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후한)
왕국(王國, ? ~ 18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반란자로 양주 한양군[1] 사람이다. 양주의 난 과정에서 반군 지도자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황보숭에게 깨졌다.
생애
편집187년(중평 4년), 양주자사 경비(耿鄙)의 신임을 받던 치중(治中) 정구(程球)가 간악했으므로 왕국은 저족과 강족을 아울러 난을 일으켰다.[2][3] 마침 금성적(金城賊) 한수도 몇 년 전부터 활개를 치고 있었다. 경비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여섯 개 군(郡)의 군사를 동원해 농서군 적도현(狄道縣)에 이르렀다. 반군은 양주별가(―別駕)[4]와 내통해 정구는 물론이거니와 경비도 죽였다. 왕국은 이어서 한양군도 포위하고는 한양태수 부섭에게 전 주천태수 황연(黃衍)을 보내 설득하기를, “성패가 이미 알 만합니다. 먼저 일어나셔야 위로는 패왕(霸王)의 업적을 이루고 아래로는 이려(伊呂)[5]의 공적을 올릴 수 있습니다. 천하에 한나라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태수께서 저희의 스승이 되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 하였다. 부섭은 이를 거절하고 싸우다 전사하였다.[6] 전후 경비의 사마(司馬) 마등도 반군에 합류하였고, 왕국 역시 합중장군(合眾將軍)을 자칭하며 이들과 합쳤다. 반군은 왕국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삼보(三輔)를 침탈하였다.
188년 11월(음력, 이하 모두 음력), 왕국이 우부풍 진창현(陳倉縣)을 공격하였다. 조정은 좌장군[7] 황보숭과 전장군 동탁에게 각각 2만 명을 줘 이를 구하게 했다.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해 싸움을 걸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189년 2월, 왕국은 80여 일을 공성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피폐해지기만 해 철퇴하였다. 비로소 황보숭이 추격해왔다. 대패하여 만여 명이 참수당하고 자신은 도주했으나 목숨을 잃었다.[8] 한수 등은 왕국을 폐하고 전 신도현령(信都―) 염충을 강제로 내세웠다가 염충이 그 화병으로 세상을 뜨자 내부 분열해 서로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