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
왕세자(王世子, Crown Prince, heir apparent) 또는 세자(世子)는 왕의 아들인 왕자들 중에 차기 왕위 계승의 제1순위에 있는 왕자를 일컫는 말이며,[1] 부인은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부른다. 군주제 국가 중 혈통에 의해 구성된 가문의 구성원에게 통치권을 물려줄 수 있는 정치제도를 세습군주제라 하는데, 이를 채택한 국가에서 왕의 아들중에 차기 왕권을 계승할 자로서 공인받은 왕자를 뜻한다.
조선시대에 왕세자의 자리는 대개 왕비가 낳은 적장자가 잇는 것이 원칙이였다. 왕세자는 차기 왕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예우를 받았으며 제왕학 등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2] 조선의 경우 동궁(東宮) 등에 별칭이 있었고, 대리청정을 제외하고는 정치와 인사에 간여할 수 없었다.[3] 유럽의 경우에는 왕위에 대한 법정추정상속인의 의미를 가지는 귀족작위가 수여되는 전통이 있으며, 해당 영지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세자의 자격 조건을 국왕의 적장자로 한 원칙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규범화된 전례가 있으며[4][5] 주자가례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또한 유럽 다수의 국가에서 여성상속을 금한것은 프랑크 족의 살리카 법의 선례를 따라 성립된 원칙이며,[6][7][8] 장자상속은 프랑크 왕국의 분할상속제가 권력투쟁을 심화시키자 이를 개선하고자 10세기 경부터 채택되기 시작했다.[9] 왕세자 책봉은 권력공백 최소화, 권력투쟁 예방, 후계자 조기양성이라는 장점이 있다.[10]
조선시대
편집호칭 유래와 변화
편집왕세자에 대한 경칭으로 저하(邸下)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말로는 동궁(東宮),[11] 춘궁(春宮), 저군(儲君),정윤(正胤),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이 있다.[12][13] 중국에서 유래된 태자라는 호칭은 세자보다 높은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왕국이라도 왕세자 대신 왕태자를 사용해서 권위를 높이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위만조선시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시대 원나라 간섭기 때부터 태자 대신 왕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13] 1894년(고종 31년)부터 다시 왕태자라는 칭호를 복권시켰다.[14] 처음에는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였다가, 후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로 바뀐다.[15] 후궁이 낳은 왕자는 군(君)이라 하고 왕비의 아들은 대군(大君)이라 구별하여 불렀다. 호칭 구별에만 그치지 않고 누리는 혜택도 큰 차이가 있었다.[16]
왕위계승 원칙
편집왕위 계승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왕비의 장남이 왕이 되는 적장자 왕위계승과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원칙이다. 적장자 왕위계승은 왕자간의 권력투쟁을 예방하고, 권력공백을 줄이며 후계자를 미리 교육시켜 장래를 준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10] 그러나 적장자보다 다른 왕자가 유능한 경우에는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정국이 불안했다. 또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들만 여러 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정치 불안이 가중되었다.[3] 적장자 계승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27명의 왕 중 7명만이 적장자 출신이었다. 적장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반면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이 된 경우는 20명이나 된다.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경우 대부분 격렬한 궁중 암투를 겪었다.[3]
왕세자의 삶
편집왕비가 낳은 적장자를 원자 (元子)[17]라 칭하는데, 원자의 세자책봉은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백관들을 모아놓고 세자책봉례를 거행한 후 바로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팔도에 알리며 사후에 형식적이었지만 중국의 허락을 받았다. 세자로 책봉되면 부모(왕과 왕비) 곁을 떠나 동쪽에 있는 동궁(東宮)[11]에서 기거하기 시작하며 나머지 왕자(대군)들은 궐밖으로 나가 사가에서 지냈다. 세자에게는 독립된 기관, 인원, 예산이 배정되어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세자의 호위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맡았고 세자의 교육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담당했다.[2] 혼례는 대체로 10세 전후시기에 치렀다. 세자는 세자빈 이외에 공식적으로 소실을 둘 수 있었다. 세자는 정치와 인사에 간여할 수 없었으나 필요에 따라 대리청정하는 경우는 있었다.[3] 세자가 불초(不肖) 하거나[18] 덕이 없는 처신을 할 경우에 폐위되기도 한다.[19] 또한 즉위하기 전에 죽으면 그의 아들인 왕세손이 왕위계승권을 이어받는다.
