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Awyuna/연습장166
두 민족의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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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어: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 라틴어: Regnum Poloniae Magnusque Ducatus Lithuania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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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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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기뻐하라, 오 폴란드 어머니 | |||
1619년 전성기였던 봉신국 (밝은 녹색)을 포함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녹색) | ||||
수도 | 크라쿠프[5] (1569년 ~ 1793년) (사실상 1569년 ~ 1596년) 바르샤바[5] (1793년 ~ 1795년) (사실상 1596년 ~ 1795년) | |||
정치 | ||||
정치체제 | 의회군주제 | |||
입법부 | 일반 세임 | |||
시대 구분 | 근세 | |||
지리 | ||||
1618년 어림 면적 | 1000000[10][11][12] | |||
인문 | ||||
공용어 | 공식: 폴란드어 및 라틴어 | |||
지역어 | ||||
종교 | ||||
국교 | 공식: 로마 가톨릭교회[13] | |||
종교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라틴어: Respublica Poloniae, 폴란드어: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 리투아니아어: Abiejų Tautų Respublika) 혹은 폴란드 제1공화국 또는 2민족 공화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물적국가 합동에 의해 1569년 성립된 복합 군주제 국가이다. 16, 17세기 유럽세계에서 가장 광대하며 팽대한 인구를 갖고 있는 국가 중 하나였다[14][15][16].
이 연합 국가의 정치 시스템은 왕권이 법과 귀족계급(슐라흐타;szlachta)에 의해 지배된 입법부(세임;Sejm)에 의해 철저하게 제한되었다는 특이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각 귀족 민주정(Noble's democracy) 혹은 황금의 자유(Golden Freedom)라고 불리었다.
이 정치 시스템은 현대적인 개념을 넣는다면 넓은 의미의 민주주의[17], 입헌군주제[18][19][20], 연방제[21]의 선구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었다. 2개의 구성국은 공식적으로는 평등한 관계였으나, 실제로는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의 지배국이었다[22]. 공화국의 인구 구성은 민족적, 종교적인 다양성이 매우 현저하게 드러났기에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23], 동시대에 있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nce)이 실현되었다[24].
황금기였던 시기는 수 십년동안에 불과했고[25][26], 공화국은 17세기 중엽 이후 정치적[20][27], 군사적, 경제적인 쇠퇴[28]가 계속되어 1795년 강대화된 주변 절대주의 국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영토 분할에 의해 국가 자체가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소멸까지의 기간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기 공화국은 정치적인 대 개혁을 성공리에 완수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헌법 중 하나를 탄생시켰다[29].
명칭
편집연방의 정식 명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폴란드어: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 리투아니아어: 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 라틴어: Serenissima Res Publica Coronae Regni Poloniae Magnique Ducatus Lithuaniae)이다. 18세기 이전은 라틴어의 명칭 Regnum Poloniae Magnique Ducatus Lithuaniae 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또한 17세기 이후에는 가장 고귀한 연합/폴란드 공화국(폴란드어: Najjaśniejsza Rzeczpospolita Polska, 라틴어: Serenissima Res Publica Poloniae이 대외적인 나라 명칭으로 일반적인 이름이 되었다. 한편 폴란드 국내에는 공화국(폴란드어: Rzeczpospolita, 루테니아어:Рэч Паспалітая, 리투아니아어: Žečpospolita) 이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외국인들은 흔히 전체적인 부분에서 머리부분만을 잘라 단순하게 폴란드라고 불렀다.
근년에 들어 일반화되기 시작한 다민족 공화국이란 호칭은 비아카데미계(non-academic)의 역사가 파베우 야세니츠아(Paweł Jasienica)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로 연방이 존재했던 시기에는 사용된 일은 없다[30].
역사
편집1569년 루블린 합병으로 시작된 공화국의 창출은 야기에우워 왕조 최후의 국왕이자 대공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에 의해 세습 왕권을 선거 군주제(elective monarchy)로부터 지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란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1572년 붕어한 후 이어진 3년간의 공위기간(interregnum)에 이 연합체제의 조정이 이루어졌고, 귀족계급(슐라흐타)의 권력을 강화하는 입헌체제 및 완전한 선거 군주제가 기능하게 되었다.
연방의 황금 시대는 17세기 전반에 찾아왔다. 귀족들이 지배한 강력한 의회(세임)는 30년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보류하여 유럽 세계의 대부분이 휘말렸던 심각한 종교전쟁이란 참사로부터 자국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연방은 스웨덴,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들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 주변 여러 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확대정책을 개시했다. 17세기 초두에는 동란 시대에 빠져 약체화된 러시아에 대한 몇번의 침략을 벌였고, 연방의 군대는 1610년 9월 27일부터 1612년 11월 4일 함락될 때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통치했다.
