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팽손
양팽손(梁彭孫, 1488년(성종 19년) ~ 1545년(인종 1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화가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주(綾州)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과 친교를 맺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1544년 용담현령(龍潭縣令)를 지냈다.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그의 산수화는 중종 때의 산수화풍을 대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山水圖)가 있는데 묘사가 정확하고 필치가 고답한 북종화풍의 회화로 알려진다. 개인 소장의 <춘강계칙도>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한편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의 다이겐사(大願寺)에 있는 <소상팔경>(瀟湘八景)도 그의 필법과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조광조가 그의 친구였다.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자 묘를 이장해주었다. 조광조 사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