무생지는
공과 무아행을 떠나
열네 가지 행이 있다고 말하니
받아들이는 모습이 가장 뛰어나다.
‘진지와 무생지는 공ㆍ무아행을 떠나 열네 가지 행이 있다고 말한다’고 함은 진지와 무생지에는 열네 가지 행이 있어서 공ㆍ무아행은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것은 등제(等諦)에서 자신이 이미 지었거나4) 다시 짓지 않는 것5)을 행하는데, 공ㆍ무아행이란 이러한 행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모습이 가장 뛰어나다’고 함은 일체의 무루지는 열여섯 가지 행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열여섯 가지 행인 것이 바로 총행인데, 다시 무루지가 열여섯 가지 행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으니 신의지(身意止)6)와 같으며, 이것은 자상지(自相智)로서 열여섯 가지 행에 있지 않고 전에 열여섯 가지 행을 받는데 이들 자상행은 모든 무루지보다 먼저 받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한 것이다.
이미 열여섯 가지 행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이와 같은 지혜로 얻는 것을
4) 이른바 진지를 가리킨다.
5) 이른바 무생지를 가리킨다.
6) 범어로는 kāya-smṛty-upasthāna. 신념주(身念住)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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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겠다.
첫 번째의 무루심은
혹은 하나를 성취하기도 하고
두 번째는 혹은 셋을 성취하기도 하며
위에서 말한 것보다 하나를 더하기도 한다.
‘첫 번째의 무루심은 혹은 하나를 성취하기도 한다’고 함은 첫 번째의 무루심은 고법인(苦法忍)과 서로 호응하는 자로서 아직 욕탐을 여의지 않은 자라면 하나의 등지(等智)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미 욕을 여읜 자는 타심지를 성취한다.
‘두 번째는 혹은 셋을 성취하기도 하며’라고 함은 두 번째의 무루심은 고법지(苦法智)가 상응하므로 아직 욕탐을 여의지 않은 자는 법지와 고지와 등지의 셋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미 욕을 여읜 자는 타심지를 성취한다.
‘위에서 말한 것보다 하나를 더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위의 네 가지를 얻을 때에 늘어나는 것을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네 가지 때란 고미지지(苦未知智)를 얻어 미지지를 얻고, 습법지로서 습지를 얻고, 멸법지로서 멸지를 얻고, 도법지로서 도지를 얻는 것이다. 인(忍) 중에서는 지를 얻지 못한다.
[문] 이러한 지는 어떠한 지(地)에 포섭되는가?
[답] 아홉 가지 지혜[智]는 성인의 말씀이며
위의 경지[地]에 의지한다.
선(禪) 중에는 열 가지 지가 있고
무색지(無色地)에는 여덟이 있다.
‘아홉 가지 지혜는 성인의 말씀이며, 위의 경지에 의지한다’고 함은 미래선과 중간선에는 타심지가 없어서 근본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선 중에는 열 가지 지혜가 있다’고 함은 근본 4선 중에는 열 가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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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지 중에는 여덟이 있다’고 했는데, 무색지 중에는 여덟 가지 지혜가 있으니 법지와 타심지를 제외한다. 법지는 욕계를 경계로 하고 무색계로써 하지는 않는다. 욕계를 경계로 하고 타심지를 행하여 색계에 오르니 무색지 중에는 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地)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수(修)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득수(得修)와 행수(行修)이다. 득수는 말하자면 공덕으로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얻은 뒤에는 모든 공덕으로서 그 의지하는 것도 얻으며, 얻고 나서는 나중에 구하거나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수란 이른바 이미 얻은 공덕을 지금 현재 앞에서 행하는 것이다.
[문] 이러한 여러 지혜[智]를 어떻게 하여 수행(修行)하는가?
[답] 만약 이미 얻은 것으로서 닦게 된다면
지자(智者)의 모든 성스러운 견해라 하며
그것으로 곧 미래에 닦나니
모든 인(忍)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이미 얻은 것으로서 닦게 된다면 지자의 모든 성스러운 견해라 하며 그것으로 곧 미래에 닦는다’고 함은 견제도(見諦道)에서 소위 지혜를 현재 앞에서 닦으면 곧 그것을 내세에 닦는다는 것이니, 법지(法智)에서부터 도지(道智)까지를 말한다.
‘모든 인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함은 인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고법인(苦法忍)을 현재 앞에서 닦으면 곧 고법인을 미래에 닦게 되나니, 지(智)도 아니고 나머지 인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이러한 세 가지 마음 중에서
등지(等智)를 득수하나니
일곱이나 혹은 여섯을 닦기도 하나니
최후심(最後心)께서 하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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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 가지 마음 중에서 등지를 득수한다’고 함은 곧 견제도 중의 세 가지 마음이 내세에 등지를 닦는다는 것이니 고미지지ㆍ습미지지ㆍ멸미지지이다. 이들 세 가지 진리를 행할 때에는 등지를 득수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들 세 가지 진리를 익히고 나면 관(觀)이 있거니와 도제(道諦)에서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地)의 견도에서는 그 지의 등지와 욕계의 것이 있다.
‘일곱이나 혹은 여섯을 닦기도 하나니 최후심께서 하신 말씀이다’고 함은 도미지지의 경우 욕을 여읜 자는 이른바 일곱 가지 지혜를 닦아 아나함과에 포섭되고, 아직 욕탐을 여의지 못한 자라면 여섯 가지 지혜를 닦는데 타심지를 제외하고 그 중 비상비비상도로서 사문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지를 닦지 않는다.
열일곱 가지 무루심은
위의 사유도(思惟道)에서
일곱 가지를 닦는다고 알아야 하고
여섯 가지 수행은 근(根)을 증익시킨다.
‘열일곱 가지 무루심은 위의 사유도에서 일곱 가지를 닦는다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수다원과(須陀洹果)는 위에 있는 사유도의 열일곱 가지 심(心)7)의 무렵에서 일곱 가지 지혜를 닦는다는 것이다. 이 도는 미래선에 포섭되므로 타심지는 없다. 그리고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는 무학이므로 없다. 나머지 일곱 가지 지혜는 반드시 닦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마음[意]에는 이 공덕이 항상하여 공(空)하지 않으므로 만약 닦지 않으면 일찍이 얻었던 것을 이미 버려 다시는 얻지 못하고, 그 중간에는 마땅히 공이어야 하지만 공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가지 수행[修]8)은 근을 증익시킨다’고 함에서 ‘근을 증익시킨다’는 것은 신해탈(信解脫)에 있어서 모든 근을 더하여 견도(見到)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에는 아홉 가지 무애도와 아홉 가지 해탈도가 있다. 이 일체
7) 아홉 가지 무애도심과 여덟 가지 해탈도심을 가리킨다.
8) 원문의 종(種)을 수(修)로 고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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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무애도와 일체의 해탈도에서 여섯 가지 지혜[智]를 닦는다. 이는 욕을 여의지 못한 것을 말하므로 타심지는 없다. 그 때에는 학도(學道)이어도 번뇌를 끊는 것을 배우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직 공덕을 닦아 얻지 못했고, 이미 얻은 것도 아니므로 등지를 닦지 않는다.
불환과(不還果)를 얻었을 때는
일곱 가지 지(地)를 멀리 여의고
여러 신통의 도(道)를 사유하고 배우니
해탈을 닦고 익히는 여덟 가지이다.
‘불환과를 얻었을 때’란 만약 불환과를 얻으면 여덟 가지 지를 닦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는 반드시 근본선을 얻기 때문에 타심지를 닦는다. 나머지 지혜에 대해서는 앞에서와 같다.
‘일곱 가지 지를 멀리 여읜다’고 함은 4선(禪)과 3무색(無色)에서 욕탐을 여읠 때 일체의 아홉 가지 해탈도로는 여덟 가지 지혜를 닦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모든 것은 아래 경지의 선을 닦는다.
‘여러 신통의 도를 생각하고 배우니, 해탈을 닦고 익히는 여덟 가지이다’라고 함은 세 가지 통인 여의족ㆍ천안(天眼)ㆍ천이(天耳)의 모든 아홉 해탈도는 여덟 가지 지혜를 닦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근본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 무애도 가운데
첫 번째 유(有)를 멸하는
저 여덟 해탈도는
일곱 가지를 닦아 익힌다고 말한다.
