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맹담
안맹담(安孟聃, 1415년 음력 12월 28일 ~ 1462년 음력 12월 25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딸 정의공주와 혼인하여 연창위(延昌尉)에 책봉되었다.
안맹담
安孟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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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부마
연창위 延昌尉 | |
이름 | |
별호 | 죽성군(竹城君) · 연창군(延昌君) |
시호 | 양효(良孝)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15년 12월 28일(음력) |
사망일 | 1462년 12월 25일(음력) | (46세)
가문 | 죽산 안씨 |
부친 | 안망지 |
모친 | 장신택주 허씨 |
배우자 | 정의공주 |
자녀 | 4남 2녀 |
능묘 | 안맹담 · 정의공주 묘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 |
생애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어릴적 이름은 오을미(吾乙未)이다.[1]
1415년(태종 15년) 12월 28일, 아버지 함흥부윤(咸興府尹) 안망지(安望之)와 어머니 하양 허씨(河陽 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맹담은 고려 공민왕의 장인인 안극인(安克仁)의 증손자이며, 조부는 안숙로(安淑老)이다. 안극인의 딸인 공민왕비 정비 안씨(定妃 安氏)는 아버지 안망지의 고모이며, 고려 우왕의 제9비인 현비 안씨(賢妃 安氏)는 안숙로의 딸로, 안맹담의 고모이다.
어머니 하양 허씨는 허지신(許之信)의 딸이며, 장신택주(莊信宅主)에 봉해졌다.
혼인 이후
편집1428년(세종 10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였고 죽성군(竹城君)에 책봉되었다.[2]
1432년(세종 14년)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고, 1450년(문종 원년), 왕의 부마의 작호를 '위(尉)'로 개칭하면서 연창위(延昌尉)에 봉해졌다.[3]
1442년(세종 24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1444년(세종 26년)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다.
계유정난에 세조를 지지하여 1453년(단종 원년) 11월에 성록대부(成祿大夫)에 가자되었다. 세조 즉위 이후 왕실의 지척으로 대우받으며 각종 왕실 모임과 연회에 참석하였다.
1457년(세조 3년) 정월에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오르고 8월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하사받으면서, 아버지 안망지는 우의정에 추증되고 어머니 허씨는 정경대부인에 봉해졌다.[3]
1462년(세조 8년) 3월, 안맹담의 여종인 양의장(良衣莊)과 양의장의 어머니인 삼월(三月)이 안맹담을 해치려고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4]
사망
편집안맹담은 술마시기를 좋아했으며 이로 인해 병을 얻어 1462년(세조 8년) 12월 25일, 사망하였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 연창위(延昌尉) 안맹담이 졸(卒)하니, 이틀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 쌀과 콩 아울러 90석, 정포 70필, 종이 2백 권을 부의하였다.
- 시호는 양효(良孝)라 하였으니,
- 온량(溫良)하고 즐기기를 좋아한 것을 양(良)이라 하고
- 자혜(慈惠)하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긴 것을 효(孝)라 한다.
- 술을 좋아하여 병이 들자 조알(朝謁, 조정에 문안 인사)을 끊었다.
세조는 안맹담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친히 제문을 지었다.