유럽
편집장자상속
편집상속과 왕위세습에 있어서 많은 나라들이 장자 우선 제도를 채택하는 반면에, 몽골족은 막내우선제를, 만주족이나 튀르크는 경쟁을 통해 후계자를 선정하는 등 다양한 제도가 운용되어 왔다.[9] 각기 장단점이 있기는 하나 골치아픈것은 동일하다. 살리족은 살리카법울 제정하여 여성상속을 금지했으며 형제간에는 분할상속제를 선택하였다.[20][21][22] 부족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경영하면서도 이런 전통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상속의 불만으로 인해 골육상쟁이 벌어졌고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었다. 메로빙거 왕조에 이어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의 말기까지 이런 갈등과 분열은 지속되었다.[9] 동프랑크 왕조에서 카롤링거의 직계는 911년에, 서프랑크에서는 987년에 카롤링거 왕실이 끝났는데,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분할상속제를 버리고 장자상속제를 도입하였다.[9]
공동통치와 반란
편집독일의 하인리히 4세는 1087년에 13살이 된 장남 콘라트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하였다.[23] 그런데 콘라트는 109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23] 1098년, 반란진압에 성공한 하인리히 4세는 장남 콘라트를 폐위시키고,[24] 차남 하인리히 5세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하였다.[23] 아울러 하인리히 4세는 차남 하인리히 5세에게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시켰다. 그러나 차남 역시 1104년 반란을 일으켰다.[25] 반란진압에 실패한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12월에 강제 퇴위당한 뒤 다음해 병사하고 말았다.[25]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1170년에 왕세자 헨리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권을 넘기지 않았기에 장남 헨리와 빈번하게 갈등했다.[25] 1173년 장남 헨리가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25][26]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장남 헨리는 1181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1183년 6월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25] 1188년에 차남 리처드가 상속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27][28][29] 헨리 2세는 평소 아끼던 막내 존마저 반란에 가담하자[29] 충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한채 1189년 7월 투렌 시농에서 죽고 말았다.[23][30][31]
왕세자의 개념이 정착되지 못했던 시절에 적장자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는 후계구도를 든든하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중앙집권을 위해서라도 권력세습 구도를 분명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반란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위계승권자를 공동통치자가 아닌 특정 지역의 영주로 임명하여 국정개입을 차단하는 전통이 정착되어갔다.[출처 필요]
법정추정 상속인
편집현대 유럽 대부분의 군주국에서 왕위계승은 적장자, 남성 우선 왕위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아들이 없을 경우 장녀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영국, 스페인, 덴마크, 모나코 등이 이 원칙을 지키며 스웨덴, 벨기에,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은 성별에 관계없이 첫째가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32] 차기왕위계승 1순위자에게는 왕위계승권자나 왕위에 대한 법정추정상속인[33]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상징성이 있는 실질적인 귀족 작위를 내리는 전통이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웨일스 공, 스페인은 아스투리아스 공, 네덜란드는 오라녜 공이라는 공식직함을 가진다.
영국
편집원래 웨일스 공은 웨일스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정식 작위로 웨일스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병합한 뒤, 1301년에 7살된 장남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2세)를 웨일스 공으로 임명하면서 웨일스 공은 영국 왕위 계승권자의 작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34][35]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왕세자 시절에 웨일즈 공에 서임된적이 없으나, 즉위한후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343년에 웨일스 공의 칭호를 내렸다. 불행히도 흑태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채 1376년에 사망하자 웨일스 공의 자리는 같은해 의회에 의해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에드워드 3세의 손자)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36] 이후에 잉글랜드의 차기왕위계승자에게 웨일스 공에 오르는 관례가 정착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2년 현재의 웨일스 공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맏아들인 찰스 왕세자이다.
