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균
신응균(申應均, 1921년 1월 22일[1]~1996년 3월 25일[2])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본관은 평산이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신태영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신응균 | |
별명 | 호(號): 고운(孤雲) 일본식 이름: 히라야마 가쓰토시(平山勝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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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1년 1월 22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
사망일 | 1996년 3월 25일 | (75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본관 | 평산(平山) |
배우자 | 유정희 |
종교 | 불교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40년 ~ 1959년 |
근무 | 육군 포병사령부 |
최종계급 | 일본 제국 육군 소좌 대한민국 육군 중장 |
지휘 | 육군 포병사령관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
생애
편집일본군 장교인 신태영의 아들로 태어났다.[3] 1940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3기로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임관하였고 1943년 일본 육군과학교를 졸업하였다. 태평양 전쟁에 중포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종전 당시에는 육군 소좌였으며, 주둔하고 있던 오키나와섬의 산 속에서 숨어지내다가 1946년 귀국했다.[4]
미군정 시기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포병사령부를 설치하는 등 국군의 포병 병과를 개척하여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포병사령관 시절에는 박정희의 상관이기도 했다.[5] 1951년 미국 포병학교 졸업한데 이어, 1957년 미국 육군참모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에 중장으로 예편하고, 1959년 주 터키대사에 임명되었다. 4·19 혁명이 일어난 뒤인 1960년 9월 1일 상오, 정부는 주터키 대사 신응균의 사표를 수리하였다.[6] 장면 정부 당시인 1960년 11월 30일, 국방부차관보에 임명되었다.[7] 국방차관보를 지내던 중 5·16 군사 정변이 발생했다. 정변이 성공한 뒤 정변 세력에 동참하여 1961년에 국방부차관, 7월에 주서독대사에 임명되었다.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1961년 7월 29일, 신임 주독 한국대사 신응균을 접견하고 그의 신임장을 받았다.[8] 1963년 7월, 신응균은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기 위해 본부 대기대사로 물러나고, 후임으로 전 외무부장관 최덕신이 기용되었다.[9] 1965년: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1966년: 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을 거쳤다. 특히 1970년에는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을 맡았고, 1976년에는 한국경영과학회의 전신인 운영과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신태영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학력
편집- 충청남도 대전고등보통학교
-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3기 졸업
- 일본 육군과학전학교 졸업
- 일본 육군포공학교 졸업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정훈 1기 졸업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학사 졸업
기타 약력
편집- 1972년: 과학기술연구소 상임감사
- 1973년 ~ 1982년: 재향군인회 부회장
- 1973년: 외교협의회 이사 겸 사무총장
- 1975년: 국방과학연구소 상임감사
- 1979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 1982년: 국제화재해상보험 고문
- 1982년: 대일화학 감사
- 1984년 ~ 1990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감사
- 1985년: 국제로타리365지구 총재
- 1990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고문
- 1990년: 대한민국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신응균을 연기한 배우
편집- 코리아게이트 (드라마)(1995, SBS) - 강태기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신응균”. 엠파스 인물정보.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 “전국방부차관 신응균 씨”. 조선일보. 1996년 3월 27일. 46면면.
- ↑ 특별취재팀 (2005년 1월 10일). “친일과 군사독재 가담... '오욕의 한국 근현대사' 집약판”.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 ↑ 노라노 (2006년 12월 26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16. 신랑 돌아오다”. 중앙일보.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노라노 (2005년 1월 10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81. 대통령 부인들”. 중앙일보. 2008년 4월 17일에 확인함.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辭表를受理”. 동아일보. 1960년 9월 2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신응균씨임명 국방부차관보로”. 동아일보. 1960년 12월 1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申駐獨大使 信任狀提呈”. 경향신문. 1961년 7월 30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최덕신씨 내정”. 동아일보. 1963년 7월 12일. 1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참고 자료
편집전임 정일권 |
제2대 주(駐)터키 대사 1959년 7월 ~ 1960년 9월 1일 |
후임 윤치창 |
전임 김업 (10대 사무차관) |
제11대 국방부 사무차관 1961년 5월 22일 ~ 1961년 7월 4일 |
후임 김점곤 (직무대리) |
전임 장도영 |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 1961년 6월 6일 ~ 1961년 6월 12일 |
후임 송요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