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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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덕은 1875년 을해년에 일본 운요호(운양호)가 9월 22일 강화도 초지진에서 포격전을 벌이고 난 후 영종도로 와서 침략할 때 영종진첨사로서 방어를 해야 했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겁을 먹고 진지를 이탈하여 영종진과 연결된 자연도로 피난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쉽게 침입하도록 방치했다. 이로인하여 영종진 진지 내의 모든 관아가 불에 타고 전사자가 35명에 달하고, 포로가 16명이 되었다. 진지에 있던 많은 화포와 무기류를 비롯한 재물과 문서들이 약탈 당하였다. 이때 약탈당한 것들은 일본 운양호 선장 보고서에 명시돼 있으며 일본에 싣고가서 신사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민덕은 영종진 패전의 책임으로 곤장 100대와 함께 파직됐다.
일본은 영종진사건을 핑계로 오히려 손해배상을 요구하면서 개항을 요구하였고 이듬해인 1876년에 강화도에서 병자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됐다.
이로부터 일본이 침략의 발판을 만들게 됐고 조선은 개항을 강요당하여 1883년에 서울의 인후지지인 인천을 개항할 수 밖에 없었다.
치욕의 한일병탄이 이민덕의 무능으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