일곱 가지 지(地)에서 욕을 여읠 때에 일체의 무애도 중에서는 일곱 가지 지혜[智]를 닦는데 타심지는 제외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무애도로써 닦는다면 속박은 멸하지만 타심지를 익혀서는 속박을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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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러므로 닦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비상비비상처가 으뜸가는 유(有)이다. 그것은 욕을 여읠 때의 여덟 가지 해탈도 중에서 일곱 가지 지혜를 닦는데 등지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등지는 비상비비상처에서 변화되나니 돌아와도 적(敵)9)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으뜸가는 유를 떠나
여섯 가지를 닦는 무애도가 있으니,
위의 경지에 올라가서도
아래 경지를 닦아 익힘을 알아야 한다.
‘으뜸가는 유를 떠나 여섯 가지를 닦는 무애도가 있다’고 함은 제일가는 유에서 욕을 떠난 때는 아홉 가지 무애도 중에서 여섯 가지 지혜를 닦는 것을 말하니, 타심지와 등지는 제외된다.
‘위의 경지에 올라가서도 아래 경지를 닦아 익힘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일체의 지(地)를 닦으므로 자신의 경지의 모든 지혜와 밑의 경지에 포섭되는 것을 닦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선(初禪)에 의지하여 욕을 여의면 그것은 두 가지 지(地)의 공덕을 닦는 것이니, 자신의 지에 포섭되는 것과 미래선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무소유처에 이른다.
누ㆍ무루는 모두
모든 지(地)에서 공덕을 닦는다.
맨 처음 무학심 중에서 모든 지혜 생기니
이는 미지지(未知智)의 마음이다.
‘누ㆍ무루 일체가 지에서 공덕을 닦는다. 맨 처음 무학심 가운데’라고 함은 무착과(無著果)10)를 얻을 때는 아홉 지(地)와 자신의 지(地) 또한 일체의 모든 지 중에서 닦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는 번
9) 원문의 리(離)를 적(敵)으로 고쳐 읽는다.
10) 아라한과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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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일체의 지에 있어서 번뇌가 있는 마음은 맑고 깨끗하지 못하고 번뇌가 없는 마음은 맑고 깨끗하므로 그것을 떠나 일체를 닦는다는 것이다.
[문] 이러한 무학의 초심은 어떠한 지(智)와 상응하는가?
[답] 이것은 미지지의 마음이니, 이런 초무학심은 미지지와 상응한다. 그는 나의 생(生)은 이미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상비비상처가 생하는 연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최후에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미지지와 상응한다.
[문] 또 세존께서는 견(見)ㆍ지(智)ㆍ혜(慧)를 말씀하셨는데, 이 셋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답] 이것은 혜의 차별로서 혜성(慧性)의 소유이다. 단지 일에 따라서 세존께서는 혹은 견이라고 말씀하시고, 혹은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문] 그 뜻은 어떤 것인가?
[답] 결정코 능히 알라.
모든 인(忍)은 지성(智性)이 아니다.
진지(盡智)는 곧 견이 아니며
무생지도 역시 그러하다.
‘결정코 능히 알라. 모든 인은 지성이 아니다’고 함은 여덟 가지 인을 수행하여 구할 수 있으므로 견이고 능히 볼 수 있으므로 지혜이지만 단지 지혜가 아니면,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의 연에 의하기 때문이다.
‘진지는 곧 견이 아니고, 무생지도 또한 그러하다’고 함은 진지와 무생지로써 보기 때문에 혜이고 결정하기 때문에 지이지만, 다만 견이 아니면,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머지 무루의 혜의 종류는 세 가지 성품의 소유이니, 견과 지와 혜이다.
선하고 속된 유루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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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있는 것과 모든 견(見)은
마땅히 이것을 알면 곧 견이며
일체는 혜라고 말한다.
‘선하고 속된 유루의 지혜 마음에 있는 것과 모든 견은 마땅히 이것을 알면 곧 견이다’고 했는데, 의식지(意識地) 중의 선한 유루의 혜는 3성이니 견과 지와 혜이다. 다섯 가지 견(見)의 번뇌성은 견의 소유이니 관찰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와 혜를 여의지 않는다. 나머지 유루 지혜의 종류는 견성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기(無記)의 의식에 상응하는 지혜의 종류는 견성의 소유가 아니니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러움의 혜의 종류도 역시 견성의 소유가 아니니 번뇌에 파괴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식(識)에 상응하는 혜의 종류도 역시 견성의 소유가 아니니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성(智性)을 여의지 않는다.
‘일체는 혜라고 말한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앞에서 여의었다고 말한 바의 인(忍) 중에서는 지(智)를 여의고, 진지ㆍ무생지는 견을 여의고, 선한 의식지와 다섯 가지 견을 제외하고 난 뒤의 유루의 혜는 견을 여읜 것으로서 혜이고, 이와 같지 않은 것도 (혜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지의 종류와 일체의 견의 종류는 곧 혜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문] 하나하나의 지(智)는 몇 가지의 지를 연(緣)하는가?
[답] 법지와 미지지는
아홉 가지 지(智)를 깨닫는다.
인지(因智)와 과지(果智)는
두 가지 지혜를 경계로 한다.
‘법지와 미지지는 아홉 가지 지를 깨닫는다’고 함은 법지는 아홉 가지 지혜를 관찰하고 아홉 가지 지혜를 연하는데 미지지는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미지지는 욕계의 과가 아니고, 욕계의 인도 아니고, 욕계의 멸이 아니고, 욕계의 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미지지도 역시 이와 같이 아홉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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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연하고 법지를 제외한다.
‘인지와 과지는 두 가지 지혜를 경계로 한다’고 함은 습지(習智)가 인지인데 그것은 유루의 타심지와 등지를 연하니 습과 동일하기 때문이며, 나머지는 연이 아니니 무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지(苦智)도 역시 이와 같으니 이것은 곧 과지이다.
도지(道智)는 아홉 가지 지(智)이고
해탈지에는 연이 없다.
나머지는 일체를 경계로 한다는 것은
결정지(決定智)께서 하신 말씀이다.
‘도지는 아홉 가지 지혜이다’고 함은 도지는 아홉 가지 지혜를 경계로 한다는 것이다. 등지를 연하지 않으니 유루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연하니 도제(道諦)와 같기 때문이다.
‘해탈지에는 연이 없다’고 했는데, 해탈지란 멸지(滅智)를 말한다. 지혜를 연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를 연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일체를 경계로 한다는 것이 결정지의 말씀이다’고 함은 나머지에는 네 가지 지(智)가 있는데 일체의 열 가지 지혜를 연한다는 것이다. 등지는 열 가지 지혜를 연하니 일체법을 경계로 하기 때문이다. 타심지도 역시 열 가지 지혜를 연하니 모두 다른 자의 마음을 경계로 하기 때문이다. 진지와 무생지도 역시 열 가지 지혜를 연하니 일체의 유위를 경계로 하기 때문이다.
[문] 또한 세존께서는, 미지지는 비상비비상처를 떠나는 것과 같이 무착과를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미지지가 곧 그러한 도(道)이지만 이로 해서 미지지가 그러한 도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나머지가 곧 있는 것은 아닌가?
[답] 또한 법지(法智)의 색계ㆍ무색계도가 있다.
[문] 어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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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식지(息止)와 도(道)는
법지의 소행으로,
그것은 삼계의 번뇌를 멸하나니
욕계의 미지지는 아니다.
‘식지와 도는 법지의 소행으로, [그것은] 삼계[의 번뇌]를 멸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멸법지와 도법지의 사유도에 있는 것은 삼계의 번뇌[結]를 없앤다는 것이다. 혹은 법지가 있어 색계ㆍ무색계의 욕을 여읜다. 말하자면 이것은 거듭 악을 보고 욕계에서 멸과 도를 사유하여 색계ㆍ무색계의 욕을 여의나니 고지도 아니고 습지도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고ㆍ습과 같지 않고 멸ㆍ도와 같기 때문이다.
[문] 미지지가 욕계를 멸하는 경우도 있는가?
[답] 욕계의 미지지는 아니다. 미지지로써 욕계를 능히 멸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거듭 악을 보고 이것을 슬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 신통은 지성(智性)의 소유이다. 그것도 역시 하나하나가 몇 가지 지임을 말해야 할 것이다.