연방의 위세는 1648년 이후에 받은 2번의 충격에 의해 쇠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충격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규모였던 코사크 반란이었다. 동부 국경의 크레시(Kresy)에서 일어난 이 흐멜니츠키 봉기는 크림 한국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반란자가 1654년 러시아의 차르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사태[31]에 이르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또 하나의 충격은 1655년 스웨덴에 의한 침략으로 대홍수(트란실바니아의 지배자 라코치 제르시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로 알려졌다. 이 침략은 스웨덴 왕가였던 바사 왕조 출신의 선거 군주들의 스웨덴에 대한 적대 정책이 원인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 약체화된 연방은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동맹을 맺은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다. 1683년 빈 전투는 250년에 걸쳐 지속된 기독교 세계=유럽과 이슬람 세계=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기간 이어진 항쟁의 역사에 있어 최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 무슬림 측의 위협은 여러 번 이어졌기 때문에 연방은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Antemurale Christianitatis (forefront of Christianity)[21]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뒤이어 일어난 16년에 걸친 대투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의 국경은 영구적으로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두 번 다시 중부 유럽에 위협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한편 연방에 있어 연방의 존재감을 주변 여러 나라에 인지시키는 일은 성공했으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기타 주변 여러 나라 사이와 투쟁 및 국내 문제에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시적인 공화국은 중흥은 오히려 주변 기독교 국가와의 긴장감을 초래하는 일도 빈번하게 되었다. 또 얀 3세에 의한 내정개혁은 폴란드 의회의 기능정지로 인해 소멸되고, 왕권의 약체화를 진행시키는 일이 되어, 주변 여러 나라에 의한 내정간섭의 원인이 되었다.
18세기까지 공화국은 수많은 국내 문제에 직면하고, 또한 여러 외국의 영향력에 흔들리게 되었다. 정치 시스템의 정지는 공화국을 무정부사태의 직전까지 몰아넣게 되었다. 5월 3일 헌법의 제정을 그 정점으로 4년 세임(1788년-1792년)등의 개혁의 시도는 뒷걸음치며 사라진 것이 되었고, 연방은 주변 여러 나라였던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3번의 영토 분할을 통해 통치되면서 모든 영토를 잃었다. 1795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유럽의 지도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다시 손에 넣게 된 것은 1918년이었으며, 그것도 별개로 독립한 민족국가로써였다.
국가 조직과 정치
편집황금의 자유
편집공화국의 정치원칙은 우리의 나라는 국왕의 통괄 아래에 있는 공화국이다 라는 것이다. 대법관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는 이 원칙을 국왕은 군림하더라도 통치하지 않는다(Rex regnat et non gubernat)라고 요약 했다. 연방은 선거 군주, 원로원의 제가, 대의제의 의회였던 세임(Sejm)을 갖고 있었다. 국왕은 헨리크 조항 및 선거시에 받아들인 파크타 콘벤타(pacta conventa)에 의해 제정된 공화국시민(=슐라흐타)의 여러 권리를 존중하도록 의무화 되었다.
왕권은 강대한 귀족계급의 권력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각각의 새로운 국왕은 폴란드의 정치시스템(전례없는 종교적 관용)의 근간을 이루던 헨리크 조항에 서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헨리크 조항은 파크타 콘벤타와 만나 합쳐지게 되었을 때, 선거왕이 맹세하는 명확한 계약이란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 국왕은 귀족계급에 의해 제어되어 파트너의 성격으로 내려지게 되었고, 항상 원로원 의원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연방의 정치시스템으로써 "황금의 자유"(폴란드어: Zlota Wolność, 1573년부터 사용된 말)는 아래의 여러 요소를 기초로 하고 있다.
- 자유 선거 – 국왕선출은 투표를 희망하는 모든 슐라흐타에 의해 자유선거로 치러진다.
- 세임 – 국왕에 의해 2년에 한번 소집되는 공화국의 대의제의회.
- 파크타 콘벤타(라틴어) – 즉위때 국왕이 공화국정부 사이에 맺어진 통치계약. 여러 권리의 청원도 이루어진다. 국왕의 정치행동을 속박하고, 초기 헨리크 조항에서 유래되었다.
- 로코슈(rokosz;저항권 – 귀족에게 보장된 여러 권리가 국왕에게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질 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권리.
- 리베룸 베토(liberum veto;라틴어) – 세임의 결의에서 다수파의 결정을 대의원 1명의 반대에 의해 부결될 수 있는 권리. 세임의 회기 중 모든 법안을 폐기시키는 "무제한의 거부권"으로 악명이 높다. 17세기 후반의 위기시대에 들어서 리베룸 베토는 지방의회(세이미크;sejmiks)에도 적용되었다.
- 콘페데라차(konfederacja(라틴어;confederatio) – 공통의 정치목적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는 권리.
3 지역(후에 설명) 정도가 연방내의 자치령으로 권리를 보장받았다[32]. 각 지역에는 각각 지방의회(세이미크)가 설치되었다. 세이미크는 국가입법부(세임)에서 보낸 대의원(poseł)을 선출하고, 지시서에 의해 대의원에게 여러 가지 요구, 제안을 실행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왕관령이라고 부른다)과는 별개로 군대, 국고, 관직체계를 조직했다[33].
황금의 자유는 당시로써는 국가에 특이한 성격을 주었으나, 동시대에 베네치아 공화국[34]과 같은 도시 국가가 비슷한 정치 시스템을 채용하였다(양국은 "가장 조용한 공화국"을 자칭하는 점도 비슷하다). 유럽 여러 나라가 중앙 집권화, 절대 군주제, 종교 전쟁 및 왕조에 의한 투쟁에 직면하던 시기, 연방은 지방분권[21], 국가연합과 연방, 민주주의, 종교적 관용 등에서 평화주의까지도 경험했다. 슐라흐타가 여러 번 국왕에 의한 전쟁계획을 폐기시킨 것은 민주적 평화론에 관련한 논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35].
이 정치 시스템은 기타 계급과 군주제에 입각한 정치 시스템에 대해 슐라흐타 귀족 계급의 독점적인 승리에 유래한다. 이 시대 슐라흐타는 미하일 노비를 시작으로 충분한 특권을 축적해 어떤 왕도 그들의 지배를 힘으로 누르려는 일은 없었다. 연방의 정치 시스템은 단순하게 분류하기엔 적당하지 않지만 한편 아래와 같은 정의가 붙여진 것과 혼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 광대한 자치령을 영역 내에 포함한 국가연합이 아닌 연방. 공화국을 국가연합이 연방체제에 있다고 한정한 것.
