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 작전
성채 작전(독일어: Unternehmen Zitadelle)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 작전으로, 이 작전을 통해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었다. 작전은 쿠르스크 교외의 소련군에 대한 공세였다. 소련 측에서는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세를 축출한 계획적 방어작전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을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이라고 부른다. 독일군은 소련의 2차례의 반격작전인 폴코포데츠 루먄체프 작전과 쿠투조프 작전과 맞닥뜨려야 했다. 독일군에게 이 작전은 동부 전선에서 개시할 수 있는 마지막 전략적 공세였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에서 훈련 중인 군대를 동부 전선에 투입하기보다는 연합군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지중해 방면으로 파견해야 했다.[5] 성채 작전에서 독일군의 광범위한 인적, 물적 손실은 소련 붉은 군대가 동부 전선에 우위를 점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독일군은 쿠르스크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다수의 소련군을 차단함으로써 1943년 여름에 전개될 수 있는 소련의 공세를 약화시키기를 원했다.[6] 쿠르스크의 돌출부 지역은 남북으로 250km였고, 동서로 160km에 달했다.[7] 계획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을 돌파하는 협공 작전으로 계획되었다.[8] 히틀러는 이곳에서의 승리가 독일군의 병력과 전쟁에서 철수하려는 그의 동맹국 군대에 명망을 다시 되찾아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9] 이곳에서의 승리는 독일 무기 산업에 투입될 예정이었다.[10]
소련 정부는 루시 스파이 링을 통해 전달된 영국의 첩보를 통해 독일군의 의도를 이미 알아차렸다. 쿠르스크 교외 지역의 핵심을 향해 공격이 가해질 것을 한 달전부터 알고 있었던 소련군은 독일군 선봉부대에 맞서 종심방어를 실행하려고 했다.[11] 독일군은 그들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새로운 무기인 판터 전차와 티거 1호 전차를 투입시키기 위해 공세를 연기했다.[12][13][14] 이를 통해 붉은 군대는 일련의 종심 방어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어에는 지뢰, 요새, 포격구역, 대전차 거점 등이 있었고, 종심은 300km에 달했다.[15] 소련 기동부대는 교외에서 철수했고, 대규모 예비군이 전략적 반격을 위해 형성되었다.[16]
각주
편집- ↑ Beevor 2012, 485쪽.
- ↑ 가 나 Glantz & House 2004, 338쪽.
- ↑ 가 나 Glantz & House 1995, 165쪽.
- ↑ 가 나 Glantz & House 2004, 337쪽.
- ↑ Dunn 1997, 191쪽.
- ↑ Glantz & Orenstein 1999, 1쪽.
- ↑ Glantz & House 1995, 157쪽.
- ↑ Nipe 2011, 6쪽.
- ↑ Healy 2010, 42쪽.
- ↑ Healy 2010, 90쪽.
- ↑ Healy 2010, 65쪽.
- ↑ Newton 2002, 12쪽.
- ↑ Dunn 1997, 94쪽.
- ↑ Kasdorf 2000, 16쪽.
- ↑ Glantz & House 2004, 64–67쪽.
- ↑ Glantz 1989, 149–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