[답] 여의족은 등지이고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도 역시 그러하다.
여섯 가지는 숙명 중에 있고
다섯 가지는 타심지라고 한다.
‘여의족은 등지이고, 천안과 천이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여의족을 등지라고 말하고 천안과 천이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무루지는 이러한 것으로써 행하지 않는다.
‘여섯 가지는 숙명 중에 있다’고 함은 숙명통에 여섯 가지 지혜[智]가 있다는 것이다. 법지는 법지의 몫을 기억하고, 미지지는 미지지의 몫을 기억하고, 등지는 세속의 것을 기억하고, 고지는 과거의 고(苦)를 기억하고, 습지는 과거의 습관을 기억하고, 도지는 과거의 도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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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를 타심지라고 한다’고 함은 타심지통에는 다섯 가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법지는 다른 이의 마음속의 법지와 그것과 서로 호응하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알고, 미지지도 그와 같다. 등지는 다른 이의 속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알고, 도지는 다른 이의 무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알며, 타심지는 다섯이다.
아홉 가지 지혜[智]는 누진통(漏盡通)이라는 것은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다.
여덟 가지는 몸을 경계로 하고
법은 열 가지이고, 아홉 가지 지혜는 두 가지이다.
‘아홉 가지 지혜는 누진통이라는 것이 성인의 말씀이다’고 함은 누진통은 무루의 아홉 가지 지혜이니 일체의 누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 또한 세존께서는 신신관의지관(身身觀意止觀)11)은 혜라고 말씀하신다. 이 의지는 어떠한 지의 소유인가?
[답] ‘여덟은 몸을 경계로 한다.’ 여덟 가지 지혜는 몸을 관찰하니 색을 임시로 이름하여 몸이라고 한다. 이는 여덟 가지 지혜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니, 타심지와 멸지는 제외한 것이다. 지가 색을 연하는 것이 신의지(身意止)이다. 이 두 가지 지혜는 색을 연하지 않는다.
‘법은 열 가지’라고 함은 법의지(法意止)에는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색ㆍ통ㆍ심을 여읜 나머지 법을 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경계로 하는 것에 열 가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자상을 경계로 하고, 또한 일체를 통틀어 경계로 하는 지혜가 법의지이다.
‘아홉 가지 지혜는 두 가지’라고 했는데, 통(痛)과 심(心)이 아홉 가지 지혜로, 멸지는 제외된다. 말하자면 지(智)가 통을 연하는 것이 통의지이고, 지가 심을 연하는 것이 심의지이다.
[문] 모든 여래에게는 지력(智力)이 있다. 무엇이 여래의 힘이며, 시설된 지
11) 신신관(身身觀)이란 ‘각각의 몸에 대한(pratiśarīram) 관찰’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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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가? 그리고 여래의 네 가지 무소외(無所畏)는 지성(智性)의 소유인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들은 이러한 모든 법을 바르게 깨달아도 아직 등정각이 되지 못하면 이러한 상을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일체도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하나하나는 몇 가지 지성의 소유인가?
[답] 시처비처(是處非處)의 힘과
첫 번째 두려움 없는 마음
이것은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이고
나머지는 이 중의 차별이다.
‘시처비처의 힘과 첫 번째 두려움 없는 마음, 이것은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이다’라고 함은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지혜의 시처비처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시처지(是處智)는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과 진실한 행위를 받아, 이 법의 이와 같은 모습과 이와 같은 행위를 받아서 아는 것을 가리키니, 이것을 시처지라고 하는 것이다. 비처지는 모든 법의 다른 모습과 다른 행위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곧 이 법의 이와 같은 모습과 이와 같은 행위가 아님을 아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을 비처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이다. 첫 번째 무외도 역시 열 가지 지혜이니 한결같이 바르게 받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이 중의 차별이다’고 함은 시처비처의 힘을 차별한 것에 열 가지 힘이 있고, 첫 번째 무외를 차별한 것에 네 가지 무소외가 있음을 말한다. 처비처지는 경계의 차별 때문에 열 가지로 분별하고, 첫 번째 무외도 역시 경계의 차별 때문에 네 가지로 분별한다.
[문] 네 가지 변(辯)도 역시 지성의 소유이다. 이것도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하나하나는 몇 가지 지혜인가?
[답] 법변과 사변(辭辯)은 하나이다.
응(應)과 의변(義辯)은 모두 열이다.
원지(願智)는 일곱 가지 지혜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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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의 말씀이다.
‘법변과 사변은 하나이다’고 함에서 법변(法辯)은 모든 법의 이름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등지이다. 무루지로써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세속 중의 이름은 임시로 부르는 것이고, 무루지는 이것으로써 행하지 않는다. 사변(辭辯)은 바른 말을 깨닫는 것을 말하나니 이것도 역시 등지이다. 이것을 세속 중에서는 임시로 지혜[智]라고 부른다.
‘응과 의변은 모두 열이다’고 함에서 응변은 보는 것과 나타나는 것에 장애됨이 없는 방편지를 이름하니, 이것은 열 가지 지혜이다. 의변(義辯)은 모든 법의 진실을 깨닫는 것을 말하고, 그것 역시 열 가지 지혜이니 진실의 모습을 받기 때문이다.
[문] 원지(願智)에 어떠한 지혜가 있는가?
[답] 원지는 일곱 가지 지혜이니,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의 말씀이다. 원지에는 일곱 가지 지혜가 있으니,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를 제외한다. 원지는 예리하고 빨라서 3세를 경계로 하여 일체의 모든 법을 받는다. 이것은 일곱 가지 지성(智性)의 소유이다.
7. 정품(定品)
[문] 이와 같이 모든 지혜를 알았다. 이러한 지혜는 어떠한 것인가?
[답] 지혜는 모든 선정[定]에 의지하고
거리낌이 없는 행을 한다.
그러므로 사유와 정으로써
그 진실을 구해야 한다.
‘지혜는 모든 선정에 의지하고, 거리낌이 없는 행을 한다’고 함은 등불은 기름에 의지하고 바람을 벗어나야 불꽃이 매우 밝은 것과 같이 지혜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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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지해 마음의 모든 산란함을 없애야 지혜의 불꽃이 매우 밝고 반드시 안정되어 대상에 대하여 의심 없는 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와 정으로써 그 진실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결정(決定)적으로 4선과
무색정을 설하셨으니
이 중의 하나하나를 설명하면
미선[味]과 정선[淨]과 무루선이 섞여 있다.
‘결정적으로 4선과 무색정을 설하셨다’고 함은 4선과 4무색정의 여덟 가지 선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중 하나하나를 설명하면 미선과 정선과 무루선이 섞여 있다’고 함은 초선에 셋이 있으니 미상응과 정과 무루이고, 일체의 선정문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문] 무엇이 미상응이고, 무엇이 정선[淨]이고, 무엇이 무루선인가?
[답] 선한 유루를 정선[淨]이라 하고
무열(無熱)을 무루라고 한다.
기미(氣味)는 애상응(愛相應)이다.
최상에는 무루도 없다.
‘선한 유루는 정선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선은 깨끗하므로 정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열을 무루라고 한다’고 함은 번뇌를 임시로 열이라고 이름하고 선정[定]에 번뇌가 없는 것을 무루(無漏)라고 한다.
‘기미는 애상응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선(禪)ㆍ무색정이 애상응으로서 이것을 빠짐없이 갖춰 함께 서로 호응하고 함께 행하는 것을 미상응(味相應)이라고 한다.
‘최상에는 무루도 없다’고 함에서 최상이란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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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무루가 없으니 빠르게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세 가지[三種]12)가 있고, 나머지에도 세 가지가 있다.
[문] 선(禪)은 어떠한 성(性)을 소유하는가?
[답] 다섯 갈래로서 각(覺)과 관(觀)이 있고
또한 세 가지 통(痛)이 있다.
약간의 종류와 네 가지 마음[心]이 있으니
소위 이것이 초선이다.