- 과두 정치[21]. 슐라흐타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 계층은 인구의 약 10%을 차지하고 있어, 소수자에 의한 지배라는 이미지가 있다.
- 모든 슐라흐타에게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준 민주정치. 그들의 거점인 세임이 입법(새로운 법의 채택), 외교, 선전포고, 과세(기존 세제의 변경, 새로운 세제의 제정)등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국왕에게 반대하기도 했다. 연방은 당시 유럽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높은 약 10%의 참정권자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1831년 시점에서 인구의 약 1%, 1867년 영국은 약 3%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진것에 불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 선거 군주제. 슐라흐타에 의해 선출된 국왕, 말하자면 세습군주가 아닌 국왕이 국가의 수장이 된 것.
- 입헌군주제, 말하자면 군주가 파크타 코벤타 및 기타 법률에 의해 계약했다면, 슐라흐타는 국왕이 법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에는 따를 의무는 없었다.
참정권자
편집공화국의 주요 참정권자는 아래와 같다.
- 국왕 – 왕권의 확대를 위해 분투하고, 절대왕정의 창출을 시도했다.
- 마그나트 – 슐라흐타 중 가장 부유한 계층, 특권적인 과두 정치에 의해 국가를 통치하고, 국왕과 가난한 슐라흐타들을 통제했다.
- 슐라흐타 – 세임의 권한을 확대하고, 슐라흐타에 의한 민주정치로 국가를 통치하고자 했다.
마그나트와 슐라흐타는 하나의 귀족계급으로써 연대하는 일은 없고, 다수의 당파가 국왕이 아닌 거대세력의 마그나트를 각각 지원했다.
공화국의 몰락
편집1572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자가 후사 없이 죽고난 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던 공화국 정부는 붕괴되었다. 권력은 서서히 중앙정부에서 지방의 슐라흐타들에게로 이동했다.
주기적으로 비워지는 왕좌를 메꿀 기회가 찾아오면 슐라흐타들은 연방내에 강력한 새로운 왕조를 세울 걱정이 없는 외국인 후보자를 선호하며 찾기를 원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왕위에 관련된 인물은 모든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슐라흐타들과 항시적인 항쟁으로 인해 힘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유명한 사례를 들면 트란실바니아의 지배자 스테판 바토리(재위:1576년-1586년)을 제외하면, 외국출신의 국왕은 대부분 자국 아니면 출신가문의 이해에 연방의 이해관계를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경향은 특히 바사 왕가 출신의 최초 선거왕 2명의 통치 시기의 정책과 군사행동에서 현저하게 나타나, 그들의 정치방침은 연방과 스웨덴사이에서 항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되었고, 이것은 대홍수(1648년)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이런 동란이 연방을 황금 시대에서 쇠퇴 시대로 전환시키게 만들었다.
제브지드프스키의 반란(1606년-1607년)을 전기로 마그나트는 권력을 증가해 슐라흐타 민주정은 마그나트 과두정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연방의 정치 시스템은 외국의 간섭에 약했고, 여러 외국으로부터 매수된 세임 대의원이 개혁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리베룸 베토를 행사하는것도 흔하게 되었다[36][37]. 이런 약한 모습은 독립국가로써 연방을 몰락시켰고, 주변 여러 나라가 국내를 안정시키려고 군사력을 동원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연방을 정치적인 마취상태, 무정부사태로 만들어 버렸다.
후기 여러 개혁
편집연방은 정치 시스템의 개혁을 위해 커다란 노력을 소비하고, 1791년 근대 유럽에서는 최초[29]의 성문국헌법인 5월 3일 헌법을 제정했다. 이것은 2년전에 제정된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탄생한 성문헌법이었다. 혁명헌법은 예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를 세습왕제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가로 변모시켜, 오래된 시스템이 갖고 있던 유해한 특징을 배제시켰다. 새로운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 있었다.
- 리베룸 베토를 폐지하고, 슐라흐타의 연맹결성을 금지한다.
- 정부는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의 3권분립을 도입한다.
- 국민주권을 창출하고, 귀족들만이 아닌 부르주아들에게도 참정권을 확장한다.
- 소작농의 권리를 향상시킨다.
- 종교적 관용을 보장한다. 다만, 가톨릭교도의 배교는 죄를 묻는다.
연방을 약체시켜 완충국의 지위로 머물기를 원하던 주변 열강들에 의해 모든 국경으로부터 침공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 개혁은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야토프스키와 기타 개혁자들에 의한 강국화 정책은 국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32]. 러시아는 5월 3일 헌법의 정치개혁에 의한 혁명의 파급과 연방이 유럽 열강국의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두려워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5월 헌법을 자신의 영향력을 빼앗을 것이고[38], 폴란드 헌법은 자코뱅파의 영향을 받은것들이라고 선언했다[39].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템킨은 타르고비차 연합 결성을 위해 이 문서를 기초로 했고, 헌법에 대해서 "민주주의 이념이라는 것은 전염병"이라고 언급했다[40] . 또한 한편, 역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의 강국화를 우려하고 있어 이것을 핑계로 영토 확장의 구실로 삼았다[39]. 프로이센 재상 에바르트 폰 헤르첸베르크(Ewald von Hertzberg)는 "프로이센의 왕정에 대한 타격"[41]이라고 말했고, 이어 프로이센을 종속시켰던 폴란드의 재 강국화를 강한 경계심을 갖고 지켜보았다[42][38]. 결국 연방이 헌법제정 후 4년 만에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에 5월 3일 헌법은 완전한 형태로 발행되는 일은 없었다.
