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열
생애
편집1966년 당시 18세였던 유재열은 "호생기도원[2]에 다녔다."[3] 어린종라고 불린 그는 전국적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1975년 그는 성도들과 함께 청계산 중턱에 연건평 8백여평의 성전을 지었다.[4] 이후 유재열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미국 이민을 떠났다. 현재 그는 종교와는 상관없는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각주
편집- ↑ 탁명환, 《기독교 이단 연구》 p. 379 [1] Archived 2014년 5월 3일 - 웨이백 머신
- ↑ 好生祈禱院은 일천구백육십사 년 金龍基가 창시한 종교로서 金龍基 일천구백이십오 년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해 이십삼 세 경찰에 투신해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전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고 크게 충격받고서 십여 년간 精神異常과 합병증으로 고생하다가 삼십구 세 때 야소에게 계시받고 인제에 있는 교회에 입교해 삼 일 만에 질병이 낫는 체험했다. 사십 세 서울 상도동 사자암에서의 첫 집회 후 신도가 점증하자 계시 때문에 好生祈禱院을 조성했다. 자신의 치병 체험을 신도에게 선전하고 안수·안찰·방언으로 환자들의 치병하여 한때 신도 오백여 명이었다. 일천구백육십오 년 과천 청계산 자락으로 신도 오십여 명과 이주했다가 일천구백육십육 년 충북 중원군 산척면 석천리로 함께 이주한 신도들과 집단으로 생활하다가 소멸했다. 신도들은 교주 金龍基를 主님이나 아버님이라고 불렀고 말세 심판이 지금 일어나고 지상 천국이 건설되고 말세 피난처가 好生祈禱院이라고 확신했다. 경전은 기독교 《성경》을 그대로 사용했다.
- ↑ “서울육백년사: 장막성전(이삭교회)”. 2014년 5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6월 14일에 확인함.
- ↑ 동아일보, 신흥종교단체, 1975년 4월 3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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