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신륵사(神勒寺)는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신라 시대 때 창건되었다고 여겨진다.[1]
신륵사 | |
---|---|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
소재지 |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282 북위 37° 17′ 51″ 동경 127° 39′ 41″ / 북위 37.29750° 동경 127.66139° |
일반적으로 한국의 절은 산 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신륵사는 남한강이 보이는 강변에 세워져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역사
편집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신이한 미륵(彌勒)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이다.[1]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2] 두 번째는 고려 우왕 때 왕사 나옹(王寺懶翁)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1][2] 세 번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승려 인당(印塘)이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는 이야기이다.[2] 설화에 나타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신륵사에서는 고려의 고승인 나옹이 머물러 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옹은 1376년(우왕 2)에 신륵사에서 사망하여[1] 이색이 이곳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했다. 지금은 나옹과 나옹의 제자인 무학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3] 1379년(우왕 5)에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이 절을 크게 짓고, 나옹의 부도(浮屠)를 세웠다.
조선 시대에는 1440년(세종 22)에 중수하였으며,[1] 1473년(성종 4)에 세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이장하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가 지정되었다.[1] 이때 국가에서 확장하여 크게 중수되어 사찰명은 보은사(報恩寺)로 바뀌었다.[1]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1]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 ·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1]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관련 문화재
편집보물
편집- 여주 신륵사 조사당 - 보물 제180호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보물 제225호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보물 제226호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보물 제228호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보물 제229호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 보물 제230호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보물 제231호
-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 보물 제1791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편집-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경기도 문화재자료
편집-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갤러리
편집-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같이 보기
편집참고자료
편집- “창건과 사찰명의 유래”. 신륵사. 2008년 5월 22일에 확인함.
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신륵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가 나 다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경기도 > 신륵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최장문 (2006년 8월 21일). “여주 신륵사에서 만난 세 스승 - 나옹 선사·무학 대사·목은 이색... "산처럼 물처럼 살라 하네"”.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