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노 우마코
소가노 우마코(
생애
편집부친은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이다. 딸들이 왕족과 혼인하여, 왕실의 외척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집권을 향한 노력
편집587년 4월, 요메이 천황이 즉위한 지 2년도 안 되어 사망하자, 소가씨와 모노노베씨는 자기가 추천하는 계승자를 즉위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무장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소가씨가 승리를 거두었고, 소가노 우마코는 자신의 생질(누나 오아네노키미(小姉君)의 아들)을 즉위시켰는데 바로 제32대 스슌 천황이다.[1] 스슌 천황이 우마코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자 우마코는 심복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이코마(東漢直駒)를 시켜 스슌 천황을 암살(592년)하기까지 하였다. 우마코는 비다쓰 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炊屋姫)황후를 즉위시켰다. 그 여자가 제33대 스이코 천황이다. 또한 우마코는 2차 불교 전쟁에 적극 가담했던 우마야도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가 곧 쇼토쿠 태자이다.[2]
권력의 정점에 서다
편집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佛派)이자 국신파(國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3] 우마코는 스이코 천황 즉위 이후 섭정이 된 쇼토쿠 태자와 합의하에 정국을 이끌며, 불교를 장려하고, 관위 12계와 십칠조헌법을 제정하여 중앙 집권화에 힘을 쓰며, 견수사(遣隋使)를 보내 중국의 사회제도와 학문을 받아들였다. 그는 596년, 일본 최초의 사찰인 호코지를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로 하여금 짓게 했다.[4] 이는 씨사(氏寺)를 건립하는 씨족불교 유행의 시작이기도 하다.[5] 아스카데라의 완공을 기념하는 불사리 봉안식에 소가노 우마코를 비롯한 100여 명의 인사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더니 보는 사람이 한결같이 기뻐했다. 이것은 백제 문화가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가노 가문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6] 622년 유일한 섭정인 쇼토쿠 태자가 죽자 소가노 우마코는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7]
사후
편집소가노 우마코는 자기의 저택에 대규모의 정원을 만들었는데, 그 때문에 그를 시마노오토도〔島大臣〕라고도 불렀다. 그의 정원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21세기 초에 발굴되기도 하였다.[8] 아스카에 있는 백제 양식의 거대한 무덤, 이시부타이(石舞臺)가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으로 추정된다.[9]
가족관계
편집각주
편집- ↑ 츠위화 (2008). 《일본 여성(성과 사랑, 삶의 역사)》. 시그마북스. 141쪽. ISBN 978-89-8445-303-6.
요메이 천황은 즉위한 지 2년도 안 되어 587년 4월에 사망했다. ... 소가와 모노베는 자기가 추천하는 계승자를 즉위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무장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소가가 승리를 거두었고 소가노 우마코는 자신의 생질을 즉위시켰는데 바로 제32대 스순 천황이다.
- ↑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8~79쪽. ISBN 89-349-1654-0.
스순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자 소가노 우마코는 심복 야먀토아야노아타이 고마(東漢直駒)를 시켜 천황을 암살하고 30대 비다쓰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炊屋姫)황후를 즉위시켰다. 그녀가 제33세 스이코(推古) 여제인데, 소가노 우마코는 2차 불교 전쟁에 적극 가담했던 우마야도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뻘이었던 우마야도황자가 그 유명한 쇼토쿠(聖德)태자였다.
- ↑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87쪽. ISBN 89-86361-32-9.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조정의 제2위의 장관이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이른바 국신파(國神派)였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불교를 신봉하는 소가노 우마코에게 대립한 것이다.
- ↑ 허인순 등 (2009). 《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어문학사. 128쪽. ISBN 978-89-6184-092-7.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다.
- ↑ 마쓰오카 세이고 (2008). 《만들어진 나라 일본》. 이언숙 역. 프로네시스. 120쪽. ISBN 978-89-01-08219-6.
이리하여 각 호족이 씨사氏寺를 건립하는 씨족불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소가 씨의 호코지法興寺(=아스카데라飛鳥寺)를 비롯하여,...
- ↑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5~86쪽. ISBN 89-86361-55-8.
596년에 세워진 아스카지. ... 일본 나라현의 아스카지(飛鳥寺). 목협만치(소가노 만치)의 증손인 소가노 우마코가 지은 일본 최초의 사찰이다. "아스카지의 완공을 기념하는 불사리 봉안식에 소가노 우마코를 비롯한 100여 명의 인사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더니 보는 사람이 한결같이 기뻐했다(『부상략기』)"는 것은 그만큼 백제 문화가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가노 가문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 ↑ 박복원 (2004). 《일본정보뱅크》. 백산출판사. 134쪽. ISBN 89-7739-627-1.
622년 유일한 섭정인 쇼오토쿠태자가 죽자 소가노 우마코는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 ↑ 이어령 (2003). 《축소지향의 일본인》. 문학사상사. 135쪽. ISBN 89-7012-460-8.
아스카〔飛鳥〕, 나라〔奈良 〕시대에는 정원을 '시마(섬)'라고 불렀다. 그 당시 자기 저택에 대규모의 정원을 만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시마노오토도〔島大臣〕'라고 불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최근 나라 분지의 남쪽, 고대 도시 아스카 땅에서 가시하라〔僵原〕고고학 연구소가 '시마〔島〕'라는 오랜 지명의 토지를 발굴했더니 고대 정원의 유적이 발견되어 바로 그것이 그 소가〔蘇我〕씨의 저택 정원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는 것이다).
- ↑ 정윤미 (2011).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시루. 25쪽. ISBN 978-89-966493-2-8.
아스카에는 백제 양식의 거대한 무덤이 남아있다.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까닭에 이시부타이(石舞臺, 돌로 만든 무대라는 의미)라고 불리는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다치바나대학 이노쿠마 가네카쓰 명예교수는 이 무덤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무덤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