‘다섯 갈래’라고 함은, 이른바 다섯 갈래가 초선을 섭수하고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따라 각ㆍ관ㆍ희ㆍ락ㆍ일심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각은 선정에 들어갈 때에 마땅히 선한 공덕을 생하고, 비로소 거친 마음으로 사유하는 것을 말하고, 관은 마음을 미세하게 상속하고 서로 연결시키는 것을 이름한다. 희(喜)는 선정 중에서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하고, 낙(樂)은 이미 기뻐하는 몸과 마음 중에서 안온하고 쾌락한 것을 말한다. 일심(一心)은 대상 가운데에 마음을 오로지 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선정에 머물 때의 종류들이다. 이 지(枝)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도 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는 초선이다.
‘각과 관이 있다’고 함은 유각과 유관이 곧 초선이라는 것이다.
[문] 다섯 갈래를 받는데 지금의 각과 관은 어떻게 쓰이는가?
[답] 갈래는 선(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다섯 갈래 속에 있다. 더러움과 무기도 역시 각과 관이 있지만 이들은 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세 가지 통이 있다’고 함은 초선에는 낙근과 희근과 호근(護根)의 세 가지 느낌이 있음을 말한다. 통 중에서 낙근은 신통(身痛), 희근은 의지(意地), 호근은 네 가지 식(識)에 있다.
‘약간의 종류’라고 했는데, 범세(梵世) 중에는 약간의 종류가 있어서 위가 있고 아래가 있다. 이것을 구족생처(具足生處)라고 말한다.
12) 이본에는 ‘두 가지[二種]’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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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마음’이란, 초선에 안식ㆍ이식ㆍ신식ㆍ의식의 네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한다.
‘소위 이것이 초선이다’고 함은 곧 이러한 일체의 모든 법이 초선임을 말한 것이다. 이미 초선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제2선을 설명하겠다.
두 가지 통과 약간의 종류가 있으니
2선(禪)에는 네 갈래가 있다.
다섯 갈래는 제3[第三]이니,
이 선에서도 두 가지 통을 말한다.
‘두 가지 통’이란, 제2선에는 희근ㆍ호근의 두 가지 통이 있음을 말한다.
‘약간의 종류’란, 그 중에서 몸에 약간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니, 이미 각과 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마음이 있어, 혹은 때로 희근에 들어가고 혹은 때로 호근에 들어간다. 단지 희근은 근본이고 가장자리에 호근이 있다.
‘2선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함은 제2선에 내정(內淨)ㆍ희ㆍ낙ㆍ일심의 네 가지 갈래가 있음을 말한다. 내정이란 바로 믿음이니, 여읨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미 초선의 떠남을 얻으면 곧 이러한 생각을 지으니, 일체를 여의어야 하고 나머지 갈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런 종류는 제2선에서의 갈래이다.
‘다섯 갈래는 제3이다’고 함은 제3선에는 낙ㆍ호ㆍ염ㆍ지(智)ㆍ일심의 다섯 가지 갈래가 있음을 말한다. 낙은 의식지(意識地) 중의 낙근이고, 호(護)는 이미 즐거워졌으며 즐거움에서 나머지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말하기를 ‘호에는 비록 의근[義]이 있으나 갈래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염은 호의 방편으로서 버리지 않는 것이요, 지(智)는 즐겁지 않게 하는 것이며, 일심은 선정이니, 이런 종류가 제3선 중에서의 갈래이다.
‘이 선에도 두 가지 통을 말한다’고 함은 제3선에 낙근ㆍ호근의 두 가지 통이 있음을 말한다. 낙근은 근본이고, 호근은 가장자리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여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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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第)에는 네 갈래가 있다.
이 갈래는 소위 선(善)을 말하고
다시 그 종류를 나눈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여읜다’고 함에서 들이쉰다는 것은 [숨이] 들어오는 것이고 내쉰다는 것은 [숨이] 나가는 것이다. 이는 제4선 중에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선정의 힘으로 말미암아 몸의 모든 털구멍이 닫히기 때문이다.
‘제4에는 네 갈래가 있다’고 함은 제4선에는 불고불락ㆍ호ㆍ정념(淨念)ㆍ일심의 네 갈래가 있음을 말한다. 고락을 여읜 것을 구함이 불고불락이요,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어떻게 선(禪)은 지와 상응하는가?
[답] 이 갈래는 소위 선(善)을 말하니, 선한 선(禪)은 지상응(枝相應)으로서, 지는 더러움도 아니고 또한 무기도 아니다.
‘또다시 그 종류를 나눈다’고 함은 종류는 곳에 따라 이미 설명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머지 곳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초선은 유각과 유관으로서 네 가지 마음과 같다. 이러한 종류를 말하는 것은 그 밖의 일체의 경지에서는 없다. 제4선에서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여의니, 이 세 가지 가운데 말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미 4선과 4무색정에 대하여 설명했으니, 이제 그 나머지를 설명해야겠다.
[문] 세존께서는 근본의(根本依)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욕을 여의지 않으면 아직 근본의는 없으나 무루의 공덕은 있다. 이 무루의 공덕은 어떠한 지(地)에 속하는가?
[답] 미래선(未來禪)13)에 속한다. 또 세존의 말씀에 세 가지 선정[定]이 있으니, 유각유관(有覺有觀)과 무각소관(無覺少觀)과 무각무관(無覺無觀)이다. 그 중에서 초선은 유각유관이고, 제2선은 무각무관이다. 소위 무각소관정은 어떠한 지에 포섭되는가?
13) 초선에 이르기 직전의 준비과정을 말한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3권 > 7. 정품(定品) > 89 - 98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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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것은 중간선(中間禪)에 포섭된다. 미래선과 중간선의 모습을 이제 설명하겠다.
상응하는 각과 관이 있는 것은
함께 미래선에 해당된다.
관과 상응의 중간이라는 것은
밝은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상응하는 각과 관이 있는 것은 함께 미래선에 해당된다’고 함은 미래선 중에는 각이 있고 관도 있다는 것이다.
‘관과 상응의 중간이라는 것은 밝은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중간선에는 약간의 관이 있고 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점점 마음이 그치는 것이다.
무의(無依)인 것은 두 가지이니
미상응(味相應)은 제외된다.
중선(中禪)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모두 하나의 통을 말하게 된다.
‘무의인 것은 두 가지이니, 미상응은 제외된다’고 함은 미래선은 오로지 선한 유루와 무루라는 것이다. [선한] 유루란 정(淨)이고, 무루란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중선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중간선에는 미(味)ㆍ정(淨)ㆍ무루의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하니, 생사가 머물기 때문이다.
‘모두 하나의 통을 말하게 된다’고 함은 미래선과 중간선은 모두 한 가지 통이 있어서 호근이라는 것이다. 근본지(根本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선정[定]을 설명하였다. 나머지 공덕 중에서 포섭하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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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제(三摩提)가 있고 통(通)이 있으며
무량이 있고 일체를 닦는다.
제입(除入)과 여러 지(智)가 있으니
해탈은 그 중에서 일어난다.
‘삼마제(三摩提, samādhi)’란 세 가지 삼마제, 곧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니, 무루심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통이 있다’고 함은 여의족지(如意足智)ㆍ천이지ㆍ타심통지ㆍ억숙명지ㆍ생사지ㆍ누진통지의 여섯 가지 통이 있음을 말한다.
‘무량’이란 자ㆍ비ㆍ희ㆍ호(護)의 네 가지 무량을 말하며, 한량없는 중생을 경계로 하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말한다.
‘일체를 닦는다’고 함은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을 말하니, 지일체입(地一切入)과 수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일체입과 무량공처일체입ㆍ무량식처일체입이다. 모두 다 해(解)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일체입이다.
‘제입(除入)’이란 여덟 가지 제입을 말한다. 안에 아직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지 않은 부정관(不淨觀)으로, 작은 것을 경계로 하는 것이 첫째요, 무량을 경계로 하는 것이 둘째이며,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고 작은 것을 경계로 하는 것은 셋째이고, 무량을 경계로 하는 것은 넷째이다. 다시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고 청ㆍ황ㆍ적ㆍ백을 관찰하는 제입이 있으니, 경계를 제거하여 맑히므로 제입이라고 말한다.
‘여러 지’란 열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해탈’이란 여덟 가지 해탈을 말한다. 아직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것이 첫째이고,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것이 둘째이며, 깨끗한 것을 사유하는 것이 셋째이고, 네 가지 무색과 멸진정이 있다. 경계를 등진 채 향하지 않으므로 해탈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 일어난다’고 함은 이 모든 공덕은 아홉 가지 경지[地]14)에서 얻
14) 욕계 및 4선ㆍ4무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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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고, 아울러 가운데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말하기를 ‘10지(地)에 호응한다’고 한다].
