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정복고

예시 제1차 왕정복고(프랑스어: Première Restauration)은 프랑스 역사에서 잠시 부르봉 왕조가 왕좌로 돌아왔던 시기를 가리키는 프랑스 내 역사 용어로, 나폴레옹 1세가 1814년 봄에 퇴위한 후부터 1815년 3월 백일천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체제는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지친 상황 속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오스트리아)이 프랑스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며 시작되었다. 연합국들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부르봉 왕가의 망명자들, 프랑스 내부 기관들, 외국 세력들 간의 미묘한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4월 6일에 퇴위하면서 루이 18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그달 말에 파리에 입성해 튀일리궁에 자리 잡았다.

Première Restauration
제1차 왕정복고

1814~1815
1814년 데파르트망이 포함된 프랑스 지도
1814년 데파르트망이 포함된 프랑스 지도
영국에서 제작된 1814년 프랑스 지도
영국에서 제작된 1814년 프랑스 지도
수도파리
정치
정치체제입헌군주제
국왕루이 18세
역사
 • 샤몽 조약 체결
파리 조약 체결
1814년 헌장 반포
나폴레옹 복권
1814년 4월 6일
1814년 5월 30일
1814년 7월 4일
1815년 5월 30일
인문
공용어프랑스어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

새로운 체제는 입헌군주제였다. 국가를 화합시키기 위해 왕정 복귀와 동시에 프랑스 혁명에서 이룩된 주요 성과 중 일부를 유지하려 했다. 이를 위해 왕은 1814년 헌장(Charte de 1814)을 채택해 국민에게 제공했다. 왕권이 복원되었지만, 동시에 혁명 기간에 얻어진 개인의 권리 중 일부가 보존되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체제는 국민을 화합시키려 노력했지만, 혁명 시기에 입은 피해에 대한 복수를 기대했던 극단적인 왕당파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에 실망했다. 또한, 교회의 권력이 다시 강해지고 군대 규모가 축소되면서 체제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 상륙했다. 처음에는 소규모 군대와 함께했지만, 점차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결집시키며 프랑스를 가로질러 진군했다. 루이 18세는 이를 나폴레옹을 제거할 기회로 보았지만, 점점 더 많은 군대가 나폴레옹에게 가담하면서 이를 막지 못했다. 결국 루이 18세는 3월 19일에 파리를 떠났고, 다음 날 나폴레옹이 튀일리궁에 도착하면서 체제는 무너졌다. 왕정은 다시 한 번 망명길에 올라 헨트로 떠났다. 이후 백일천하워털루 전역이 끝난 후에야 루이 18세는 왕좌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는 제2차 왕정복고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부르봉 왕조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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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프랑스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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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초,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스웨덴,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여러 독일 국가들로 구성된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맞서고 있었다. 이 국가들의 연합군이 프랑스 영토를 침공했으며, 나폴레옹 1세는 프랑스 원정 중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의 군사적 상황은 점점 더 불리해졌다. 한편, 프랑스 국민은 전쟁에 대한 피로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점점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합국도 왕정 복고보다는 나폴레옹과 평화 조약을 맺는 방안을 고려하며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의 상황을 과대평가하며 프랑스의 "자연적 국경"을 포기하지 않는 조건으로만 평화를 받아들이겠다고 고집해 협상이 결렬되었다.[1] 결국 연합국은 3월 1일 샤몽 조약을 체결하며 나폴레옹의 퇴위 전까지는 별도의 평화 조약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했다.[2]

프랑스 국민의 왕정에 대한 여론은 지역에 따라 혼재되어 있었다. 동부 국경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저항 운동을 벌였지만, 반대로 러시아군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를 해방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전쟁의 피로감, 병력 징집과 세금 부과로 인한 분노, 그리고 구체제 귀족과 제국 귀족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구는 많은 국민을 왕정 복고라는 아이디어 아래 단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단결은 위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3]