연방의 군사
편집연방의 군대는 2명의 대 헤트만 및 2명의 야전 헤트만에 의해 통솔되었다. 군대는 다음의 군단에서 구성되었다.
- 보이스코 크팔치아에(Wojsko kwarciane) - 국가세금에 의해 구입한 상비군. 이후 보이스코 코펜트베와 합체했다.
- 보이스코 코펜트베(Wojsko komputowe) - 전시에 창설된 반상비군. 1652년 이후 보이스코 코팔치아에와 함께 새로운 상설군을 구성했다.
- 포스포리테 루세네(Pospolite ruszenie) - 슐라흐타의 총동원에 의한 군대.
- 페호타 와노바(Piechota łanowa) 및 페호타 비프라네츠카(piechota wybraniecka) - 농민의 신병을 기반으로 한 군대.
- 등록 코사크 군(Registered Cossacks) - 코사크로 구성된 군대. 대부분 보병들이나 일부 마차요새를 이끄는 기병으로써 사용되었다.
- 왕립 근위대 - 국왕과 그 가족을 호위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 군대.
- 용병대 - 통상 군대의 보충을 위해 고용되고, 기타 많은 군대와 더불어 전투를 벌였다. 독일인, 스코틀랜드인, 왈라키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보헤미아인, 모라비아인, 실레지아인 등.
- 사병대 - 평상시에는 대부분 소규모 연대(수백명 정도)로써 마그나트 및 도시에서 육성되었다. 그러나 전시에는 국가에서 지급된 군자금을 매체로 그 규모도 몇단계 커진다(수천명 규모).
연방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도 존재했다.
- 후사르 - 중장비 기병. 창, 콘체슈(검), 사벨, 도끼, 활, 추모, 후에는 피스톨을 장비했다. 그들의 전투력은 17세기 후반 들어서 총이 보급되어 총보병연대가 등장할 때까지 매우 신뢰받았다. 멤버는 비아시슈 후사르키(towarzysz husarski)라고 불렀고, 3~4명의 포츄트비(pocztowy)를 통솔했다.
- 코사크 기병 - 연방에 있던 경기병의 일반적인 호칭으로 비록 민족적으로 코사크로밖에 불리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기사군단처럼 빠른 기동성을 보유했다.
- 타보르(Tabor) - 보충용 병사를 마차에 태워 전장으로 말을 이끌고 운반하는 부대. 이 방어진형은 코사크에 의해 숙달된 것밖에 없어 기타 부대와 비교해서 숫자가 적었다.
연방 해군은 연방의 역사 속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맡지 못했으나, 1627년 스웨덴의 해상봉쇄을 격파한 오리바 해전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흑해에서 코사크들이 오스만 제국 및 그 속국에 대해 챠이카(czajka)라고 불리는 소형 선박에 타고 약탈행위를 계속했다. 그들은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교외에서 불을 질러버리기도 했다.
경제
편집연방의 경제는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 농업생산에 의해 지탱되었다. 농노제도는 폴란드에서 15세기에 금지되었으나, 리투아니아에서는 1588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43] 가장 노예제도는 재판 농노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귀족들이 소유한 포르바르크(folwark)라고 불리는 대규모 농장에서 국내유통, 국외수출을 위해 농작물이 농노들에 의해 생산되었다.[44] 이 경제 체제는 곡물 생산이 가장 호조를 보였던 시기에 해당하는 연방의 초기에는 지배계급에게 좋은 방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17세기후반에 이르러 국내의 경제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슐라흐타들이 곡물 가격의 하락에 의해 이윤이 떨어지는 것을 메우기 위해 소작농들에게 중노동을 부과한 것으로 기타 동유럽 여러 지역에서도 재판 농노제란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연방의 경제가 농업에 의존하게 된 것은 부르주아에 대한 슐라흐타의 압도적 우위와 결합된것이 국내의 도시화와 산업에 대한 발전이 매우 더디게 된 결과가 되었다. 지주귀족과 도시 부르조아 사회계급간의 갈등은 유럽 세계 전체에 공통된 현상이었으나, 연방의 경우 귀족계급이 승리를 거두는 사태는 동시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의 전쟁과 차례로 위기가 찾아오자 연방의 여러 도시의 규모 및 부는 서방측 여러나라의 여러 도시와 비교하기엔 손색이 없고, 이 위기의 시대가 도시의 성장장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것이다 라는 주장도 있어, 이것에 관련된 시비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지금도 논쟁 중이다. 연방은 마그데부르크 법에 기초한 도시 및 마을을 다수 갖고 있었다. 연방에서 가장 대규모 시장은 루블린에서 열렸다.
