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원 이씨 (세종)
조선 세종의 후궁
숙원 이씨(淑媛 李氏, 생몰년 미상)는 조선 세종의 후궁이다.
숙원 이씨
淑媛 李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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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후궁 |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1490년 이후) |
배우자 | 세종 |
자녀 | 1녀
정안옹주 |
생애
편집숙원 이씨의 가계와 관련한 기록은 전무하며, 언제 태어났는지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441년(세종 23년), 세종과의 사이에서 정안옹주를 낳았다. 이후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봉해졌다. 1450년(세종 32년), 세종이 승하한 이후 궁궐에 머물다가 이후 자수궁으로 출궁하였다. 딸인 정안옹주는 1453년(단종 1년), 심선의 아들 심안의와 혼인하였고 1남 1녀를 두었으나 1461년(세조 7년) 10월,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숙원 이씨의 이후의 삶과 언제 사망하였는지 또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490년(성종 21년), 숙원 이씨는 봉보부인을 통해 당시 국구였던 정현왕후의 아버지인 영원부원군 윤호에게 외손자인 심언(沈漹)의 관직을 청탁한 일로 물의를 빚었다.[2] 윤호가 숙원 이씨의 서간을 읽고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아 성종이 사건을 무마하였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숙원 이씨와 관련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가족 관계
편집각주
편집- ↑ 《세조실록》 26권, 세조 7년(1461년 명 천순(天順) 5년) 10월 16일 (임오)
정안옹주의 졸기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 정안옹주(貞安翁主)가 졸(卒)하였는데, 옹주는 세종의 후궁(後宮)의 소출이었다.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콩 아울러 1백 석과 종이 2백 권, 백저포(白苧布)·면포(綿布) 각가 10필, 베[布] 60필을 부의(賻儀)로 주었다.
- ↑ 《성종실록》 241권, 성종 21년(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6월 7일 (무자)
의금부에서 심언의 일에 연루된 윤호 · 봉보부인 등에 대해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심언(沈漹)이 공초(供招)하기를, ‘외조모 숙원 이씨(淑媛 李氏)가 봉보부인에게 편간을 청하여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에게 보내고 사복 판관(司僕判官)을 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하였는데,(중략) - ↑ 가 나 《최인수 모 심씨 묘지명(崔仁壽母沈氏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