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 (1566년)
이분(李芬) 명종 21년(1566) 병인년 ∼광해군 11년(1619).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형보(馨甫) 호는 묵헌(黙軒)이다. 통훈대부 병조정랑.
조부는 덕연부원군 이정(李貞)이며 참판공 이희신(李羲臣)의 차남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조카이다. 14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숙부인 이순신의 보살핌을 받았다. 임진왜란(1592)에는 충무공 이순신 곁에서 문서 작성과 명나라 장수 접대 등의 일을 도왔다.
선조36년 (1603) 계묘년 사마시(式年試) 진사 3등 50위.
선조 38년(1605) 비변사가 수령의 재목될 만한 자와 학행의 정예한 자를 천거할 때 수령에 천거되었고, 칠석과제(七夕科製)에 입격(入格)하여 관시(館試)에 부쳐졌다.
선조 41년(1608) 무신년 문과의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시다. 품계는 통훈대부로 형조좌랑, 병조정랑이 되시고 <선조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시다.
광해군 2년(1610) 서장관(書狀官)으로 동지사 정경세(鄭經世)를 따라 염초(焰硝: 박초로 만든 약재)를 사오는 데 공헌하였다 하여 승급되었다.
광해군 9년(1617) 강원‧경상조도사(江原慶尙調度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백성들을 모집하고 곡식을 납부할 때 노직첩(老職帖)과 추증(追贈)당상직첩(追贈堂上職帖) 및 추증(追贈)당상가선실직첩(追贈堂上嘉善實職帖)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데, 공명첩(空名帖)을 더 많이 만들어 곡식 얻을 길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폐비문제에 대하여서는, ‘변란에 대처하는 문제를 적절하게 하는 것이 묘당에 달려 있다’하여 일의 순리를 좇았다. 사과(司果) 등을 역임하였다. 예론에 밝아 <가례박해>, <방례유편>, <충무공행록>을 저술하다.
명종 21년(1566) 병인년 ∼광해군 11년(1619) 기미년 4월2일 향년 54세로 별세. 묘는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풍암공 좌측 산기슭 표석.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로 부는 이의남, 조부는 한천도정 이숙으로 정종의 왕자 덕천군 이후생의 5세손이며 외조부는 첨정청풍김俶卿이다. 슬하에 1녀를 두었다.
字馨甫 號黙軒 一六0三年宣祖癸卯進士 薦除王子師傅 一六0八年 宣祖戊申魁文科通訓大夫兵曺正郎 有學行著家禮剝解 邦禮類編 忠武公行狀 一五六六年明宗 丙寅生 一六一九年光海己未四月二日卒 享年五十四 墓龍仁郡水枝面古基里 楓巖公墓左麓有 表石 配淑人全州李氏 父義男 祖漢川都正塾 定宗王子德泉君厚生五世孫 外祖僉正清風金俶卿 墓祔[1]
- ↑ 덕수이씨대종회. 《德水李氏世譜 덕수이씨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