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강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

육강(陸康, 126년 ~ 195년)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인이다. 는 계녕(季寧)이며 양주 오군 오현(吳縣) 사람이다.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행해 명성이 높았다. 여강태수일 적에 원술손책의 침탈에 맞섰다가 패하였다. 오나라의 지략가 육손의 작은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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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했으며 품행도 부지런히 닦았다. 오군태수 이숙(李肅)에게 효렴으로 뽑혀 에서 근무했다. 이후 이숙이 를 받아 처형당하자 그 시체영천군까지 운구해 장사지냈다.[1] 그 의열함이 알려져 양주자사 장민(臧旻)으로부터 무재(茂才)로 천거되고 발해군 고성현령(高成―)에 임명됐다. 변방의 이었기에 관습상 각 호(戶)마다 한 사람은 를 갖추고 불의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왕래도 하지 못했다. 지방관이라도 새로 부임하면 번번이 징발되어 성곽을 보수하기 일쑤였다. 육강이 이르러 이를 모조리 철폐하니 백성들이 기뻐했다. 은혜와 신의로써 다스리자 도적도 잠잠해지고 군에서는 그 공적을 상표하였다. 178년(광화 원년)에 무릉태수로 옮겼으며 이후 계양군과 낙안군(樂安郡)의 태수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칭송받았다.

185년(중평 2년),[2] 영제가 동상을 만드려는데 비용이 부족해 농토 한 무(畝, 묘)당 10전(錢)을 징수하고자 했다. 백성들은 수해와 한해(旱害)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차였다. 육강이 상소를 올려 간했다가 황제의 총명을 망국에 빗대 불경을 저질렀단 명목으로 모함을 받고는 함거(檻車)에 실려 잡혀갔다. 시어사(侍御史) 유대가 이 건을 맡아 살핀 덕분에 면직으로 그쳤다. 이후 의랑(議郞)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여강군에서는 180년에 황양(黃穰) 등이 강하만(江夏蠻, 강하군 일대의 만인)과 연계해 10여만 명을 일으켜서는 네 개 현을 침탈하고 수 년간 준동하였다.[3] 육강이 여강태수가 되어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손자 육상(陸尙)이 낭중(郎中) 벼슬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헌제가 즉위한 이래 천하가 매우 혼란한데도 육강은 위험을 무릅써 효렴과 계리(計吏)를 조정에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충의장군(忠義將軍)이 더해져 관질이 중이천석(中二千石)에 이르렀다.

194년(흥평 원년),[4]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원술은 서주를 치고 싶어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육강에게 3만 곡(斛)의 원조를 청했다. 원술은 반역자였으므로 육강은 통하지 않고 그 침략에 대비했다. 원술이 대노하여 부하 손책을 보내 여강을 수 겹으로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손책은 일찍이 육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육강이 아닌 주부(主簿)가 접대했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어오던 터였다.[5] 성밖의 휴가자들은 일단 숨었다가 야밤을 이용해 귀환하였다. 195년, 2년의 항전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며 한 달 정도 지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70세였다. 집안사람 100여 명은 고생하다 거의 절반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키다 사망한 것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 육준(陸儁)을 낭중으로 삼았다.

영제에게 올린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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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건대 선왕들은 애민을 귀히 여겼다 합니다. 부역과 부세를 줄이고 번잡한 규율을 간소화해 만민이 따르고 신령도 덕(德)으로 응했습니다. 말세를 부르는 쇠주(衰主)[6]는 사치가 극에 달하고[궁사극치, 窮奢極侈],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며, 탐욕을 부려 아랫사람을 핍박합니다. 폐하의 성덕은 하늘을 이어 융성해야 하거늘 이번에 무(畝)마다 을 걷어 동상을 주조한다는 조서를 엎드려 읽으니 비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세금은 10분의 1이었고 주나라에선 철법(徹法)이라 하였습니다. 철(徹)은 '통한다[通]'는 뜻으로 가히 만세토록 행할 정도란 말입니다. 노 선공은 공전(公田) 이외의 농지까지 조세를 부과하는 세무(稅畝, 세묘)를 실시해 메뚜기 유충 떼를 당했고 노 애공 때의 증세는 공자에게 지탄받았습니다. 어떻게 백성의 재물을 수탈해 쓸모없는 동상을 제작하겠으며, 거룩한 계율을 저버리고 망한 왕의 방식을 좇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좌씨전》(좌전)에도 ‘군주의 거동은 반드시 기록하는데 그 기록이 법도에 맞지 않으면 후세가 어찌 본받겠습니까’란 구절이 있습니다. 폐하께선 이를 주의 깊게 성찰해 폐단은 고치고 선은 추구함으로써 만백성의 원망을 막으셔야 합니다.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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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아닌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제15회에서 손책에게 정복되었다고만 짤막하게 언급된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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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버지 : 육속(陸續)
    • 아버지 : 육포(陸襃) - 지조가 있었다. 거듭 부름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  : 육우(陸紆) - 는 숙반(叔盤). 성문교위(城門校尉)를 지냈으며 육손의 할아버지이다.[7]
      • 본인 : 육강
  • 손자 : 육상(陸尙) - 아버지 미상. 육강이 여강태수일 적에 낭중이 되었다.
  • 아들 : 육준(陸儁) - 육강 사후에 낭중이 되었다.
  • 아들 : 육적
  • 손자 : 육굉(陸宏)
  • 손자 : 육예(陸叡)
  • 손녀 : 육울생(陸鬱生)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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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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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승, 《후한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57권 오서 제12 육적에서 인용
  2. 《후한서》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3. 《후한서》86권 열전 제76 남만
  4. #원술에게 공격받은 해 참조
  5.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
  6. 비슷한 시기 순열도 《전한기》(前漢紀, 한기)에서 군주를 여섯 유형으로 분류하며 쇠주에 대해 논한 바 있다.
  7. 배송지 주석, 《육씨세공》(陸氏世頌) ; 삼국지58권 오서 제13 육손에서 인용
  8. 《삼국지》52권 오서 제7 고옹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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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한서》31권 열전 제21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육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