스코틀랜드
편집캐릭 백작은 본래 스코틀랜드 남서부 캐릭(게일어 발음으로는 하레크, 오늘날의 사우스에어셔)의 지배자 작위였고 나중에는 영국 귀족 체계에 편입되었다. 모계로부터 백작위를 계승받은 캐릭 백작 로버트 더 브루스가 14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캐릭 백작위는 스코틀랜드 왕위와 매우 밀접해졌고, 15세기 이래로 왕위 계승자가 캐릭 백작위를 자동으로 겸하게 되었다.
이후 생겨난 작위 로스시 공작은 스코틀랜드 왕위(현 연합왕국 왕위)의 상속인에게 주어지며, 스코틀랜드 최고위의 공작 작위이다. 초대 로스시 공작 작위는 1398년, 로버트 1세의 외증손 로버트 3세의 장남 데이비드에게 수여되었다. 그 이후 국왕의 장남에게 주어졌으며, 이것이 바뀌어 왕위계승자에게 수여되게 되었다(초대 공작 데이비드는 왕위에 앉기 전에 정쟁에 휘말려 의문사하였다고 한다). 잉글랜드와 나라를 합친 후에도 작위는 계속 이어져, 잉글랜드의 콘월 공작과 동격으로 일컬어진다.
프랑스
편집1349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도피네 영지를 매입하면서,[37] 도피네 영주의 별칭이던 도팽(프랑스어: Dauphin)이라는 칭호를 프랑스 왕실에서 사용하게 되었다.[38] 최초로 도팽의 칭호를 받은 프랑스 왕세자는 샤를(훗날 샤를 5세)였다.[38] 필리프 6세는 도피네의 매입을 추진하며 당시 왕세자였던 장(훗날 장 2세)에게 줄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협상이 타결된 1350년에 사망하고 왕세자 장(Jean)이 장 2세가 되어 즉위하면서 도피네를 자신의 아들이자 새로운 왕세자 샤를에게 물려주었다. 1364년에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는데, 샤를 5세는 1368년에 자신의 아들 샤를 왕세자 (훗날 샤를 6세) 에게 도팽의 칭호를 물려주었다.[39] 이때부터 이 칭호는 프랑스 왕국의 왕위계승자(법정추정 상속인)를 뜻하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40] 그러나 '도팽'이란 용어는 1791년 9월 3일에 입헌군주제가 시작되면서 헌법 제2장 제3조 제1항에 의거하여 폐지 된후 프랑스의 왕세자 (prince royal de France)로 변경되었다. 왕세자라는 용어 역시 1892년 프랑스 제1공화국과 1848년 제2공화국 시절에 폐기되었다.
스페인
편집스페인의 왕위 계승자를 부르는 공식 호칭이다. 1388년 바요나 조약을 통해 장차 왕위 계승자에게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직속 영지로 주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스투리아스는 스페인 북서부의 지방으로 레콩키스타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최초의 아스투리아스 공은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이며 2022년 현재의 아스투이라스 공은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이다.
포르투갈
편집포르투갈에서는 1640년 이래 왕세자에게 브라간사 공작이나 베이라 공에 임명하는 전통이 생겼다.[41] 1578년, 국왕 세바스티앙(1554-1578)이 사망하자 그의 삼촌 엔히크(1512~1580) 추기경이 66세 고령에 즉위하지만 1년 6개월만인 1580년 1월 31일에 후계없이 죽고말았다.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놓고 경쟁이 벌어졌는데, 스페인 펠리페 2세가 마누엘 1세(1469~1521)의 외손자 자격으로 집권에 성공하며 포르투갈을 합병하였다.[42] 이후 스페인의 포르투갈 통치는 60년간 이어지다가 1640년에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로 즉위하며 투쟁을 통하여 독립하였다.[43] 주앙 4세는 1649년에 그의 장남 아폰수(훗날 아폰수 6세)를 브라간사 공작에 임명하여 왕세자임을 공인하였다. 1683년에 형 아폰수 6세의 왕위를 찬탈한[44] 페드루 2세는 1696년에 장남인 주앙을 브라간사 공작으로 임명하였다.[45] 이로써 왕세자에게 브라간사 공작위가 수여되는 일은 전통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1910년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오늘날까지 공화정이 이어지고 있다.[46]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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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편집왕세자 외에도 원자, 왕세녀, 왕세손, 왕세제, 왕세질 등의 호칭이 있다.
