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
원광(圓光, 542년~640년[1])은 신라의 승려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중국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이름이 높았던 원광은 신라로 돌아온 후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하였다.[2]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3]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2]
원광 | |
---|---|
법명 | 원광 |
출생 | 542년 신라 서라벌 |
입적 | 640년(84세) |
저작 | 《여래장경사기》,《대방등여래장경소》 |
직업 | 학자 |
생애
편집원광의 생애에 대해서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간략히 나와 있다.[4]
제자백가(諸子百家) · 사서삼경(四書三經) · 《춘추(春秋)》·《사기(史記)》 등을 읽고 불경을 공부하여 진흥왕 27년(566년) 승려가 되었다.[2]
진지왕 3년(578년) 진(陳)에 건너가 《열반경》, 《성실론(成實論)》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2] 또한 원광은 수나라에 가서 여러 경전을 배웠다.[2] 589년에 수나라에 건너가 11년간 유학하면서 그는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양쪽의 불경을 모두 공부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승려 담천(曇遷) · 혜원(慧遠) · 영유(靈裕) 등을 만나 《열반경(涅槃經)》·《성실론(成實論)》·《구사론(俱舍論)》·《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3]
진평왕 22년(600년)에 신라로 돌아와 대승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했다.[2] 그는 자신의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복잡한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평범한 말들로 표현하였다. 귀산(貴山)등에게 화랑도 세속5계(世俗五戒)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3] 그 밖에 왕명을 받아 수나라에 보내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었고 황룡사 백고좌회에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하였다.[3]
원광은 대승불교의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화랑도 및 근왕사상(勤王思想)[5]과 연결시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3]
사상
편집불교 학자로 한국 고대 불교를 연구한 고익진은 자신의 저서 《한국 고대불교 사상사》에서 원광의 사상은 다음 인용문에 나오는 것처럼 유식 계통의 섭론학이라고 하였다.[6]
원광의 이러한 수학 배경에서 그의 사상을 유식 계통의 섭론학이라고 하겠는데 그의 활동과 저술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광은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를 두어 항규로 삼았다는데, 이것은 종래의 무속적 점복행위를 《점찰선악업보경》의 점찰법에 의해 불교에 섭화코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점찰경》의 권하에는 심오한 대승교리가 설해져 있다. "대승에 향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실경계(一實境界)에 의지해서 신해(信解)를 닦아야 한다. 그 일실경계란 중생의 심체가 본래부터 불생불멸하고 자성청정하고 무장애한 것이다. 또 그 마음을 이르되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점찰경》 권하의 이러한 일실경계(여래장)는 섭론종에서 말하는 제9아마라식(amala-vijnana)과 동일한 것이다. 원광의 저술로는 다시 《여래장경사기》와 《대방등여래장경소》가 알려져 있는데, 《대방등여래장경》은 "일체중생은 여래장(tathagata-garbha)이요, 번뇌에 싸인 중생신(衆生身) 속에 여래신(如來身)이 있다"는 것을 아홉 가지 비유를 들어 쉽게 이해시켜 준다. 이 여래장 또한 섭론종의 제9식에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광은 섭론가라고 할 만한다. 그러나 그가 《섭대승론》의 복잡한 심식설을 설하지 않고, 통속적인 점찰법을 행하고, 또 교리 내용이 지극히 단순한 《여래장경》을 주석한 것은 당시의 신라 교학이 그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 오계
편집원광은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한 후 《여래장사(如來藏私記)》·《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를 찬술하는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3]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3] 그는 귀산(貴山)과 추항 두 청년에게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윤리강령(倫理綱領)을 가르쳐 당시 신라 청소년들이 지켜야 할 실생활의 윤리를 제시하였다.[3] 세속오계는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③ 교우유신(交友有信),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이 덕목들은 후에 화랑(花郞)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3] 세속오계 중 특히 살생에 대한 조항은 불교 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 윤리로 요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광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3]
걸사표
편집원광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삼국유사 의해편의 원광전기에 따르면, 원광은 정관 14년에 죽었으며, 99세였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원광,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 시대의 불교 > 원광,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원광에 대한 일화가 수록된 삼국유사 의해편은 《당속고승전》 제13권을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 ↑ 근왕(勤王)은 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 ↑ 고익진 (1989).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