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공주(貞善公主, 1404년 ~ 1424년 3월 5일(음력 1월 25일))는 조선의 공주이며, 태종의 4녀이자 적4녀이다. 어머니는 원경왕후이다. 세조 시대의 장군인 남이는 정선공주의 손자이다. 또한 신사임당의 외고조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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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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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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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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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궁주(貞善宮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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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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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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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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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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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년 3월 5일 (양력) (향년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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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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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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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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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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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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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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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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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1녀
남빈(南份) 신자승(申自繩)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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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태종 4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일, 우의정 남재(南在)의 손자인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424년(세종 6년) 1월 25일, 21세로 죽었다.[1] 세종은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사제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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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은 말하노라.
- 죽을 때가 되어서 죽게 되는 것은 비록 기수(氣數)에 관계된다 하나,
- 동기되는 마음은 유명이 다를지라도 간격은 있을 수 없도다.
- 오직 너 공주는 성품이 정숙(靜淑)하고 곧으며, 행실은 공손하고 착하였다.
- 중곤(中壼)에 있을 때로부터 극진한 효성이 숙성하였고,
- 집을 가지기에 이르러서 근검함이 더욱 나타났다.
- 바로 규문(閨門)의 화목함을 이루었고, 이로써 척리(戚里)의 규범을 보여 주었다.
- 이러므로 소고(昭考)께서도 특히 종정(鐘情)하셨고, 나도 두터이 권애(眷愛)하였다.
- 바야흐로 길이 수하기를 기대하여 함께 안락한 영화를 누리고자 하였더니, 어찌 뜻했으랴,
- 젊은 나이에 우연히 병에 걸려서 백약이 무효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 길이 수족(手足)이 이지러짐을 생각하니, 어찌 심간(心肝)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을 이기리오.
- 하물며 부왕의 상복도 끝나기 전에 또 체(棣)나무가 꺾어졌다.
- 고요히 생각하여 보니 어찌 이렇게 서러울 수가 있는가.
- 어린 아이가 있으나 급작히 믿고 의지할 곳을 잃었도다.
- 슬픔을 머금고서 말을 엮어 사관을 보내어 전(奠)을 드리노라.
- 슬프다. 살아서는 동기로서 항상 친애한 마음을 두터이 하였고,
- 죽어 가니 유명의 길이 다르므로 특히 조휼(弔恤)하는 전례를 더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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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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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태종(太宗, 1367 ~ 1422)
- 어머니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 ~ 1420)
- 언니 :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 ~ 1460)
- 언니 :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 ~ 1455)
- 언니 :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 ~ 1415)
- 오빠 :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 ~ 1462)
- 오빠 :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 ~ 1486)
- 오빠 : 세종(世宗, 1397 ~ 1450)
- 남동생 :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 ~ 1418)
- 부마 : 의산군 남휘(宜山君 南暉, ? ~ 1454)
- 장남 : 남빈(南份, 1421 ~ ?)
- 며느리 : 홍여공(洪汝恭)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 1421 ~ ?)
- 손자 : 의산군 충무공 남이(宜山君 忠武公 南怡, 1443 ∼ 1468)
- 장녀 : 평산 신씨 대사성(大司成) 신자승(申自繩)의 처
- 외손자 : 신숙근(申叔根)
- 외손자 : 신숙정(申叔楨)
- 외손자 : 신숙권(申叔權)[2]
- 외손자 : 신숙회(申叔檜)
- 외손자 : 신숙빈(申叔彬)
- 외손자 : 신숙모(申叔模)
- 외손자 : 신숙완(申叔梡)
- 외손자 : 신숙지(申叔枝)
- 외손녀 : 김석조(金錫祚)의 처
- 외손녀 : 전의 이씨 이부(李敷)의 처
- 외손녀 : 선산 곽씨 곽근(郭垠)의 처
- 외손녀 : 함열 남궁씨 남궁찬(南宮璨)의 처
- ↑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1월 25일(임인)
정선공주의 졸기
정선공주가 졸(卒)하였다. 임금의 동복(同母) 누이 동생으로,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 21세로 돌아가니, 임금이 슬퍼하여 찬수를 거두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중략)
- ↑ 신사임당의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