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푹미엔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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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푹미엔딘(베트남어: Nguyễn Phúc Miên Định / 阮福綿定 완복면정, 1810년 8월 5일 ~ 1886년 11월 5일)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족이다. 민망 황제의 3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가비(嘉妃) 팜티뚜옛(范氏雪)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푹옌(베트남어: Nguyễn Phúc Yến / 阮福宴 완복연)이었으나 개명했다. 자는 민띤(베트남어: Minh Tĩnh / 明靜 명정), 호는 동찌(베트남어: Đông Trì / 東池 동지)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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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8월 5일에 태어났고, 할아버지 자롱 황제가 이름을 응우옌푹옌이라고 지어주었다. 3살 때 어머니 가비가 죽자 할머니인 순천고황후(順天高皇后) 쩐티당(陳氏璫)에게 맡겨져 자랐다.

민망 황제 재위 초에 큰형인 응우옌푹미엔똥과 함께 출각(出閣)하여 독서(讀書)를 했다. 이때 여러 책을 두루 보았으며, 시를 짓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1823년, 봉시(奉侍)하는데 편하도록 후에 왼편에 부저(府邸)를 설치하였다.

1830년, 수춘공(베트남어: Thọ Xuân Công / 壽春公)에 봉해졌고, 그해 가을에 종인부(宗人府)가 설치되자 명명제는 그를 종인부우종정(宗人府右宗正)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명명제는 재위 동안 자주 순행을 나갔는데, 매번 그에게 남아서 후에를 지키도록 하였다.

1842년 봄, 응우옌푹미엔딘은 티에우찌 황제를 따라 하노이로 가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때 청나라 사신 보청(寶靑)이 교자에 앉아서 주작문(朱雀門)으로 바로 들어오려고 하였는데 관리들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이때 응우옌푹미엔딘이 정색을 하고 보청을 꾸짖어 멈추게 하였다. 이후에 티에우찌 황제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특이권휴(特異眷庥) 네 글자가 새겨진 백옥패(白玉佩)를 하사하였다.

1845년 여름, 티에우찌 황제가 분방자부(分房字部)를 만들게 하고 이를 여러 공들에게 나눠주어 사윤(嗣胤)을 밝혔는데, 이때 응우옌푹미엔딘이 수(水) 자부(字部)를 받았다.

1865년, 뜨득 황제가 응우옌푹미엔딘이 나이가 많고 또한 덕이 아름답다고 여겨 평상시의 추배(趨拜)를 면하게 하였고, 조회 시엔 연교(軟轎)에 앉아 일정문(日精門) 밖에 이를 수 있게 해 우대하였다. 그해 응우옌푹미엔딘은 섭존인부좌존정(攝尊人府左尊正)에 임명되었다.

1874년, 수춘군왕(베트남어: Thọ Xuân Quận Vương / 壽春郡王)으로 진봉되었다. 그러자 그는 함께 군왕으로 진봉된 영순공(寧順公) 응우옌푹미엔응이와 함께 상소하여 군왕의 작위를 사양하였으나 뜨득 황제는 연로한 지친을 공경하는 의미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8년 봄, 뜨득 황제는 그의 오순대수(五旬大壽)를 맞이하여 응우옌푹미엔딘을 수춘왕(베트남어: Thọ Xuân Vương / 壽春王)에 봉했다.

1880년, 일곱째 아들인 수춘군공 응우옌푹홍깍이 죽자 이 때문에 상심하여 병을 얻었다.

1883년, 뜨득 황제가 죽었는데, 유명을 남겨 응우옌푹미엔딘과 수리군왕(綏理郡王) 응우옌푹미엔찐(阮福綿寊)으로 하여금 보정(輔政)하게 하였다.

1885년, 함응이 황제가 궁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저항하는 근왕 운동을 펼치자 응우옌푹미엔딘은 양궁(兩宮)의 의지(懿旨)를 받들어 국정을 권섭(權攝)하였다. 아울러 수리(綏理), 해녕(海寧), 홍화(弘化)의 여러 공을 복작시키고 수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청하였다. 그해 가을에 동카인 황제가 즉위하자 응우옌푹미엔딘은 상소하여 정권을 반납할 수 있도록 청했고, 동카인 황제는 그에게 상을 내렸다.

1886년 겨울, 응우옌푹미엔딘은 사망하였다. 동카인 황제는 3일 동안 도조(悼朝)하였고, 시호를 단각(베트남어: Đoan Khác / 端恪)으로 하고 사당을 건립하였다.

저서로는 《명명궁사(明命宮詞)》와 《정명애방시집(靜明愛芳詩集)》 등이 있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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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푹미엔딘은 144명의 자식(아들 78명, 딸 66명)을 두었는데, 이는 부친인 민망 황제보다 많은 수이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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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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