연방은 유럽 최대의 곡물생산국이었으나, 곡물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소비되었다. 1560년부터 1570년까지 폴란드 왕국령(폴란드령 지역)및 프로이센의 곡물 소비량을 계산해 보면 밀은 약 113,000톤(혹은 226,000 라제트(łaszt; 라제트는 “마지막”, 도량법에 의하면 큰 부피; 곡물의 경우 톤의 약 절반) 에 달했다. 16세기까지 연방에서 생산된 곡물량은 약 120,000톤, 그중 6%가 수출되고, 19%가 도시에서 소비되었고, 남은 것은 농촌에서 소비되었다. 연방이 수출한 곡물은 서유럽의 수요량의 약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방의 곡물은 1590년부터 1620년대까지 유럽이 흉작에 괴로워하고, 남부 유럽국가가 체제안정을 위해 경쟁하여 곡물수입을 벌이던 시기에는 매우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연방에서 곡물은 최대의 수출품이었으나, 포르바르크(folwark)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국내 곡물거래의 80%을 취급하였고, 발트해의 항구도시로 향하는 곡물을 수송하는 그다니스크(Gdansk; 독일 단치히)의 상인들과 계약을 맺었다. 연방을 가로 지르는 많은 하천이 수송에 이용되었다. 비스와 강(Vistula), 피리차 강(Pilica), 서 부크 강(Western Bug), 산 강(San), 니다 강(Nida), 비에프슈 강(Wieprz), 네만 강(Niemen) 등이 있다. 이런 강은 비교적 인프라 정비가 잘 이루어져 있고, 연안항구 및 곡식창구를 갖추고 있었다. 많은 강에서는 거의 이익이 안되는 수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남북을 왕래하며, 바지선과 땟목에는 그다니스크의 목재를 팔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 그다니스크에서 배는 앤트워프 및 암스테르담이란 대도시에 곡물을 수송하기 위해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지방으로 향했다. 곡물과 함께 해상무역 수출품에는 목재 및 목재로 만든 타르와 재(ash)등이 있다.
육상 교역에서 연방은 피혁, 모피, 마, 비단(대부분 비에르코포르스카(Wielkopolska)산)및 리넨을 라이프치히 및 뉘른베르크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인 주거지역에 수출했다. 약 5만 마리나 되는 소(牛)들이 실레지아(Silesia)을 경유해 상품으로 운반되었다. 연방은 또 향신료 및 사치품, 의복, 어류, 맥주 및 산업을 위해 사용되는 강철 및 여러 도구 등을 수입했다. 그다니스크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배들은 적었으나, 포도주 및 과일, 향신료, 청어을 수입해 운반했다. 대략 16-17세기 동안 연방의 무역수지는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됐다.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호박의 길이란 수많은 옛 교역로가 소멸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교역로가 차례로 나타났다.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대상교역로로써 폴란드의 중요성은 희박해졌고, 한편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서 새로운 교역로가 열렸다. 그러나 연방의 조선기술이 개선되어 해상교역에 눈을 돌린 후에도 서양과 동양의 연결점으로써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고, 수많은 상품 및 생산물이 연방을 통과하여 여러 지역으로 운반되었다. 예를 들어 이스파한 융단은 페르시아에서 연방으로 수입되었으나, 서구에서 "폴란드 융단"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연방의 통화에는 즈보티(złoty) 및 그로슈(grosz) 등이 있다. 그다니스크 시에는 독자의 화폐를 주조하는 특권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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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지기문트 3세 바사의 통치시기) 때 그다니스크 왕립도시에서 제조된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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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에 있는 코노프시치아의 공동주택, 1575년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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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 강의 하천 수송상인의 야영, 1858년 Wilhelm August Stryowski의 그림.
문화
편집연방은 근대적인 정치, 사회사상의 발전에서 유럽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철학자가 칭찬한 당시로는 희귀했던 외견상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대응 종교 개혁의 시대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했던 종교적 관용을 실현시켜, 유대교, 동방정교, 개신교, 이슬람이 국교였던 가톨릭과 더불어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연방은 또한 영국과 아메리카 합중국의 유니태니언주의의 선구자였던 기독교 섹트, 폴란드 형제단 탄생시켰다.
이 정치 시스템의 영향도 있어, 연방은 안제이 프리슈 모드제프스키(Andrzej Frycz Modrzewski ;1503-1572), 바비제네츠 그지마와 고시리츠키( Wawrzyniec Grzymała Goślicki; 1530-1607), 표트르 스카루가(Piotr Skarga; 1536-1612)등의 정치사상가들을 배출하고,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Stanisław Staszic; 1755-1826) 및 휴고 고본타이(Hugo Kołłątaj; 1750-1812)는 유럽에서 가장 빨리 성립된 근대적인 성문헌법[29], 국가헌법이며, 대륙에서 최초의 혁명적인 정치원칙을 확립한 5월 3일 헌법의 완성을 위한 길을 제시했다.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오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써 비리뉘스 대학과 더불어 연방에서 인문과학, 자연과학의 중심이 되었다. 1773년에 창설된 국민교육위원회(폴란드어: Komisja Edukacji Narodowej;Commission for National Education)는 세계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연방은 다음의 과학자를 배출하였다.
- 마르친 크로멜(Martin Kromer; 1512-1589) - 역사가, 지도학자
- 미카엘 센디보기우스(Michał Sędziwój; 1566-1636) – 연금술사, 화학자
- 크시슈트프 알치세프스키(Krzysztof Arciszewski; 1592-1656) – 군인, 기술자, 민족학자
- 카지미에슈 세메노비치(Kazimierz Siemienowicz; 1600-1651) - 군사기술자, 포술의 전문가, 로켓 개발자
- 요하네스 헤베리우스(Johannes Hevelius; 1611-1687) – 천문학자, 월지형학의 창시자
- 미하우 보임(Michał Boym, 중국어: 卜弥格; 1612-1659) – 동양학자, 지도학자, 박물학자, 남명정권을 섬겼던 외교관
- 아담 아다만디 코하니스키(Adam Adamandy Kochański; 1631-1700) - 수학자, 기술자
또한 연방은 다음의 고전작가들도 배출하였다.