“ | 어릴 적부터 함께 교유하였기에 애통함이 마음에 간절히 사무친다. |
” |
— 세조의 치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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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3년(세조 9년) 2월 25일, 양주 도봉산 해촌동의 묘원에 장사지냈다. 안맹담의 관을 땅에 묻을 때 정의공주가 목놓아 울며 크게 슬퍼하였다.[3]
일화
편집-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하였고 술로 인해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세종은 안맹담의 술 친구들을 불러 안맹담이 누구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지 물었는데, 이에 술 친구들이 겁을 먹고 안맹담과 술을 마시지 않았다.[5]
- 불법(佛法)을 좋아하여 자신의 집에 중 10여명을 데려다놓고 밥을 먹였다. 또 중의 옷을 입고 불경을 읽기도 하였으며, 살생을 싫어하고 양잠도 하지 않았다.[6]
- 첫째 아들인 안여달(安如獺)과 셋째 아들인 안상계(安桑鷄)의 이름은 이들의 외조부인 세종이 직접 지어주었는데, 여달과 상계는 세종이 지어준 어릴적 이름을 어른이 되어서도 개명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한강의 저자도(楮子島)와 낙천정(樂天停)을 하사하였는데, 공주는 이후 막내 아들인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다. 안빈세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화공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니, 한동안 이에 대해 시를 읊은 이가 매우 많았으며,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7][8]
- 안맹담의 아내인 정의공주는 안맹담의 명복을 빌며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하였으며,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어있다.[9][10]
가족 관계
편집안맹담과 정의공주 부부는 4남 2녀를 낳았다. 정인지, 한확, 효령대군 등과 이중, 삼중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정인지의 아들과 결혼한 장녀 안씨만이 안맹담 생전에 사망하였고[11], 둘째 아들인 안온천은 안맹담의 상 중에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인 안상계는 세조의 계유정난에 동조하지 않고 저자도에 은거하였다가 예종 대에 복관하였으며, 넷째 아들인 안빈세는 정의공주가 병들자 세조가 특명을 내려 벼슬을 7계급 올려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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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2월 15일 (정묘)
안망지의 아내 허씨와 왕거의 아내 사이에서 벌어진 노비 · 가재 다툼에 대해서 아뢰다 - ↑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2월 13일 (을축)
정의공주를 죽성군 안맹담에게 시집보내다 - ↑ 가 나 다 《안맹담 묘비명(安孟聃 墓碑銘)》
- ↑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3월 13일 (무신)
연창위 안맹담을 해하려 도모한 계집종 양의장을 국문하고 가두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계집종[婢] 양의장(良衣莊)이 그 주인을 해(害)하려고 도모하여 불측한 말로써 그 어미 삼월(三月)에게 말하고, 삼월은 또한 족질(族姪)인 득부(得夫)에게 말하였는데,득부는 곧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종[奴]이었으므로, 그가 이구(李璆)에게 고하여 전계(轉啓)하니,
밤 2고(二鼓)에 임금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서 친히 국문하고, 밤이 깊어서야 명하여 궐내에 가두게 하였다.
- ↑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12월 25일 (을유)
- ↑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2월 2일 (병인)
- ↑ 《동국여지지》 제1권 - 경도(京都) 한성부〔漢城府〕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 ↑ 심량근.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정의공주”. 2017년 8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
- ↑ “훈민정음 '숨은 뒷 이야기' 재해석”. 2018년 3월 20일에 확인함.
- ↑ 《안맹담 묘비명(安孟聃 墓碑銘)》, 정인지 지음
내 아들이 일찍이 공(안맹담)의 큰사위가 되었는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병자년(丙子年, 1456년)에 며느리를 곡하고, 정축년(丁丑年, 1457년)에 아들을 곡하였는데 그 후 5년 만에 또 공을 곡하게 되었으니, 슬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
(중략) 공의 장녀는 절충 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ㆍ세자 좌익위(世子左翊衛)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으니, 정광조는 곧 나의 적장자(嫡長子)인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었다.
- ↑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10월 24일 (임술)
안빈세 · 최한경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후원에서 군사 훈련을 구경하다
안빈세(安貧世)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최한경(崔漢卿)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안빈세는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아들로서 여러 아들 중에서 글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공주의 병이 위급하니, 7계급을 뛰어 올려 제수한 것이다.
- ↑ 정인지의 아들
- ↑ 안맹담 → 안온천 → 정경부인 안씨 → 정세호 → 하동부대부인 정씨 → 선조
- ↑ 《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1월 10일 (신사)
서릉군 한치례의 처 안씨에게 부의를 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