원자
편집왕비(정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는 원자(元子)라고 불리었다. 원자를 처음으로 책봉한 것은 태종때의 일이다.[47] 태종은 원자의 교육을 위해 성균관의 동북쪽 모퉁이에 학궁을 짓고, 원자를 보위할 기구로 경승부(敬承府)라는 관청을 두었다.[48] 원자란 장차 세자가 될 인물이니 곧 원자는 제2의 임금이라 할 수 있으므로 어려서부터 바르게 양육하고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원자의 교육기관인 경승부가 건립된후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루는 등 태종은 원자의 양육과 교육에 각별히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후계자로서 자질과 품성이 강한 왕권확립에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49]
왕세녀
편집유럽 왕실에서는 왕의 딸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면서 왕위계승서열 1위의 여성들이 왕세녀라는 칭호를 쓰게된다. 대표적으로 2022년 기준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이 있다.
왕세손
편집왕의 손자 왕세손(王世孫)이 세대를 건너 왕통을 잇는 경우도 있다.
왕세손의 경우 경칭은 각하(閣下)였으나 동궁정립을 받은 왕세손의 경우에는 왕세자처럼 저하(邸下)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정조과 헌종은 왕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세자의 아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었으면 왕은 자신의 손자인 왕세자의 아들을 왕세자 다음의 왕위 계승자로 왕세손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단종, 의소세손, 정조, 현종 등이 있다.
왕세제
편집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왕의 동생을 왕위 계승자로 삼는 경우는 왕세제(王世弟)라고 한다. 예시로 조선 국왕 영조, 작센 국왕 안톤, 게오르크, 작센 왕세제 막시밀리안(작센 국왕 안톤의 동생이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요한 형제의 부친) 등이 있다. 특이한 점으로 태종은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왕세질
편집왕세제의 경우와 비슷한 경우이다. 예시로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무함마드 빈 나예프의 경우이다. 선대 국왕 안톤이 후사가 없었고 다음 왕위계승자 왕세제 막시밀리안이 나이가 많아 왕위계승을 포기하여 그의 장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왕세질의 자격으로 안톤의 뒤를 이었다. 작센 왕국의 경우 후사가 없는 국왕이 많았다.