- 얀 코하노프스키(Jan Kochanowski; 1530-1584) - 작가, 극작가, 시인
- 바츠와프 포트츠키(Wacław Potocki; 1621-1696) - 작가, 시인
- 이그나치 크라시츠키(Ignacy Krasicki; 1735-1801) - 작가, 시인, 우화작가, 폴란드 최초 소설가
- 유리안 우르신 네무체비치(Julian Ursyn Niemcewicz; 1758-1841) - 작가, 극작가, 시인
또한 많은 슐라흐타들이 회상록 및 일기를 남겼다.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은 알프레흐트 스타니스와프 라지비우(Albrycht Stanisław Radziwiłł; 1595-1656)의 ≪폴란드 역사에 관한 회상≫, 얀 프리조스톰 파세크(Jan Chryzostom Pasek; 1636년경-1701년경)의 ≪회상록≫을 들 수 있다.
마그나트들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여러 건설 계획에 착수했다. 현재 바르샤바 대통령 궁전 및 폴란드 대 헤트만이었던 스타니스와프 코네츠폴스키(Stanisław Koniecpolski)가 건립한 포드호르차히 성을 비롯한 교회, 성당, 궁전 등이 있다. 최대의 건설계획은 도시 전체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대개는 도중에 유야무야가 되어 결국 포기했다. 건설된 도시의 이름의 상당수는 건설한 마그나트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 많았다. 이들 도시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에 의해 건설되고, 이탈리아인 건축가 베르나르드 모란드가 설계를 담당한 자모시치(Zamość)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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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자모시치의 시청사와 아르메니아인의 공동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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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에 지은 파제이스리스 수도원
사르만티즘
편집슐라흐타 사이에 보급된 이데오로기는 폴란드 민족의 선조라고 생각한 사르만타이인 연관된 "사르만티즘"이라고 불렀다. 이 신조체계는 슐라흐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들의 생활영역의 전면에 침투했다. 사르만티즘은 슐라흐타 계급에게 있어 평등의식, 그들의 기마취미, 전통중시, 지방에서의 전원생활, 평화주의를 장려하고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은 복식의 유행을 낳았다(주반, 코투슈, 스크마나, 파스 코투조비, 데리아, 샤브라 등). 거기에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의 귀족계급에게 단일 민족의식에 가까운 연대감을 주었고, 슐라흐타의 "황금의 자유"에 정통성을 각각 부여했다.
초기 사르만티즘은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문화활동에서 분류되어 나온것으로 신앙심, 성실함, 애국심, 용감, 평등과 자유를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런 성격은 서서히 부정되었다. 후기에 나타난 과격한 사르만티즘은 신앙심을 광신시키고, 성실함을 정치적 무지로 변화시키고, 자랑을 오만으로 만들고, 용감을 완미(頑迷;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움)로 자유를 무질서로 변모시키고 말았다.[45] 사르만티즘은 18세기후반에 일어난 국가의 소멸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르만티즘에 대한 비판은 혁명을 지향하는 혁명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편향된 견해를 보였다. 이런 자기비판은 또한 폴란드의 소멸은 자기붕괴로 초래된 것이라고 증명하는 것으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역사 저작물에서 동조하는 것도 있었다.[46]
인구와 종교
편집연방의 사용언어
편집- 폴란드어 - 공용어;[47] 지배적 언어. 연방의 귀족계급[48][49][47][50]의 대부분 및 왕국령의 농민층이 사용하였다.[51][52] Dominant language in the towns.[51]
- 라틴어 – 공용어[47][53]. 외교분야[52]에서 주류로 쓰여, 귀족계급 사이에서 제2언어로써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54]
- 리투아니아어 - 비공용어.[55][47]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북서부(원래 리투아니아)[56][57][58]및 왕령 프로이센 북부(소 리투아니아)에서 언어로 이용한다. 또한 대공국의 공문서의 일부에도 사용되었다.
- 독일어 - 공용어.[47][52] 왕령 프로이센 및 도시부의 소수파 주민이 사용하였다. 외교분야에서 사용되는 상황도 있다.[59][51]
- 히브리어 - 공용어.[47] 유대인이 사용하였다. 이디시어도 사용되었으나,[51] 공용어로써 인정받지 못했다.[60][61]
- 루테니아어 - 관청 슬라브어로써도 알려졌다.[52] 공용어.[47] 1697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관청에서 표준언어로 사용했고, 때에 따라서 외교분야에서 사용되었다.[53][52] 루테니아어의 방언(파생언어)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및 왕국령의 동부에서 구어로써 널리 이용되었다.
- 아르메니아어 - 공용어.[47]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사용하였다.[61][62]
유산
편집1807년 건국된 바르샤바 공국은 연방을 그 원점으로 삼았다. 같은 발상은 11월 봉기(1830-1831) 및 1월 봉기(1863-1864)의 경우 조국회복운동 및 유제프 피우스츠키( Józef Piłsudski)가 제창했다가 실패로 끝난 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를 묶어서 만든 폴란드 주도의 ‘’멘지모르제’’(Międzymorze) 연방구상(발트해~흑해 사이 연방국가구상)에도 계승되었다. 오늘날 폴란드 공화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의 후계자를 자임하고 있다.[63]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후 재독립한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예전 연합국가인 리투아니아 국가의 참가를 처음엔 부정적으로 보았으나,[64] 이 태도는 근년에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리투아니아의 서구에 대한 접근으로 높아졌다. 즉 리투아니아도 포함해 발트 3국은 북구이사회로의 가맹희망의 표명이기도 했다.[65]
지방행정구획
편집이 정치체제를 표시하는 상황에는 일반적으로 "폴란드"란 말로 충분했으나, 실제로는 폴란드는 거대한 연합국가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크게 나뉘며 크게 2부분으로 나뉜다.