이미 모든 공덕을 설명하였다. 지(地)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하나의 혜(慧)와 비(悲)와 호(護)와
자(慈)가 있고 또한 5통(通)이 있으니,
4선(禪) 중에 두루 한다고 말하며
여섯 가지 가운데 현지(現智)가 있다.
‘하나의 혜(慧)와 비(悲)와 호(護)와 자(慈)가 있고 또한 5통(通)이 있으니, 4선(禪) 중에 두루 한다고 말한다’고 함은 하나의 지혜인 소위 타심지와 세 가지 무량과 다섯 가지 통은 그 일체의 공덕이 모두 근본 4선 중에 있고 나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섯 가지 가운데 현지가 있다’고 함에서 현지란 법지를 말한다. 이 법지는 여섯 지(地) 중에 있으니, 즉 근본 4선과 미래선과 중간선이다.
제입(除入) 중에서 넷을 말하고
그 중에서 또한 희(喜)가 있는 것과
초해탈과 그리고 두 번째의
공덕은 초선과 2선(禪)이다.
앞의 네 가지 제입과 희 등과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의 공덕은 초선과 제2선 사이에 있고 나머지는 아니다.
그 나머지 네 가지 제입과
한 가지 해탈과 또한
여덟 가지 일체입을 말씀하시어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선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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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네 가지 제입과 정해탈(淨解脫)15)과 앞의 여덟 가지 모든 입은 그 공덕이 제4선 중에 있고 나머지는 아니다.
나머지 해탈[脫]은 이름으로 말하고
두 가지 일체 입도 역시 그러하다.
멸진은 가장 뒤에 있고
나머지는 아홉이니 소위 무루이다.
‘나머지 해탈은 이름으로 말하고, 두 가지 일체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나머지 네 가지 해탈은 자기 이름이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두 가지 일체 입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무량공처해탈과 무량공처일체입은 무량공처 중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비상비비상처에 이른다.
‘멸진은 가장 뒤에 있다’고 함은 멸진정은 비상비비상처에 포섭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아직 그 욕을 여의지 못한 채 또한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아홉이니 소위 무루이다’고 함은 나머지 무루법은 아홉 가지 지(地)에 포섭된다는 말이다. 세 가지 삼마제와 일곱 가지 지(智)와 누진통과 같은 것은 아홉 가지 경지[地]에 포섭되는 것이다. 4선과 세 가지 무색과 미래와 중간의 등지는 열 가지 경지에 포섭된다. 이는 또한 비상비비상처에서도 얻을 수 있으니,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문] 이들 공덕 중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답] 세 가지 해탈은
유루와 무루임을 알아야 한다.
정(定)과 지(智)는 이미 분별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유루이다.
15) 8해탈 중에서 세 번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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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해탈은 유루와 무루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무량공처ㆍ무량식처ㆍ무소유처해탈은 바로 유루와 무루라는 것이다.
‘정과 지는 이미 분별했다’고 함에서 정은「계경품(契經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무루지와 모든 통(通)은「지품(智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모두 유루이다’고 함은 나머지 일체의 공덕은 오로지 유루라는 것이다. 세 가지 통16)과 같은 것은 위의법(威儀法)이기 때문이고, 색ㆍ소리를 받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량은 중생을 연하기 때문이고, 일체 입은 뜻으로 이해하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해탈도 역시 이와 같다. 비상비비상처는 빠른 행이 아니기 때문이고, 상(想)과 지(智)를 멸하고 각과 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제입도 역시 뜻으로 이해하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공덕의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그 성취를 설명하겠다.
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공덕을 성취한다.
낮은 경지를 벗어나 아직 위에 이르지 못했으면
깨끗한 여러 선정을 성취한다.
‘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미선과 상응하는 공덕을 성취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지(地)에서 만약 욕계를 벗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 지에서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낮은 경지 벗어나 아직 위에 이르지 않으면 깨끗한 여러 선정을 성취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욕계의 욕을 여의었으나 아직 범세(梵世)의 위 경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깨끗한 초선과 초선지의 유루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알아야 한다.
위에 머무는 방법 알아야 하니
무루로써 선정[禪]을 성취한다.
16) 신족ㆍ천안ㆍ천이의 셋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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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여 얻는 모든 공덕은
욕이 없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위에 머무는 방법 마땅히 알아야 하니 무루로서 선정을 성취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아래 경지의 욕을 여의면 그는 위 경지에 머물고 또한 아래 경지의 무루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보고 욕을 여읜 범세의 위 경지에 머물면, 무루의 초선과 초선경지의 선정 등 모든 무루 공덕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를 알아야 한다. 세속의 공덕은 태어나는 곳에 따라 묶여 있어도 무루는 끊는 것 속에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곳을 여의면 유루의 공덕을 버려도 무루는 버리지 않는다.
‘구하여 얻는 모든 공덕은 욕이 없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라’고 함은 이미 아래 경지의 욕을 여의면 위의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일체의 공덕은 욕계를 여읠 때에 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의족지ㆍ천안지ㆍ천이지와 같이 무기성의 소유이며, 욕(欲) 또한 멸진정이니, 이는 구하여 얻는 것이지 아래 경지의 욕을 여읠 때에 얻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성취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인연을 설명하겠다. 선정의 종류에 스물셋이 있으니, 여덟 가지는 미상응이고 여덟 가지는 정(淨)이고, 일곱 가지는 무루이다.
[문] 이들 하나하나의 종류는 몇 가지의 원인이 있는가?
[답] 묘한 무루(無漏)ㆍ무염(無染)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인이다.
정(淨)과 미상응(味相應)의 선에는
하나의 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묘한 무루ㆍ무염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인이다’고 함은 하나하나의 무루에는 일곱 가지의 자연인이 있고, 자기 경지의 상응인과 공인(共因)이 있음을 말한다.
‘정과 미상응선에는 하나의 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미상응의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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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미상응의 초선에서 인이고 나머지는 아니다. 그것은 선(善)의 인이 아니니,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경지의 더러운 인이 아니니, 행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정(淨)의 초선은 정의 초선에서 인이 된다. 더러운 인이 아니니,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루의 인도 아니니, 역시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며, 나머지 경지의 정선(淨禪) 인이 아니니, 자기 경지의 과보이고 자기 경지의 묶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남김없이 알아야 한다.
이미 인연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차제연(次第緣)을 설명하겠다.
[문] 하나하나의 차제마다 몇 가지 종류를 일으키는가?
[답] 무루선의 차제에
여섯 가지 선(禪)이 흥기한다.
일곱ㆍ여덟ㆍ아홉ㆍ열 가지 선과
또한 공정(空定)을 일으킨다.
무루 초선의 차제에 여섯 가지 (선정을) 일으키니, 자기 경지의 정선(淨禪) 무루이다. 제2ㆍ제3선도 이와 같다. 무루 무소유처의 차제에 일곱 가지를 생하니, 자기의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넷과 위 경지의 하나이다. 무루 제이선의 차제에 여덟 가지를 생하니,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둘과 위 경지의 넷이다. 무루 무량식처의 차제에 아홉 가지를 생하니,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넷과 위 경지의 셋이다. 나머지 무루의 차제에 열 가지를 생하니,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넷과 위 경지의 넷이다.
정선[淨]은 여섯에서부터 일곱ㆍ여덟이 있고
아홉과 열과 열하나를 생한다.
미상응의 모든 선(禪)은
둘을 일으켜 마침내는 열에서 그친다.
‘정선은 여섯에서부터 일곱과 여덟이 있고, 아홉과 열과 열하나를 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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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함은 정선의 경우 비상비비상처의 차제에 여섯을 생하니 자기 경지의 미상응과 정선 아래 경지의 네 가지인 정선과 무루선의 무소유처와 무량식처이다. 미상응이 아니니, 욕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남김없이 알아야 하니, 일체는 자기 경지의 미상응이다.
‘미상응의 모든 선은 둘을 일으켜 마침내는 열에서 그친다’고 함은 미상응의 선의 차제에 둘을 생하니 자기 경지의 미상응과 정선이고 나머지는 생하지 않으니 각각 다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일체는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하나의 정선이다[말하기를 ‘아래 경지의 하나의 정선(淨禪)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일체의 미상응은 죽을 때에 생한다.