왕세자의 칭호
편집군주제 유지국가
편집국가 | 작위 명칭 | 작위 소유자 | 출생년도 | 비고 | |
---|---|---|---|---|---|
네덜란드 | 오라녜 공 | 오라녜 여공 카타리나아말리아 | 2003년 | 여성 | |
노르웨이 | 왕세자 | 노르웨이 왕세자 호콘 | 1973년 | ||
덴마크 | 왕세자 | 덴마크 왕세자 크리스티안 | 2005년 | ||
벨기에 | 브라반트 공작 | 브라반트 여공작 엘리자베트 | 2001년 | 여성 | |
부탄 | 왕세자 | 지그메 남기엘 왕축 | 2016년 | ||
브루나이 | 왕세자 | 알무흐타디 빌라 | 1974년 | ||
사우디아라비아 | 왕세자 | 무하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 1985년 | ||
스웨덴 | 왕세자 | 스웨덴 왕세녀 빅토리아 | 1977년 | 여성 | |
스페인 | 아스투리아스 공 |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 | 2005년 |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세자가 받는 칭호로서, 스페인이 통일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여성이다. | |
지로나 공작 몽트블랑 공작 세르베라 백작 발라게르 영주 |
아라곤 왕국의 왕세자가 받는 칭호로서, 스페인이 통일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
비아나 공작 | 나바르 왕국의 왕세자가 받는 칭호로서, 스페인이 통일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
영국 | 웨일스 공 | 웨일스 공 윌리엄 | 1982년 | ||
잉글랜드 | 콘월 공작 | 1982년 | |||
스코틀랜드 | 로스시 공작 | 1982년 |
군주제 폐지국가
편집국가 | 작위 명칭 | 비고 | |
---|---|---|---|
그리스 | 스파르타 공작 | ||
덴마크 노르웨이 | 노르웨이 공작 | ||
러시아 | 차레비치 | ||
루마니아 | 알바 줄리아 공작 | ||
몬테네그로 | 그라하보 대공 | ||
불가리아 | 투르노보 공작 | ||
브라질 | 프린시페 임페리아우 | ||
신성 로마 제국 | 로마왕 | 교황에게 인정을 받으면 로마왕, 교황의 승인이 없을 경우 독일왕 | |
독일왕 | |||
스웨덴 | 스카니아 공작 | ||
양시칠리아 | 칼라브리아 공작 | ||
이탈리아 | 피에몬테 공작 나폴리 공작 |
||
포르투갈 | 브라질 공작 | ||
프린스 로열 베이라 공작 |
|||
브라간사 공작 | |||
프랑스 | 도팽 | ||
프랑스 | 프린스 로열 | ||
도팽 | |||
프랑스 | 로마왕 | ||
프랑스 | 프린스 임페리얼 | ||
헝가리 | 렉스 일리오르 |
각주
편집- ↑ [네이버 국어사건] 왕세자 (王世子) 제후국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을 임금의 아들.
-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太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태자(세자)는 차기 왕이기 때문에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따라서 동궁 또는 세자궁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가지고 인원과 예산이 배정되었다. 특히 세자에게 중시된 것은 교육과 신변 보호였다. 동궁아관(東宮衙官)·동궁관 등으로 불려오다가 1392년(태조 1) 신정 관제 때 세자관속(世子官屬)으로 개칭된 이 기구가 바로 이러한 일을 맡았다. 이것은 뒤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분리되어 각각 교육과 신변 보호 일을 담당하였다.
- ↑ 가 나 다 라 [네이버 지식백과] 왕세자 (문화원형백과 궁중문양, 2003.,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太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네이버 지식백과] 훈요십조 [訓要十條] (두산백과).....주요 내용을 보면...(중략)....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이하생략)
- ↑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p66
- ↑ Cave, Roy and Coulson, Herbert. A Source Book for Medieval Economic History, Biblo and Tannen, New York (1965) p. 336
- ↑ [다음백과] 살리카 계승법 (Salic Law of Succession)
- ↑ 가 나 다 라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됭 조약 - 근대 서유럽의 테두리가 그려지다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함규진)
-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太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태자를 미리 결정한 것은, 첫째 왕위의 공백을 최소화하고, 둘째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국의 혼란을 막고 전대 왕의 정치를 안정적으로 계승하며, 셋째 일찍부터 태자로 책립해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덕목을 쌓고 군주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동궁 [東宮] (두산백과).....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가 경복궁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따라서 동궁은 황태자 ·왕세자를 일컫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거처하는 궁(宮)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왕세자를 동궁마마라고 호칭했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건립된 것은 세종대왕이 세자 문종을 위해 동궁을 건립하였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왕세자 [王世子]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 가 나 심재우 外 7인 공저<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년 p16
- ↑ 《조선왕조실록》1894년(고종 31년) 12월 17일 1번째 기사
- ↑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太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왕세자는 약칭 세자로 널리 쓰였는데, 이는 몽고의 간섭을 받아 제도 및 용어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말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정하면서 태자의 용어가 복고되었다.