연방은 보에오트포(voivodships; województwa)란 지방행정구획에서 세세하게 분리되어 각 지역은 보에보다(voivod; wojewoda,주지사)에 의해 통치되었다. 각 지역은 거의 스타로스토포(starostwa; 왕령지/대관통치지역)에 의해 구분되어, 스타로스타(starosta; 대관)이 이를 통치했다. 도시에는 카슈테란(castellans; 성주대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다만 도시는 각각 제미야(ziemia)란 지역행정단위를 만들어 빈번하게 대관의 통치를 피했다.
예전 연방에 속한 지역은 중부 유럽에서 동부 유럽에 걸쳐 현존하는 복수의 국가 중에 광범히 하게 분포하였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몰도바(트란실베니아), 벨라루시, 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등이다. 그리고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던 슬로바키아의 작은 몇 개 도시도 루보프라 조약으로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연방의 주요 지역은 다음과 같다(행정구획으로 나누지는 않았다)
- 마우오포르스카(폴란드어: Małopolska) - 폴란드 남부, 주요 수도는 크라쿠프.
- 비에르코포르스카( 폴란드어: Wielkopolska) – 포즈난과 바르타 강 수계에 분포한 폴란드 중서부.
- 마조프세(폴란드어: Mazowsze) - 폴란드 중앙부, 주요 수도는 바르샤바.
- 원 리투아니아 -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가톨릭지역, 또한 민족적으로 리투아니아인의 거주지역. 대공국의 북서부를 차지하고 있다.
- 제마이티아(폴란드어: Żmudź, 리투아니아어: Žemaitija) - 리투아니아 대공국내의 자치령, 대공국의 서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원 리투아니아의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 왕령 프로이센(폴란드어: Prusy Królewskie) – 발트 해 남부 해안지역, 제2차 트루니 조약에 의해 자치령이 되었다. 1569년 루블린 합병때 왕국령에 합쳐졌다.
- 루테니아(폴란드어: Ruś) - 연방의 동부, 러시아와의 인접지역.
- 리보니아 공국 - 왕국령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동영유지역, 1620년대 및 1660년에 스웨덴의 점령통치를 받았다.
- 크룬란트 공국(폴란드어: Kurlandia) - 연방의 북부에 위치한 봉토. 1637년 토바고 섬, 1651년 간비아 강의 성 안드레 섬에 각각 식민지를 건설했다.
- 실레지아(폴란드어: Śląsk) - 연방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소규모 지역이 연방의 국왕에 속했다. 특히 바사 왕가의 여러 왕은 1645년부터 1666년까지 오폴레(Opole) 공국의 군주였다.
연방의 국경은 전쟁 및 조약에 의해 변화했고, 때에 따라 10년사이에 여러번 바뀌는 상황이 있기도 했다. 국경의 변동은 특히 동부 및 남부에서 심했다. 얌 자포르스키 조약(1582년)이 맺어진 후 연방은 거의 815,000 ㎢ 의 영토에 약 650만명의 인구를 갖게 되었다. 데우리노 조약(1618년) 후에는 연방의 영토는 약 990,000 ㎢ 로 확대되고, 인구도 1,000만명에서 1,100만명 정도로 증가했다(그중 폴란드인은 400만명 정도).
지리
편집16세기 폴란드의 주교이며 지도학자였던 마르친 크로멜은 라틴어의 지도책 ≪폴란드:그 지리, 민족, 문화 및 폴란드 연방의 관직≫을 출판했으나, 이것은 당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연방의 안내 가이드라고 이야기되었다.
크로멜의 저작과 그라르두스 메르카트르(Gerardus Mercator)가 제작한 동시대의 지도는 연방의 국토 대부분을 평야로 묘사했다.
연방 남부의 크레시(Kresy)는 스텝 지역으로 유명하다. 타트라 산맥을 그 최고부로 있던 카르파치아 산맥은 남부국경을 형성하고, 발트해가 북부의 자연국경이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여러나라와 마찬가지로 연방은 광대한 삼림지역에 둘러싸여 있어 그 경향은 동부에서 더욱 현저했다. 오늘날 비야오비에자 숲(Białowieża Forest)의 대부분은 상처 없이 남아 있어 유럽의 원시림으로서 최후의 지역이라고 한다.
관련 항목
편집주석
편집- ↑ Partitions of Poland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백과 미러)
- ↑ 공동번역성서 로마서 8:31항
- ↑ si는 "만약 ~라면(if)"라는 뜻의 라틴어 접속사이다. deus(m.)는 "신(神, god)"을 의미하는 라틴어 남성형 명사이다. nobiscum은 nobis와 "~와 함께(with)"라는 뜻의 라틴어 전치사 cum이 결합한 것이다. nobis는 "우리(we)"라는 뜻의 라틴어 대명사 nos의 5격(탈격) 복수 형태인데, 전치사 cum이 5격(탈격)과 함께 사용되는 5격(탈격) 지배 전치사이기 때문에 5격(탈격)인 nobis가 사용되었다. quis는 "누구(who)"라는 뜻의 라틴어 의문대명사이다. contra는 "~맞서, ~에 대항하여(against)"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전치사로, 뒤에 4격(대격)이 따라오는 4격(대격) 지배 전치사이다. nos는 "우리(we)"라는 뜻의 라틴어 대명사 nos의 4격(대격) 복수 형태이다.