이미 차제연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연연(緣緣)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문] 하나하나마다 어떠한 종류를 연하는가?
[답] 정선[淨]과 무루선은
반드시 일체의 경지[地]를 연하며
더러움과 상응하는 선은
혼자 자기 경지를 연한다.
‘정선과 무루선은 반드시 일체의 경지를 연한다’고 함은 정선과 무루선은 일체의 경지에서 온갖 종류를 연한다는 것이다.
‘더러움과 상응하는 선은 혼자 자기 경지를 연한다’고 함은 미상응의 선정은 자기 경지의 미상응선과 정선을 연한다는 것이다. 무루는 아니니, 애(愛)는 무루를 연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경지[地]를 즐기지 않는다.
무색은 힘이 있어
밑의 유루지를 연하는 일이 없다.
선한 유(有)의 근본지이고
더러움은 미선(味禪)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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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은 힘이 있어 밑의 유루지를 연하는 것이 없다’고 함은 무색정은 아래 경지의 유루 선정을 연할 수 없으니 극히 적정(寂靜)하기 때문이다.
[문] 왜 무색은 아래 경지의 유루법을 연할 수 없다고 하는가?
[답] 선한 유의 근본지이다. 정선(淨禪)과 무루선의 근본의 무색은 곧 자신의 경지를 연하고 위의 경지도 연하지 아래 경지를 연하는 것이 아니다.
‘더러움은 미선과 같다’고 함은 미상응에서와 같이 무색을 말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색계에서
무량 등의 공덕은
반드시 욕계를 연한다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색계의 나머지 공덕인 무량 등과 일체 입ㆍ제입 그리고 해탈과 같은 것은 오직 욕계를 연한다는 것이다.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중생과 청(靑) 등의 모든 색을 연하니, 이는 곧 욕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신통은 두 가지 경계[界]를 연하기 때문이다.
[문] 세존께서 말씀하신 훈선(勳禪)은 어떤 것인가?
[답] 훈은 일체 4선(禪)의 무루인 것으로서, 유루에서 닦으나 이는 무루의 힘 때문에 정거(淨居)의 과보를 받는다.17)
[문] 만약 네 가지 선정을 모두 훈수한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 세 가지 선정 가운데에는 정거의 과가 없는가?
[답] 능히 모든 선을 훈수할 때는
제4선(第四禪)에 의지한다.
세 경지[地]의 애욕이 다하므로
정거와 과실천(果實天)18)에 태어난다.
17) 이른바 정거천(淨居天, Śuddhāvāsa)에 나는 것을 말한다.
18) 범어로는 Bṛhatphala. 광과천(廣果天)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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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제4선을 얻으면 능히 선을 훈수할 수 있게 된다. 제4선을 먼저 훈수하고 나머지는 뒤에 닦으니, 이른바 제4선을 얻어 3선(禪)의 욕을 여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경지에서는 정거[의 과보]가 없으며, 과실천에 태어난다.
[문] 세존께서는 원지(願智)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답] 집착 없는 성품 동요하지 않아
이로써 일체의 선정을 얻는다.
그것은 선정의 힘에서 나오므로
맨 위의 4선(禪)을 일으킨다.
그 안에서 만약 그의 마음에 공덕이 생하면, 원지(願智)ㆍ부쟁(不諍)19)ㆍ변(辯)을 우두머리로 하는 모든 공덕이 있게 된다. 원지는 원하는 대로 입정(入定)하여 혹은 과거, 혹은 미래, 혹은 현재, 혹은 유위, 혹은 무위, 이 모두 다 아는 것이다. 부쟁이란 다른 것에 대해 마음으로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면 곧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변은 모든 법의 뜻과 맛을 결정하여 의심 없고 거리낌 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문] 이들 원지ㆍ부쟁ㆍ변은 어떠한 경지에 포섭되는가?
[답]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으니
무쟁은 다섯 가지 경지에 의지한다.
법ㆍ사변(辭辯)은 둘에 의지하고
두 가지 변은 아홉에 의지한다.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다’고 함은 원지는 세 가지 경지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제4선과 초선과 욕계이다. 그리고 제4선에 들어가면 초선과 욕계를 알게 된다.
19) 원문의 부정(不淨)을 부쟁(不諍)으로 고쳐 읽는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3권 > 7. 정품(定品) > 89 - 98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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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것은 중간선(中間禪)에 포섭된다. 미래선과 중간선의 모습을 이제 설명하겠다.
상응하는 각과 관이 있는 것은
함께 미래선에 해당된다.
관과 상응의 중간이라는 것은
밝은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상응하는 각과 관이 있는 것은 함께 미래선에 해당된다’고 함은 미래선 중에는 각이 있고 관도 있다는 것이다.
‘관과 상응의 중간이라는 것은 밝은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중간선에는 약간의 관이 있고 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점점 마음이 그치는 것이다.
무의(無依)인 것은 두 가지이니
미상응(味相應)은 제외된다.
중선(中禪)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모두 하나의 통을 말하게 된다.
‘무의인 것은 두 가지이니, 미상응은 제외된다’고 함은 미래선은 오로지 선한 유루와 무루라는 것이다. [선한] 유루란 정(淨)이고, 무루란 곧 번뇌가 없는 것이다.
‘중선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중간선에는 미(味)ㆍ정(淨)ㆍ무루의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하니, 생사가 머물기 때문이다.
‘모두 하나의 통을 말하게 된다’고 함은 미래선과 중간선은 모두 한 가지 통이 있어서 호근이라는 것이다. 근본지(根本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선정[定]을 설명하였다. 나머지 공덕 중에서 포섭하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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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제(三摩提)가 있고 통(通)이 있으며
무량이 있고 일체를 닦는다.
제입(除入)과 여러 지(智)가 있으니
해탈은 그 중에서 일어난다.
‘삼마제(三摩提, samādhi)’란 세 가지 삼마제, 곧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니, 무루심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통이 있다’고 함은 여의족지(如意足智)ㆍ천이지ㆍ타심통지ㆍ억숙명지ㆍ생사지ㆍ누진통지의 여섯 가지 통이 있음을 말한다.
‘무량’이란 자ㆍ비ㆍ희ㆍ호(護)의 네 가지 무량을 말하며, 한량없는 중생을 경계로 하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말한다.
‘일체를 닦는다’고 함은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을 말하니, 지일체입(地一切入)과 수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일체입과 무량공처일체입ㆍ무량식처일체입이다. 모두 다 해(解)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일체입이다.
‘제입(除入)’이란 여덟 가지 제입을 말한다. 안에 아직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지 않은 부정관(不淨觀)으로, 작은 것을 경계로 하는 것이 첫째요, 무량을 경계로 하는 것이 둘째이며,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고 작은 것을 경계로 하는 것은 셋째이고, 무량을 경계로 하는 것은 넷째이다. 다시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고 청ㆍ황ㆍ적ㆍ백을 관찰하는 제입이 있으니, 경계를 제거하여 맑히므로 제입이라고 말한다.
‘여러 지’란 열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해탈’이란 여덟 가지 해탈을 말한다. 아직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것이 첫째이고,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것이 둘째이며, 깨끗한 것을 사유하는 것이 셋째이고, 네 가지 무색과 멸진정이 있다. 경계를 등진 채 향하지 않으므로 해탈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 일어난다’고 함은 이 모든 공덕은 아홉 가지 경지[地]14)에서 얻
14) 욕계 및 4선ㆍ4무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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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고, 아울러 가운데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말하기를 ‘10지(地)에 호응한다’고 한다].
이미 모든 공덕을 설명하였다. 지(地)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하나의 혜(慧)와 비(悲)와 호(護)와
자(慈)가 있고 또한 5통(通)이 있으니,
4선(禪) 중에 두루 한다고 말하며
여섯 가지 가운데 현지(現智)가 있다.
‘하나의 혜(慧)와 비(悲)와 호(護)와 자(慈)가 있고 또한 5통(通)이 있으니, 4선(禪) 중에 두루 한다고 말한다’고 함은 하나의 지혜인 소위 타심지와 세 가지 무량과 다섯 가지 통은 그 일체의 공덕이 모두 근본 4선 중에 있고 나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섯 가지 가운데 현지가 있다’고 함에서 현지란 법지를 말한다. 이 법지는 여섯 지(地) 중에 있으니, 즉 근본 4선과 미래선과 중간선이다.
