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휴
행적
편집손등의 학우
편집약관에 제갈각(諸葛恪), 고담(顧譚), 진표(陳表) 등과 함께 태자 손등(孫登)의 동료가 되었다.[1][2] 태조의 명령으로 아버지 장소에게서 《한서》를 배우고, 궁궐로 돌아와 손등에게 이를 강의했다.[1][3] 장휴가 나아가 수업할 때에는 문의(文義)를 지적하고, 사물을 분별하며, 아울러 장조(章條)가 있었다.[4] 매양 연회 자리에서는, 술이 무르익으면 음악을 지었고, 손등도 번번이 자신을 낮추어 함께 즐겼다.[4] 장휴는 사람됨이 해박하고 달통하여, 손등이 사랑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4] 중서자를 거쳐 우필도위로 전임되었다.[1] 태조는 항상 사냥을 나가, 저녁 때가 되어야 돌아왔는데, 장휴는 상소를 올려 간언했다.[1] 태조는 이 상소문을 매우 좋게 여겨, 장소에게 보여 주었다.[1] 손등이 죽은 후, 시중, 우림도독이 되고 삼전군사를 다스렸으며, 옮겨 양무장군이 되었다.[1]
손패파의 모함으로 죽다
편집아버지가 죽은 후, 장형 장승(張承)은 따로 작위가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1]
241년, 고승(顧承)와 함께 수춘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위위장군 전종(全琮)은 위의 왕릉(王淩)와 싸워 형세가 불리하였고, 승세를 탄 위군은 오영장 진황의 군대를 함몰했다.[1] 장휴는 고승과 함께 위군을 분격하여, 마침내 위군을 멈추게 했다.[1] 전종의 군자 전서(全緖)와 전단(全端)은 멈춘 위군에 공격을 가해, 물러나게 했다.[1] 후의 논공행상에서 장휴와 고승의 공을 전서와 전기(全寄)의 공보다 높여,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이 되었고 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이 되었다.[1]
전씨 일족은 이를 원망했다. 전씨 일족은 노왕 손패(孫覇)의 당이었으므로, 노왕의 무리는 장휴가 고승과 함께 작피 싸움의 논공에서 전군 진순과 통정하여 공적을 속였다고 하였다. 결국 장휴, 고승, 고담은 함께 교주로 유배당했다.[1] 중서령 손홍은 아첨하고 거짓되며 심지가 비뚤어졌으므로, 장휴는 평소에 이를 분해했다.[1] 손홍은 이로 인해 참소하여, 조서를 내려 장휴에게 죽음을 내렸다.[1] 향년 41세였다.[1]
인물평
편집손등이 죽을 때 올린 표에서, “…(초략)… 장휴·고담·사경은 모두 기민하고 식견이 있으므로, 들어와서는 심복을 맡기는 것이 마땅하며, 나가서는 무위를 날려 삼군을 격려할 만합니다. …(말략)…”이라 했다.[3] 다음은 진수의 평이다.“장휴와 고승은 뜻을 닦고, 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사람들의 무함을 받아 서로 쳐, 남쪽 땅으로 유배당했으니, 슬프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