- ↑ 심재우 外 7인 공저<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년 p17
- ↑ [네이버 국어사전] 원자 (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 ↑ [네이버 국어사전] 불초하다 (不肖하다) 못나고 어리석다.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 ↑ [네이버 지식백과] 태자 [太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적자(嫡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원자가 불초(不肖)하면 그 차자(次子)에게 전하고, 차자도 불초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전해 대통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정비 소생의 적장자가 우선적으로 태자(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자가 불초하거나 정비에게 소생이 없을 때에는 후궁 소생에게도 자격이 부여되었다. 태자(세자)가 즉위 전에 죽은 경우에는 제자(諸子) 중에서 택정되었다.
- ↑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p66
- ↑ Cave, Roy and Coulson, Herbert. A Source Book for Medieval Economic History, Biblo and Tannen, New York (1965) p. 336
- ↑ [다음백과] 살리카 계승법 (Salic Law of Succession)
- ↑ 가 나 다 라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왕가, 임동욱)....1087년 독일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은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 2세도 있었다. 콘라트 2세는 1093년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기반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인리히 4세는 수세에 몰렸지만 벨프 5세가 마틸데와 결별하고 자신을 찾아온 덕분에 1097년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듬해, 콘라트 2세를 대신해 동생 하인리히 5세가 독일 공동 국왕으로 새로이 선출되었다.
- ↑ 마틴 키친 <케임브리지 독일사>시공사 2004.10.15, p62
- ↑ 가 나 다 라 마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왕가, 임동욱).....1104년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의 퇴위를 요구하며 귀족들과 연합해 반기를 든 것이다. 체포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1105년의 마지막 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독일 국왕, 이탈리아 국왕, 아를 국왕 등 네 개의 직위를 모두 아들에게 넘겼다..(중략)..그는 7월 말 갑작스레 질병을 얻었다. 오늘날 벨기에 리에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9일 동안 병상에 누웠다가 그는 결국 1106년 8월 7일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 ↑ [네이버 지식백과] 리처드 1세 [Richard I] - 만용과 탐욕의 왕 (영국 왕가, 박우룡)....헨리 2세의 왕비인 엘레아노르는 남편의 여성편력에 앙심을 품고 아들들의 반란을 부추기면서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다.
- ↑ Warren, W. L. (2000). Henry II (Yale ed.), pp. 621–622. New Haven, U.S.: Yale University Press. ISBN 978-0-300-08474-0.
- ↑ [네이버 지식백과] 리처드 1세 [Richard I] - 만용과 탐욕의 왕 (영국 왕가, 박우룡)....필립은 프랑스 내에 있는 잉글랜드 영지를 다시 회복하기로 결심하였다. 필립은 우선 리처드의 반란을 돕는 조건으로 리처드로 하여금 봉블랭에서 ‘봉신의 예’를 표하도록 했다(1188년 11월). 국내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순을 진행한 것이다.
- ↑ 가 나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1.5, p126
- ↑ [네이버 지식백과] 헨리 2세 [Henry Ⅱ] - 플랜태저넷 왕조를 개창 (영국 왕가, 박우룡)...부자간의 전쟁은 아버지를 줄기차게 추격한 아들의 승리로 끝났다. 그 와중에 헨리 2세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 존이 상황이 불리해지자 리처드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헨리는 싸울 의욕을 상실했고, 결국 싸움에 진 늙은 왕은 1189년 여름 시농에서 죽었다.
- ↑ Wilfred L. Warren(en:W. L. Warren) 저, Henry II,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0, 700 p. 중 624 p. (ISBN 978-0-300-08474-0)
- ↑ [네이버 지식백과] 왕위계승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 [다음백과] 법정상속인 (法定相續人, heir)...재산권소유자의 생존시에는 법정추정상속인(法定推定相續人, heir apparent) 또는 추정상속인(推定相續人, heir presumptive)이 있을 수 있다. 법정추정상속인은 재산권소유자보다 오래 생존하는 한 그 상속권이 결코 침해되지 않으며, 피상속인의 사망시에 당연히 법정상속인이 될 수 있는 자이다. 추정상속인은 그당시로는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법정상속인이 될 수 있지만 보다 가까운 상속인(선순위자)의 출현에 따라 그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는 자이다. 스웨덴에서는 국왕의 자녀 가운데 최연장자가 왕권의 법정추정상속인이다. 영국에서는 국왕의 법정추정상속인이 장자(長子)이며, 아들이 없는 경우에 상속계보에서 장녀를 대체할 만한 남자 형제가 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장녀가 추정상속인이 된다(영국법).
