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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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1189년~1192년)은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이자 '이슬람의 옹호자'라고 알려진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결성된 기독교의 십자군을 말한다. 배경편집1169년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한 살라흐 앗 딘은 1171년 재상을 맡아 일해오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 후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낸다는 신념의 실현을 위해 생애 전부를 걸었다. 1174년 시리아를 다스리기 시작해 십자군 국가들을 포위하였다. 1187년 7월 4일 살라흐 앗 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10월 2일 예루살렘이 항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붕괴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당시에 발생했던 십자군들의 잔악한 행위와는 반대로,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정복시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 세력의 거점은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경과편집3차 십자군의 발흥편집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이 유럽에 전해졌을 때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교황 우르바노 3세는 그 충격으로 죽었고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탈환을 목표로 새로운 십자군 파견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호소했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존엄왕 필리프 2세는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상태에 있었으나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종결하고, 쌍방은 국내에서 [사라덴세(稅)]을 부과하여 십자군 편성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양국간의 전쟁은 곧 재개되고, 게다가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가 국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각국의 호응편집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도 교황의 호소에 답하여 십자군 첫 선봉으로 1189년에 출발했다. 프리드리히는 도중에 살라흐 앗 딘과 비밀협정을 맺었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게로스의 적대적 행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령을 급히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189년 5월 18일 룸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코니움을 점령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가 킬리키아의 살레흐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보다도 많았으나, 프리드리히가 죽자 순식간에 해산하고 말았다. 일부 사람들은 계속 전진했으나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이다 패배한다. 1191년 잉글랜드 왕 사자심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함께 해로를 통해 출발했으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각자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리처드는 도중에 키프로스섬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그 시기 비잔티움 제국측의 총독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에게서 받은 무례에 분노하여 5월말까지 섬 전체를 점령했다. 그 후 이미 유명무실해진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낭에게 이 섬을 넘겼다. 한편 필리프는 티레에 도착해, 예루살렘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코라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아크레 공방전편집1191년 4월 필리프는 예전 프리드리히의 패잔병을 가세시켜, 아크레를 포위공격 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리처드의 군이 포위에 가담했다. 아이유브 왕조군은 포위를 뚫으려고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격퇴되고, 7월 12일 아크레는 함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십자군측 3명의 사령관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싼 내부항쟁이 벌어졌다. 독일인들의 사령관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와 필리프와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으나, 리처드는 점령한 도시에서 레오폴트의 깃발을 제거했다. 필리프도 또한 리처드에게 불만을 품게되어, 8월 귀국하고 만다. 8월 22일 리처드는 아크레 항복시 맺은 협정을 살라흐 앗 딘이 준수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억류했던 이슬람교도 3,000명을 모두 처형하였다.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한 출발지로써 항구 야파의 탈취를 계획했다. 9월 아르수프를 행군하던 그들은 살라흐 앗 딘에게 공격받았으나, 리처드는 이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아르수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192년 1월 예루살렘에 접근했으나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을 맞닥뜨리자 군대를 후퇴시켰다. 7월에 들어서 살라흐 앗 딘이 야파 탈환의 움직임에 나섰으나, 7월 31일의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의 군대에게 패배해 실패했다. 휴전과 철수편집리처드의 군대는 피로가 쌓였고, 언제까지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과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에 대한 불만이 군대 내에 퍼졌다. 1192년 9월 2일 리처드와 살라흐 앗 딘은 1년 이상 교섭을 나눈 결과, 아크레를 포함한 티레부터 야파에 이르는 해안부의 모든항구를 예루살렘 왕국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의 통치하에 둔다는 최종적인 휴전협정을 맺었다. 또한 체결된 문서에는 비무장한 기독교도의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는 것을 허락한다는 조건도 더해졌다. 9월말 리처드는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하고, 제3차 십자군 원정은 이로써 종료되었다. 제3차 십자군의 영향편집제3차 십자군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기술한 것은 노르만인 시인 안브로제 및 웨일즈의 역사가 지랄두스 칸브렌시즈의 저작에서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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