한편, 연합국 내에서도 각국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루이즈가 섭정을 맡는 방안을 선호했으나, 이는 다른 국가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지 않았고, 대신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그가 연합군의 한 부대를 이끌고 있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절대왕정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미래의 루이 필리프 1세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영국의 지지를 받는 부르봉 왕조가 유력한 선택지로 남게 되었다. 연합국은 내부 갈등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 내부에서 상황이 해결될 때 즈음 최종 방향을 결정하도록 맡기기로 했다.[4]

나폴레옹의 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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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의 동생이자 "루이 18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주장하던 프로방스 백작은 하트웰 하우스에 머물며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 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은 프랑스 동부를 침공하는 연합군을 따라다녔다. 부르봉 왕가는 연합국이 다른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국내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5] 아르투아 백작의 두 아들도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리 공작저지섬에서 노르망디의 봉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맏아들 앙굴렘 공작은 3월 12일, 페르디낭 드 베르티에 드 소비니가 이끄는 신앙 기사단이 보르도에서 일으킨 반란 덕분에 그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장바티스트 린치는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며 같은 날 왕자를 맞이했고, 이를 통해 임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영국군이 보르도를 점령했으나 나폴레옹과의 협상이 진행 중이었던 탓에 웰링턴 공작은 샤몽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신중을 기했다.[6] 이와 동시에 남부에서도 혼란이 발생했고, 리옹도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7]

섭정회의는 제국군 잔여 병력과 함께 루아르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한편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원수들의 압박을 받으며 퇴위를 고민하게 되었다. 섭정회의의 유일한 남은 구성원인 탈레랑은 3월 31일, 파리에 입성한 연합군을 이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의 협상을 주도하며 상황을 통제했다.[8] 하지만 그의 활동은 신앙 기사단이 파리에서 연합군 입성 시 왕당파 시위를 조직하면서 방해를 받았다.[9] 게다가 이들은 러시아 황제로부터 프로방스 백작을 왕위에 복귀시키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탈레랑은 이들을 몰아내고 상원과 입법부를 설득하여 4월 2일 나폴레옹의 퇴위를 선언하고 프로방스 백작에게 프랑스 왕위를 제안하도록 했다.[10]

4월 1일, 니콜라 프랑수아 벨라르트가 초안을 작성한 총회의 선언문은 파리 부르주아 계층에게 왕정 복고의 정당성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이 과정에서 탈레랑은 부르봉 왕가를 달가워하지 않던 러시아 황제를 설득해 복고왕정이 나폴레옹을 영원히 배제할 유일한 방안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복고왕정이 자신의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길 원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5인의 임시 정부 구성을 요구하며 실질적으로 아르투아 백작이 임명한 왕실 위원들을 무력화시켰다. 4월 6일에는 1791년 헌법과 유사한 입헌적 성격의 헌법을 통과시켰다.[11] 이 헌법의 제2조는 "프랑스 국민은 마지막 왕의 동생을 프랑스의 왕으로 자유롭게 초대한다"고 명시했다. 이 헌법은 프랑스 국민에게 제출되고 루이 18세는 이를 준수할 것을 맹세해야 했다. 이는 왕이 국민의 동의 없이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던 왕당파의 불만을 샀고, 일부는 헌법 자체가 군주제에 반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12]

같은 날, 나폴레옹 1세는 퇴위를 수용하고 4월 14일 퐁텐블로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그는 엘바섬의 군주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가 그에게 종신 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13]

참고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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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rtrand Goujon 2012, 15-16쪽)
  2. (Francis Démier 2012, 39-40쪽)
  3. (André Jardin et André-Jean Tudesq 1973, 9-11쪽)
  4. (André Jardin et André-Jean Tudesq 1973, 12-13쪽)
  5. (Francis Démier 2012, 39쪽)
  6. (Francis Démier 2012, 41쪽)
  7. (Bertrand Goujon 2012, 21쪽)
  8. (Bertrand Goujon 2012, 22쪽)
  9. Parisian life through the 틀:S- century by Paul Adolphe van Cleemputte, page 272
  10. (Francis Démier 2012, 47쪽)
  11. (André Jardin et André-Jean Tudesq 1973, 14쪽)
  12. (Francis Démier 2012, 48-49쪽)
  13. (Francis Démier 2012, 50쪽)

외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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