제입(除入) 중에서 넷을 말하고
그 중에서 또한 희(喜)가 있는 것과
초해탈과 그리고 두 번째의
공덕은 초선과 2선(禪)이다.
앞의 네 가지 제입과 희 등과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의 공덕은 초선과 제2선 사이에 있고 나머지는 아니다.
그 나머지 네 가지 제입과
한 가지 해탈과 또한
여덟 가지 일체입을 말씀하시어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선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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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네 가지 제입과 정해탈(淨解脫)15)과 앞의 여덟 가지 모든 입은 그 공덕이 제4선 중에 있고 나머지는 아니다.
나머지 해탈[脫]은 이름으로 말하고
두 가지 일체 입도 역시 그러하다.
멸진은 가장 뒤에 있고
나머지는 아홉이니 소위 무루이다.
‘나머지 해탈은 이름으로 말하고, 두 가지 일체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나머지 네 가지 해탈은 자기 이름이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두 가지 일체 입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무량공처해탈과 무량공처일체입은 무량공처 중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비상비비상처에 이른다.
‘멸진은 가장 뒤에 있다’고 함은 멸진정은 비상비비상처에 포섭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아직 그 욕을 여의지 못한 채 또한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아홉이니 소위 무루이다’고 함은 나머지 무루법은 아홉 가지 지(地)에 포섭된다는 말이다. 세 가지 삼마제와 일곱 가지 지(智)와 누진통과 같은 것은 아홉 가지 경지[地]에 포섭되는 것이다. 4선과 세 가지 무색과 미래와 중간의 등지는 열 가지 경지에 포섭된다. 이는 또한 비상비비상처에서도 얻을 수 있으니,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문] 이들 공덕 중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답] 세 가지 해탈은
유루와 무루임을 알아야 한다.
정(定)과 지(智)는 이미 분별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유루이다.
15) 8해탈 중에서 세 번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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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해탈은 유루와 무루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무량공처ㆍ무량식처ㆍ무소유처해탈은 바로 유루와 무루라는 것이다.
‘정과 지는 이미 분별했다’고 함에서 정은「계경품(契經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무루지와 모든 통(通)은「지품(智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모두 유루이다’고 함은 나머지 일체의 공덕은 오로지 유루라는 것이다. 세 가지 통16)과 같은 것은 위의법(威儀法)이기 때문이고, 색ㆍ소리를 받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량은 중생을 연하기 때문이고, 일체 입은 뜻으로 이해하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해탈도 역시 이와 같다. 비상비비상처는 빠른 행이 아니기 때문이고, 상(想)과 지(智)를 멸하고 각과 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제입도 역시 뜻으로 이해하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공덕의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그 성취를 설명하겠다.
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공덕을 성취한다.
낮은 경지를 벗어나 아직 위에 이르지 못했으면
깨끗한 여러 선정을 성취한다.
‘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미선과 상응하는 공덕을 성취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지(地)에서 만약 욕계를 벗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 지에서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낮은 경지 벗어나 아직 위에 이르지 않으면 깨끗한 여러 선정을 성취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욕계의 욕을 여의었으나 아직 범세(梵世)의 위 경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깨끗한 초선과 초선지의 유루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알아야 한다.
위에 머무는 방법 알아야 하니
무루로써 선정[禪]을 성취한다.
16) 신족ㆍ천안ㆍ천이의 셋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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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여 얻는 모든 공덕은
욕이 없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위에 머무는 방법 마땅히 알아야 하니 무루로서 선정을 성취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아래 경지의 욕을 여의면 그는 위 경지에 머물고 또한 아래 경지의 무루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보고 욕을 여읜 범세의 위 경지에 머물면, 무루의 초선과 초선경지의 선정 등 모든 무루 공덕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를 알아야 한다. 세속의 공덕은 태어나는 곳에 따라 묶여 있어도 무루는 끊는 것 속에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곳을 여의면 유루의 공덕을 버려도 무루는 버리지 않는다.
‘구하여 얻는 모든 공덕은 욕이 없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라’고 함은 이미 아래 경지의 욕을 여의면 위의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일체의 공덕은 욕계를 여읠 때에 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의족지ㆍ천안지ㆍ천이지와 같이 무기성의 소유이며, 욕(欲) 또한 멸진정이니, 이는 구하여 얻는 것이지 아래 경지의 욕을 여읠 때에 얻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성취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인연을 설명하겠다. 선정의 종류에 스물셋이 있으니, 여덟 가지는 미상응이고 여덟 가지는 정(淨)이고, 일곱 가지는 무루이다.
[문] 이들 하나하나의 종류는 몇 가지의 원인이 있는가?
[답] 묘한 무루(無漏)ㆍ무염(無染)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인이다.
정(淨)과 미상응(味相應)의 선에는
하나의 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묘한 무루ㆍ무염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인이다’고 함은 하나하나의 무루에는 일곱 가지의 자연인이 있고, 자기 경지의 상응인과 공인(共因)이 있음을 말한다.
‘정과 미상응선에는 하나의 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미상응의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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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미상응의 초선에서 인이고 나머지는 아니다. 그것은 선(善)의 인이 아니니,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경지의 더러운 인이 아니니, 행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정(淨)의 초선은 정의 초선에서 인이 된다. 더러운 인이 아니니,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루의 인도 아니니, 역시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며, 나머지 경지의 정선(淨禪) 인이 아니니, 자기 경지의 과보이고 자기 경지의 묶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남김없이 알아야 한다.
이미 인연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차제연(次第緣)을 설명하겠다.
[문] 하나하나의 차제마다 몇 가지 종류를 일으키는가?
[답] 무루선의 차제에
여섯 가지 선(禪)이 흥기한다.
일곱ㆍ여덟ㆍ아홉ㆍ열 가지 선과
또한 공정(空定)을 일으킨다.
무루 초선의 차제에 여섯 가지 (선정을) 일으키니, 자기 경지의 정선(淨禪) 무루이다. 제2ㆍ제3선도 이와 같다. 무루 무소유처의 차제에 일곱 가지를 생하니, 자기의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넷과 위 경지의 하나이다. 무루 제이선의 차제에 여덟 가지를 생하니,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둘과 위 경지의 넷이다. 무루 무량식처의 차제에 아홉 가지를 생하니,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넷과 위 경지의 셋이다. 나머지 무루의 차제에 열 가지를 생하니,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넷과 위 경지의 넷이다.
정선[淨]은 여섯에서부터 일곱ㆍ여덟이 있고
아홉과 열과 열하나를 생한다.
미상응의 모든 선(禪)은
둘을 일으켜 마침내는 열에서 그친다.
‘정선은 여섯에서부터 일곱과 여덟이 있고, 아홉과 열과 열하나를 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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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함은 정선의 경우 비상비비상처의 차제에 여섯을 생하니 자기 경지의 미상응과 정선 아래 경지의 네 가지인 정선과 무루선의 무소유처와 무량식처이다. 미상응이 아니니, 욕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남김없이 알아야 하니, 일체는 자기 경지의 미상응이다.
‘미상응의 모든 선은 둘을 일으켜 마침내는 열에서 그친다’고 함은 미상응의 선의 차제에 둘을 생하니 자기 경지의 미상응과 정선이고 나머지는 생하지 않으니 각각 다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일체는 자기 경지의 둘과 아래 경지의 하나의 정선이다[말하기를 ‘아래 경지의 하나의 정선(淨禪)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일체의 미상응은 죽을 때에 생한다.
이미 차제연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연연(緣緣)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문] 하나하나마다 어떠한 종류를 연하는가?
[답] 정선[淨]과 무루선은
반드시 일체의 경지[地]를 연하며
더러움과 상응하는 선은
혼자 자기 경지를 연한다.
‘정선과 무루선은 반드시 일체의 경지를 연한다’고 함은 정선과 무루선은 일체의 경지에서 온갖 종류를 연한다는 것이다.
‘더러움과 상응하는 선은 혼자 자기 경지를 연한다’고 함은 미상응의 선정은 자기 경지의 미상응선과 정선을 연한다는 것이다. 무루는 아니니, 애(愛)는 무루를 연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경지[地]를 즐기지 않는다.