- ↑ pro는 "~을 위하여(for)"라는 뜻의 라틴어 전치사로 뒤에 5격(탈격)이 따라오는 5격(탈격) 지배 전치사이다. fide는 "믿음, 신뢰, 충실함" 등을 뜻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fides(f.)의 5격(탈격) 단수 형태이다. rege는 "왕(king)"을 뜻하는 라틴어 남성형 명사 rex(m.)의 5격(탈격) 단수 형태이다. et은 "~와(and)"라는 뜻의 라틴어 접속사이다. lege는 "법률(law)"을 의미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lex(f.)의 5격(탈격) 단수 형태이다.
- ↑ 가 나 인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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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 ↑ 가 나 Janusz Sykała: Od Polan mieszkających w lasach – historia Polski – aż do króla Stasia, Gdansk, 2010.
- ↑ 가 나 Georg Ziaja: Lexikon des polnischen Adels im Goldenen Zeitalter 1500–1600, p. 9.
- ↑ “Artykuły henrykowskie – szlachecka prekonstytucja – Historia”. 《polskieradio24.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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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ccording to Panstwowe Przedsiebiorstwo Wydawnictw Kartograficznych: Atlas Historyczny Polski, wydanie X, 1990, p. 16, ~ 990.000 km2
- ↑ Richters, Katja (2012). 《The Post-Soviet Russian Orthodox Church: Politics, Culture and Greater Russia》. Routledge. 133쪽. ISBN 978-1-136-29636-9.
formed part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which was ruled by Catholic monarchs who made Roman Catholicism the state religio...
- ↑ Heritage: Interactive Atlas: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Retrieved March 19, 2006: At its apogee,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comprised some 400000 sqmi (1035995 ㎦) and a multi-ethnic population of 11 million. For population comparisons, see also those maps: [1], [2].
- ↑ Norman Davies, Europe: A History, Pimlico 1997, p. 554: Poland-Lithuania was another country which experienced its 'Golden Age' during the sixteenth and early seventeenth centuries. The realm of the last Jagiellons was absolutely the largest state in Europe.
- ↑ Yale Richmond, From Da to Yes: Understanding the East Europeans, Intercultural Press, 1995, p. 51
- ↑ Maciej Janowski, Polish Liberal Thought,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01, ISBN 963-9241-18-0, Google Print: p3, p12
- ↑ Paul W. Schroeder,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ISBN 0-19-820654-2, Google print p84
- ↑ Rett R. Ludwikowski, Constitution-Making in the Region of Former Soviet Dominance, Duke University Press, 1997, ISBN 0-8223-1802-4, Google Print, p34
- ↑ 가 나 George Sanford, Democratic Government in Poland: Constitutional Politics Since 1989, Palgrave, 2002, ISBN 0-333-77475-2, Google print p11—constitutional monarchy, p3—anarchy
- ↑ 가 나 다 라 Aleksander Gella, Development of Class Structure in Eastern Europe: Poland and Her Southern Neighbors, SUNY Press, 1998, ISBN 0-88706-833-2, Google Print, p13
- ↑ "Formally, Poland and Lithuania were to be distinct, equal components of the federation… But Poland, which retained possession of the Lithuanian lands it had seized, but Poland had greater representation in the Diet and became the dominant partner." 《Lublin, Union of》.
- ↑ Halina Stephan, Living in Translation: Polish Writers in America, Rodopi, 2003, ISBN 90-420-1016-9, Google Print p373. Quoting from Sarmatian Review academic journal mission statement: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was […] characterized by religious tolerance unusual in premodern Europe
- ↑ Feliks Gross, Citizenship and Ethnicity: The Growth and Development of a Democratic Multiethnic Institution, Greenwood Press, 1999, ISBN 0-313-30932-9, Google Print, p122 (notes)
- ↑ [3]
- ↑ [4]
- ↑ Martin Van Gelderen, Quentin Skinner, Republicanism: A Shared European Herit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ISBN 0-521-80756-5 Google Print: p54
- ↑ The Causes of Slavery or Serfdom: A Hypothesis, discussion and full online text of Evsey Domar (1970) "The Causes of Slavery or Serfdom: A Hypothesis", Economic History Review 30:1 (March), pp18–32
- ↑ 가 나 다 John Markoff describes the advent of modern codified national constitutions and states that "The first European country to follow the U.S. example was Poland in 1791." John Markoff, Waves of Democracy, 1996, ISBN 0-8039-9019-7, Google Print, p121
- ↑ Although the terms Rzeczpospolita (Commonwealth/Republic) and Oba Narody (Two/Both Nations) were widespread in the period, they were used in the combined form for the first time only in 1967 in the title of Jasienica's book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 (Republic of the Two Nations).
- ↑ . In 1651, in the face of a growing threat from Poland, and forsaken by his Tatar allies, Khmelnytsky asked the Tsar to incorporate Ukraine as an autonomous duchy under Russian protection.〈Pereyaslav Agreement〉. 2006 http://www.britannica.com/eb/article?tocId=9059219.
|제목=
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5] - ↑ 가 나 Pacy, James S.; James T. McHugh. 《Diplomats Without a Country: Baltic Diplomacy, International Law, and the Cold War》 1판. Post Road West, Westport, Connecticut: Greenwood Press. doi:10.1336/0313318786. ISBN 0-313-31878-6. 2006년 9월 3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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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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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편집- Commonwealth of Diverse Cultures: Poland's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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