- ↑ [네이버 지식백과] 프린스오브웨일스 [Prince of Wales] (두산백과)....영국 황태자의 칭호, 또는 영국 왕의 법정추정 상속인이 될 장자의 칭호. 1282년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에 침입한 웨일스 부족을 격파한 이후, 웨일스는 영국 왕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전쟁 중에 왕의 차남 에드워드(후에 에드워드 2세)가 북웨일스의 카나번 성(城)에서 태어났는데, 그 직후에 형의 죽음으로 황태자가 되고, 이어서 에드워드 1세로부터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때부터 영국의 황태자는 이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에드워드 1세 [Edward I] - 대 브리튼 섬 통합을 시도 (영국 왕가, 박우룡).....1284년 러들런법에 의해 르웰린의 공국은 잉글랜드 왕령에 병합되었으며...(중략)...카나번 성에서 태어난 왕자 에드워드(나중에 에드워드 2세)가 1301년 웨일스 공으로 서임되었는데, 이 직함은 이후 잉글랜드 왕세자의 칭호로 자리 잡게 되었다.
- ↑ Saul, Nigel (1997). Richard II.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ISBN 0-300-07003-9. p17
- ↑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p89
- ↑ 가 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Dauphin, title of the eldest son of a king of France, the heir apparent to the French crown, from 1350 to 1830. The title was established by the royal house of France through the purchase of lands known as the Dauphiné in 1349 by the future Charles V.
- ↑ [다음백과] 도팽(Dauphin de France).....1349년 비에누아의 도팽이 된 프랑스의 샤를은 1364년 프랑스 왕위에 올랐고, 훗날 샤를 6세가 된 아들에게 도피네를 물려주었다(1368). 그 뒤부터 프랑스 왕의 맏아들은 도팽 칭호를 받았다.
-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Charles of France, made dauphin of Viennois in 1349, became king of France in 1364 and granted Dauphiné to his son, the future Charles VI, in 1368, thus establishing the precedent whereby the French king’s eldest son became dauphin.
- ↑ [다음백과] 브라간사 왕가 (House of Bragança)....브라간사 공작 1세는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1세의 서자인 아폰수(1461 죽음)였다. 164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자 브라간사 공작 8세인 주앙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에 올라 주앙 4세가 되었다. 이에 따라 브라간사 공작이라는 칭호는 포르투갈 왕위계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붙여지게 되었다.
- ↑ [네이버 지식백과] 펠리페 2세 [Felipe II] (두산백과)...1580년 포르투갈의 왕 엔리케 1세(Henrique I)가 자녀가 없이 죽자 그의 조카인 안토니오(António de Portugal)가 왕위계승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마누엘 1세의 외손자인 펠리페 2세도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며 알칸타라 전투에서 안토니오의 세력을 패퇴시키고 리스본을 점령했다.
- ↑ 강석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4.15 p454 ~ 455
- ↑ 강석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4.15 p460
- ↑ Nizza da Silva, Maria Beatriz (2009). Reis de Portugal: D. João V (in Portuguese). Lisbon: Temas & Debates. p21
- ↑ 강석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4.15 p512
- ↑ 심재우 外 7인 공저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년 p58
- ↑ 태종실록 3권, 1402년 태종 2년 4월 28일........置元子府, 號敬承。 革司宰直長一、惠濟庫令一、壽昌宮司正一、壽寧宮注簿一, 置少尹一、丞二、注簿二。
- ↑ 심재우 外 7인 공저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년 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