무색은 힘이 있어
밑의 유루지를 연하는 일이 없다.
선한 유(有)의 근본지이고
더러움은 미선(味禪)과 같다.
[97 / 142] 쪽
‘무색은 힘이 있어 밑의 유루지를 연하는 것이 없다’고 함은 무색정은 아래 경지의 유루 선정을 연할 수 없으니 극히 적정(寂靜)하기 때문이다.
[문] 왜 무색은 아래 경지의 유루법을 연할 수 없다고 하는가?
[답] 선한 유의 근본지이다. 정선(淨禪)과 무루선의 근본의 무색은 곧 자신의 경지를 연하고 위의 경지도 연하지 아래 경지를 연하는 것이 아니다.
‘더러움은 미선과 같다’고 함은 미상응에서와 같이 무색을 말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색계에서
무량 등의 공덕은
반드시 욕계를 연한다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색계의 나머지 공덕인 무량 등과 일체 입ㆍ제입 그리고 해탈과 같은 것은 오직 욕계를 연한다는 것이다.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중생과 청(靑) 등의 모든 색을 연하니, 이는 곧 욕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신통은 두 가지 경계[界]를 연하기 때문이다.
[문] 세존께서 말씀하신 훈선(勳禪)은 어떤 것인가?
[답] 훈은 일체 4선(禪)의 무루인 것으로서, 유루에서 닦으나 이는 무루의 힘 때문에 정거(淨居)의 과보를 받는다.17)
[문] 만약 네 가지 선정을 모두 훈수한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 세 가지 선정 가운데에는 정거의 과가 없는가?
[답] 능히 모든 선을 훈수할 때는
제4선(第四禪)에 의지한다.
세 경지[地]의 애욕이 다하므로
정거와 과실천(果實天)18)에 태어난다.
17) 이른바 정거천(淨居天, Śuddhāvāsa)에 나는 것을 말한다.
18) 범어로는 Bṛhatphala. 광과천(廣果天)이라고도 한다.
[98 / 142] 쪽
만약 제4선을 얻으면 능히 선을 훈수할 수 있게 된다. 제4선을 먼저 훈수하고 나머지는 뒤에 닦으니, 이른바 제4선을 얻어 3선(禪)의 욕을 여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경지에서는 정거[의 과보]가 없으며, 과실천에 태어난다.
[문] 세존께서는 원지(願智)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답] 집착 없는 성품 동요하지 않아
이로써 일체의 선정을 얻는다.
그것은 선정의 힘에서 나오므로
맨 위의 4선(禪)을 일으킨다.
그 안에서 만약 그의 마음에 공덕이 생하면, 원지(願智)ㆍ부쟁(不諍)19)ㆍ변(辯)을 우두머리로 하는 모든 공덕이 있게 된다. 원지는 원하는 대로 입정(入定)하여 혹은 과거, 혹은 미래, 혹은 현재, 혹은 유위, 혹은 무위, 이 모두 다 아는 것이다. 부쟁이란 다른 것에 대해 마음으로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면 곧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변은 모든 법의 뜻과 맛을 결정하여 의심 없고 거리낌 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문] 이들 원지ㆍ부쟁ㆍ변은 어떠한 경지에 포섭되는가?
[답]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으니
무쟁은 다섯 가지 경지에 의지한다.
법ㆍ사변(辭辯)은 둘에 의지하고
두 가지 변은 아홉에 의지한다.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다’고 함은 원지는 세 가지 경지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제4선과 초선과 욕계이다. 그리고 제4선에 들어가면 초선과 욕계를 알게 된다.
19) 원문의 부정(不淨)을 부쟁(不諍)으로 고쳐 읽는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3권 > 7. 정품(定品) > 99 - 108쪽
K.959 (28-355), T.1550 (28-809)
[99 / 142] 쪽
‘무쟁은 다섯 가지 경지에 의지한다’고 함은, 무쟁은 다섯 가지 경지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 4선의 넷과 욕계로서, 일체를 다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법ㆍ사변은 둘에 의지한다’고 함에서 법변은 미(味)를 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욕계와 범천세로서 위의 경지는 아니니, [위의 경지는] 각과 관을 여읜 것이기 때문이다. 사변은 미를 만들어 내는 지혜를 말한다. 그것도 역시 두 가지 경지 중에서 얻을 수 있으니, 욕계와 범천세이다.
‘두 가지 변은 아홉 가지에 의지한다’고 함은 의변(義辯)과 응변(應辯)은 아홉 가지 경지 중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니, 네 가지 선(禪)과 네 가지 무색과 욕계이다.
이미 초선을 설명했으니, 마땅히 앞에서 설명한 미래선과 중간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는 초선과 한 권속이기 때문이다.
[문] 어떻게 하여 이 선정[定]을 얻는가?
[답] 욕을 끊고 또한 다시 태어나서
깨끗한 선을 얻는다.
더럽게 오염되어 물러나는 경우와 [다른 경지에] 태어나서도
무루만이 오직 욕을 끊는다.
‘욕을 끊고 또한 다시 태어나서 깨끗한 선을 얻는다’고 함은 깨끗한 초선은 두 때에 얻는다는 것이다. 욕을 여읠 때와 위의 경지에서 죽어서 범천세에 태어날 때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다 알아야만 한다.
‘더럽게 오염되어 물러나는 경우와 [다른 경지에] 태어난다’고 했는데, 더러움의 미상응은 물러날 때에 얻으니 만약 욕계와 범천세의 얽매임으로 인해 물러나면 그때에 미상응의 초선을 얻으며, 태어날 때에 얻는 것은 만약 위의 경지에서 목숨이 끝나 욕계와 범천세에 태어나면 이때에 미상응의 초선을 얻는다. 이와 같이 일체를 다 알아야만 한다.
‘무루만이 오직 욕을 끊는 것이다’고 함은 무루는 오직 욕을 끊을 때에 얻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인이 욕을 여의게 되면 그때에 무루의 초선을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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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이와 같이 일체를 모두 알아야만 한다.
[문] 이들 공덕이 어떻게 능히 번뇌를 제거하는가?
[답] 무루가 번뇌를 제거하는 것도
또한 정(定)의 중간이고
일체의 선정의 중간은
호근과 상응한다.
‘무루가 번뇌를 제거한다’고 함은 무루의 초선 등 여덟 가지 지(地)20)에서 번뇌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를 모두 알아야만 한다.
‘또한 정의 중간’이라고 했는데, 정의 중간이란 말하자면 아래 경지의 욕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방편도 때문에 끝내 근본을 얻지 못하고, 또 아직 욕계를 여의지도 못한다. 나머지는 제거할 수 없다.
‘일체의 선정의 중간은 호근과 상응한다’고 함은 온갖 선정의 중간은 호근 상응으로서 결국 기쁨을 얻지 못하고 또한 뜻을 얻는 데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문] 변화하는 마음에 몇 가지가 있는가? 말하자면 여의족이 있어 능히 변화한다.
[답] 여덟 가지이니, 네 가지 선과(禪果)의 욕계와 네 가지 선과의 초선지(初禪地)이다.
[문] 그것은 무엇이 성취하는가?
[답] 아래 경지의 변화하는 마음을
성취하는 것은 그 종류의 과이다.
만약 세 가지 마음에 합하면
위의 지라고 말해야 한다.
20) 4선과 4무색을 가리킨다.
[101 / 142] 쪽
‘아래 경지의 변화하는 마음을 성취하는 것은 그 종류의 결과이다’라고 함은 만약 선(禪)을 성취하면 그 결과인 아래 경지의 변화하는 마음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문] 설명한 것과 같이 초선에는 네 가지 마음21)이 있어서 위의 경지에 머물면서 들으려 하고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여 보고 듣는가?
[답] 범세지(梵世地)의 식별[識]이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문] 그것은 어떠한 때에 성취하는가?
[답] 만약 세 가지 마음에 합하면 위의 경지라고 말해야 한다. 만약 때로 혹은 안식 혹은 비식 혹은 이식 혹은 신식의 식별이 눈앞에 드러난다면, 이때에 그 식별을 성취한다. 만약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곧 멸하여 이때에는 성취하지 못한다.
21)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의 넷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